샤넬백을 버린 날,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최유리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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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조금씩 알아간다는 건 한편 좋은 일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자신이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대개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장점보다는 단점에 치우쳐있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약하다거나, 끈기가 없다거나, 낭비벽이 있다거나, 자제력을 잃고 시시때때로 욱하는 경향이 있다거나, 기분이 나빠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늘 마음에 쌓아두기만 한다는 등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문제들에 대해 그 원인을 캐가는 일은 생각보다 꽤 지난한 작업이며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그 원인을 발견한다고 해도 바로잡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쳤다거나, 비로소 알게 된 원인을 통해 자신의 인식을 수정하고 그것을 통해 나를 좀 더 사랑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을 바보 같다고 비난할 수 있는 여지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자존감.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에 자기 자신에게 지지를 보낼 수 있는 단단한 마음. 그것은 성인이 되어서 부모에게 일일이 말할 수 없는 다양한 위험을 마주쳤을 때 자신을 굳건히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준다. 내가 들었던 "안 돼"는 건강한 자존감을 방해했다. 난 내가 들었던 수많은 "안 돼" 때문에 처음부터 내게 그런 방패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p.23)

 

나를 깨닫고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간다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본질적인 나의 자아 정체성과 세상이 요구하는 직업 정체성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세상 사이에 불협화음이 존재할 때 세상에 맞서 나를 고집하는 건 꽤나 위험하며 자신에게도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니다. <샤넬백을 버린 날,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의 저자 최유리 역시 다르지 않았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으며, 30대 후반 박사 논문의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찾아온 우울증.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업, 화려하고 멋진 삶을 꿈꾸었던 저자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울증을 치유하기 위해 무작정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썼다. 삶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루저'일 때조차 내가 배워온 것들이 글을 스면서 정리되었다. 그러자 내가 뭘 잘하고, 뭘 좋아하는지 보였다. '패션 힐러'라는 내 업은 이렇게 만났다." (p.50)

 

단골 쇼핑몰 사장님 어깨에서 보았던 샤넬백만 있으면 삶이 달라질 줄 알았던 저자가 모든 걸 내려놓은 채 온전히 자신으로 돌아가 옷을 좋아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정체성 입기를 돕는 사람, 패션 힐러라는 새로운 업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을 책으로 엮은 <샤넬백을 버린 날,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는 Chapter 1. '패션의 완성은 자존감이다', Chapter 2. '트렌드 말고 나를 입기로 했다', Chapter 3. '진정한 아름다움은 삶에서 나온다', Chapter 4. '행복은 진정한 소통에서 나온다'의 구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가꿀 수 있을까? 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서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저자의 경험을 통해 들려준다.

 

"잠시 다른 세상을 엿보게 해준 샤넬백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난 이제 누군가의 사진 속 샤넬백을 동경하지 않는다. 진짜 '멋있다'는 샤넬백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었다. 이제 난 건강한 자존감과 진실한 소통에서 진짜 멋있는 삶을 꿈꾼다." (p.230)

 

소설가 김형경은 20대에 늘 있었던 죽음에 대한 충동으로 인해 2년에 걸쳐 정신분석과 치료를 받은 후 자신은 물론 타인에 대해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 후 <만 가지 행동>, <사람 풍경>, <좋은 이별> 등과 같은 심리 에세이 시리즈를 통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을 볼 때 자신과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세상을 사는 데 더없이 중요한 요소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나는 이따금 우리 주변에서 듣게 되는 혐오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우리 사회가 타인과의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도를 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치녀, 된장녀, 맘충, 한남충 등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단어들이 공공연히 쓰이는 걸 보면 사회 구성원의 스트레스 해소책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쌓이는 스트레스로 인해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화와 적개심만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인생 에세이인 동시에 쇼핑 노하우부터 옷장 점검, 이런 옷은 사지 마세요 check list 등 패션에 대한 전반적인 팁을 제공하는 패션 실용서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원한다고 누구나 '패피'가 되지는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감과 자신의 내면에 부합하는 옷을 선택할 수 있는 센스는 어느 정도의 경험과 조언에 의해 발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의 진척을 위해서라면 이 한 권의 책을 읽는 수고와 노력이 아깝지 않을 듯하다. 우리는 종종 자신보다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꾀죄죄한 자신의 모습을 탈피하려고도 애쓰는 법이니까 말이다. 코앞에 닥친 추석 명절이 마냥 두려운 '패션 루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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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간 하늘은 침묵만이 가득합니다. 태풍 이후의 땅 위에서의 소란과 분주함이 인간의 차지라면 자연의 모든 변화에 무심한 것 역시 신의 영역인 듯합니다. 언젠가 나는 '희망이란 생명이 유한한 자의 조급함'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영생이 가능하다면 희망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겠지요. 굳이 시간에 구애받을 일도 아니고 말이지요. 그런 까닭에 영원이란 나태함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교육을 통한 계층 사다리가 사라졌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산업화의 초창기에 교육은 인생역전의 기회로 작용했던 게 사실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였고, 제도가 미비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와 같은 혼란기에는 기회도 많은 법이지요. 탈법적이기는 하지만 부동산 투기가 자신의 계급을 바꿀 수 있는 공공연한 방법이었다면 교육과 고시는 정상적인 계층 상승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계급이 공고화되고 계층 상승은 꿈도 꿀 수 없는 그들만의 카르텔이 형성되는 바람에 일반인이 느끼는 박탈감은 날이 갈수록 커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각에서는 수시 전형의 문제를 거론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학생도 소위 SKY로 지칭되는 일류 대학의 수시 전형을 순전히 자력으로 통과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경험해 본 사람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결과를 낳았던 건 학생부의 불공정성도 한몫했었고, 학부모의 돈과 권력이 수험생의 능력을 과도하게 포장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수시 전형이 현대판 음서제로 불린 데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학생 선발을 대학의 자율에 맡기면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입시 전형이 탄생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많은 대학의 입시 전형을 속속들이 알 수도 없을뿐더러 각각의 대학은 학과마다 또 다른 입시 전형이 존재하니까 말이지요. 그렇게 분류하면 수천 가지의 입시 전형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장된 표현이 아닐 듯합니다. 부정한 편법이란 일반인들이 미처 다 알 수 없는 많은 방법 속에서 싹트게 마련이지요. 소위 '정보의 비대칭성'이나 '기울어진 운동장'은 수시 전형의 방법을 과도하게 늘림으로써 벌어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계층 사다리를 걷어찰 수 있었던 그들만의 방법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입시전형을 단일화하거나 몇 가지로 좁히자는 제안을 하면 어떨까요? 모르긴 몰라도 모든 대학이 손사래를 칠 겁니다. 대학의 자율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말이지요.

 

조국 후보자의 자녀도 그와 같은 혜택을 입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비록 불법은 아니지만 말이지요. 학생부의 공정성을 제도적으로 담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입시 전형의 방법을 최소한으로 제한하지 못한다면 '정보의 비대칭성'이나 '기울어진 운동장'을 수정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대학에게 학생 선발의 권한을 무제한적으로 제공하는 한 교육을 통한 계층 사다리는 영원히 복구되지 않을 듯합니다. 하나의 학과에서도 리더십 전형이니 논술 전형이니 학생부 종합전형이니 특기자 전형이니 정시 전형이니 해서 합격하는 방법이 제각각인데 전국의 각 대학별, 학과별 입시 전형을 모두 취합한다면 한 권의 책으로 엮기도 힘들지 않을까요? 욕심이 과한 것에 대한 경고였는지 13호 태풍 링링의 영향으로 교회의 첨탑이 여럿 부서졌더군요. 무심한 하늘 아래 오직 인간만 분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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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일기 -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
김연수 지음 / 레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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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도 그렇지만 소설가란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종의 인간인 양 생각하기 쉽다. 아

침이면 직장에 출근하여 지친 몸으로 퇴근하는, 그날이 그날 같은 대부분의 직장인과는 달리 뭔가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쓴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비록 생각은 우리와 크게 다를지언정 정해진 시간에 노동하듯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그와 같은 힘든 노동을 견디기 위해 운동으로 체력을 비축하는 등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은 일반 직장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이는 것이다.

 

<시절 일기>는 소설가 김연수가 지난 십 년간 보고 듣고 읽고 써내려간 한 개인의 일기이자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한 개인의 진솔한 삶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속한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 사회를 걱정하는 사십대의 어른이자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개인인 동시에 끊임없이 쓰고 지우고 다시 쓸 수밖에 없는 한 직업인으로서의 고민을 이 책에 담고 있다.

 

"일단 스펙터클이 된 타인의 불행에 사로잡히면 찌꺼기처럼 어떤 감정이 우리에게 들러붙는다. 목구멍 안에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하지만 이물감 외에는 그다지 고통을 주지 않는 생선 가시 같은 것. 고통이라기보다는 불편함에 가까운, 우리 내부의 타자.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슬퍼한 뒤에야 우리는 우리 안의 이 타자를 애도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어떤 슬픔으로도 그 타자를 애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타자에 대한 윤리의 기본은 그냥 불편한 채로 견디는 일이다. 이렇게 견디기 위해서 소설가들은 소설을 쓰고 감독들은 영화를 만들고 시인들은 시를 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견디기 위해서 사람들은 소설과 시를 읽고 영화를 본다. 애도를 완결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도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날마다 읽고 써야만 한다." (p.43~p.44)

 

한 사람의 일기라는 게 늘 그렇듯 글의 소재가 되는 것은 꽤나 다양하다. 세월호와 같은 국가적 재난에 대한 작가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이 글로 쓰일 수도 있고, 최근에 본 영화나 책에 대한 간단한 소회가 글의 소재가 될 수도 있고, 자주 듣던 노래나 문득 떠오르는 추억 혹은 더위나 추위 등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글의 소재로 등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시절 일기>가 우리네 일기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글을 잘 쓰고 못 쓰는 데서 오는 차이가 아니라 '쓰기' 자체에 대한 질문들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데 있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라는 직업의 특성상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소설가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소설가는 평생을 마침표 없이 과정으로서의 삶을 살다 가는 특이한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나 더 많은 소설을 창작하고 난 뒤, 나는 생각과 문장 사이의 시간차를 줄이는 일이 어떤 소설을 끝까지 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중에 그만둔 소설들 - 대개 작가 생활 초기에 이런 미완성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 과 끝까지 써서 출판한 소설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애초의 구상에서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느냐 아니냐에 있었다. 내 경우 출판까지 이른 소설들은 대개 애초의 구상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와 플롯으로 완성됐다." (p.242)   

 

몸이 기억하는 시간은 의식이 기억하는 시간과는 사뭇 다르게 흐른다. 일정한 루틴을 따라 큰 변덕 없이 흐르는 몸의 시간은 매번 죽음이라는 한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식의 시간에 한계와 매듭을 지어주는 것은 몸의 시간이 있기에 가능하다. <시절 일기>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우리의 삶은 우리를 매혹시킨 근대적 기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닮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구불구불 흘러내려가는 강을 닮아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곧잘 지체되며, 때로는 거꾸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지만, 그때가 바로 흐름에 몸을 맡길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쉼 없이 흘러가는 역사에 온전하게 몸을 내맡길 때, 우리는 근대 이후의 인간, 동시대인이 됩니다. 그때 저는 온전히 인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깊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역사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때, 우리의 절망은 서로에게 읽힐 수 있습니다. 문학의 위로는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p.301)

 

13호 태풍 링링이 휩쓸고 간 거리는 참담했다. 강풍에 부러진 가로수 잔가지들이 도로 곳곳에 수북수북 쌓여 있고, 피비린내처럼 질펀한 풋내가 풍겼다. 그러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흐린 하늘 밑으로 태풍의 잔해가 공포처럼 흘렀다. 지난 한 달 동안 뒤덮었던 대한민국의 사법 개혁에 저항하는 괴벨스의 광풍이 태풍 링링과 함께 사라진 듯하다. '뭘 계속 쓰다보니까 어느 날 소설가가 됐다'는 김연수 작가. '수천 번의 무와 대면한 뒤에야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고 믿는 작가는 괴벨스의 광풍이 몰아쳤던 지난 한 달의 대한민국을 어떤 모습으로 쓰고 있을까. 나는 태풍이 스러지고 있는 아득한 하늘을 보며 역사의 침묵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문득 깨닫는다. 꽁꽁 닫았던 창문을 이제야 열어본다. 신선한 바람 한 점이 훅 들이친다. 책상 위에 놓인 <시절 일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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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불거진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확인되지도 않은 여러 의혹과 인격 살인에 가까운 언론 보도 그리고 악의적인 왜곡과 sns를 통한 전파 등 근 한 달여 동안 대한민국을 뒤덮었던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독일 나치 체제에서 활약했던 요제프 괴벨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년~1945년)는 나치 독일에서 국가대중계몽선전장관의 자리에 앉아 나치 선전 및 미화를 책임졌던 인물이다. 라디오와 TV를 통해 정치 선전을 했던 그는 유창한 말솜씨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내가 굳이 괴벨스를 떠올리는 것은 작금의 사태를 불러온 상황이 언론과 검찰, 공안검사 출신의 자유당 의원들에 의한 선전 선동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하는 인물은 공안검사 출신의 의원들이다. 그들은 군사 독재 시절 정권에 저항하는 대학생과 일반인들을 향해 없는 죄도 만들어내던 인물이 아닌가. 거짓과 공작에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박정희와 박근혜 정권의 시녀로 봉직했던 김기춘을 비롯하여 황교안, 김진태, 주광덕, 곽상도 등 검사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하여 죄 없는 국민들을 향해 온갖 악행을 일삼았던 인물들이 이제는 대한민국의 민심을 흔들고 정권을 붕괴하려는 흑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몇몇 공안검사 출신 의원들의 치밀한 작전만으로는 이와 같은 엄청난 일을 벌일 수는 없었을 터, 권력에 기생하는 언론과 정치 검찰의 비호가 없었다면 애시당초 가능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없던 죄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던 기술은 과거 군부독재 시절에나 통했을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가능하지도, 그런 거짓 선전에 넘어갈 만큼 국민들 수준이 그렇게 허술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10대 소녀의 사생활이 담긴 생활기록부를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공개하는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국민들의 알 권리로 포장하던 그 낡은 기법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그들 역시 직시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공안검사 출신의 국회의원이 야비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자신이 마치 대한민국을 지키는 독립투사라도 되는 양 말이다. 내년 총선이 끝나면 사라질 인물이지만 지금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울분이 치솟는다. 그들은 지금도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던 군부 독재 시절의 권위를 그리워하고 있는 듯하다. 괴벨스의 망령이 그들 머릿속에 있는 한 그들의 파멸도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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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 맺힘 문지 에크리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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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독자라는 관계에서 작가는 그저 독자가 읽은 몇몇 작품에서 만들어진 희미한 이미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TV에서 보는 어느 연예인의 이미지를 그 사람의 전부인 양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있어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에 대한 인상이나 느낌은 그의 저서 <행복한 책 읽기>로 국한된다. 문학을 통해 나타난 한 시대의 다양하고 복잡한 '꿈'을 작가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이면까지 들추어내어 비평도 창작 못지않은 언어 예술의 한 분야임을 독자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던 문학평론가 김현은 냉철한 분석과 해박한 지식으로 인해 독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곤 했다. 그러나 <행복한 책 읽기>에서 김현은 적확하고 면밀한 언어 구사로 인해 다소 까칠한 이미지로 굳어졌다. 그의 실제 성격과는 별개로.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의 창립자이기도 한 김현의 산문집을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후반에 걸친 글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 책에서 작가는 그 시대의 한국과 예술, 그리고 삶에 관한 사유를 기록하고 있다. 생활의 공간에서 작가가 느낀 단상들을 엮은 1부 '두꺼운 삶과 얕은 삶', 작가의 일기장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2부 '즐거운 고통', 외국을 여행하며 쓴 기행문이 실린 3부 '묘지 순례', 만화·음악·영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글쓰기를 선보인 4부 '사라짐과 맺힘', 작가가 직접 방문했던 유럽의 미술관에서 감상한 피카소, 자코메티, 고흐, 드가, 로댕에 대한 짧은 인상을 남긴 5부 '미술관을 나오면서'로 구성된 <사라짐, 맺힘>을 통해 나는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 지성인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의 드가는 발레리의『드가·춤·데상』이라는 에세이에 나오는 드가이다. 브룬스비크에게 인식론이 무엇인가를 5분 안에 설명해달라는 질문을 던져 그를 당황하게 만들고, 밀라르메에게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도 왜 시를 쓸 수 없느냐고 물었다가, 시란 생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로 쓰는 것이라는 그의 핀잔을 받은 드가가 바로 내 기억 속의 드가이다. 그 드가가 말(馬)과 춤의 형태를 하고 나에게 달려든 것이다." (p.261)

 

비평가로서의 김현은 이 책에서 에세이스트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드러내는 듯하다. 물론 <김현 문학 전집>을 통해 평론뿐만 아니라 작가가 쓴 다양한 장르의 글을 접했던 독자라면 그닥 새로울 것도 없겠지만 나처럼 그가 쓴 평론만 겨우 읽었던 허술한 독자라면 책을 읽는 내내 '아, 작가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았을까 싶다. 첫 한글세대이면서 4·19세대로서 창작과 문학 이론, 비평의 관계를 혁신하고 한국문학에 새로운 통찰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은 작가이기에 빼어난 글솜씨야 이미 정평이 난 것이지만 일상의 언어로 써내려간 여러 꼭지의 글들에서 평론과는 다른 부드러운 면모와 친근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인간은 자기 환상의 노예이다. 그는 항상 자기 안에 그리고 자기 뒤에 유령을 데리고 산다. 때때로 그는 그의 앞에서도 유령을 본다. 술에 취해 있거나, 눈이 눈의 역할을 하기를 포기했을 때에 말이다." (p.166)

 

책을 읽을 때의 우리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한다. 그곳에서 우리들 각자가 건져 올린 사유는 때때로 현실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기발한 생각들로 채워지기도 하고, 현실의 불안과 여러 걱정거리로부터 해방된 무한한 자유를 선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문학은 살풍경한 현실로부터 우리를 잠시 도피시키기도 하고, 다른 시각으로 현실을 돌아볼 수 있는 분명한 계기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불안은 의식인의 사치이다.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자신이 분명하게 알지 못할 때 생겨난다. 그것은 대부분 초조를 동반한다. 그것은 걱정과는 전연 다른 감정의 질이다." (p.172)

 

태풍 링링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에도 아랑곳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가을비가 내리고 이따금 천둥이 치는 하늘을 무심한 눈길로 그저 바라볼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는 것처럼 말이다. 김현의 글을 읽는다는 건 내가 건너온 오래전 시간을 한 번쯤 되새기는 일인 동시에 태풍 전야의 불안을 조금쯤 잠재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오래도록 가라앉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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