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일기 -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
김연수 지음 / 레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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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도 그렇지만 소설가란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종의 인간인 양 생각하기 쉽다. 아

침이면 직장에 출근하여 지친 몸으로 퇴근하는, 그날이 그날 같은 대부분의 직장인과는 달리 뭔가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쓴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비록 생각은 우리와 크게 다를지언정 정해진 시간에 노동하듯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그와 같은 힘든 노동을 견디기 위해 운동으로 체력을 비축하는 등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은 일반 직장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이는 것이다.

 

<시절 일기>는 소설가 김연수가 지난 십 년간 보고 듣고 읽고 써내려간 한 개인의 일기이자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한 개인의 진솔한 삶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속한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 사회를 걱정하는 사십대의 어른이자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개인인 동시에 끊임없이 쓰고 지우고 다시 쓸 수밖에 없는 한 직업인으로서의 고민을 이 책에 담고 있다.

 

"일단 스펙터클이 된 타인의 불행에 사로잡히면 찌꺼기처럼 어떤 감정이 우리에게 들러붙는다. 목구멍 안에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하지만 이물감 외에는 그다지 고통을 주지 않는 생선 가시 같은 것. 고통이라기보다는 불편함에 가까운, 우리 내부의 타자.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슬퍼한 뒤에야 우리는 우리 안의 이 타자를 애도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어떤 슬픔으로도 그 타자를 애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타자에 대한 윤리의 기본은 그냥 불편한 채로 견디는 일이다. 이렇게 견디기 위해서 소설가들은 소설을 쓰고 감독들은 영화를 만들고 시인들은 시를 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견디기 위해서 사람들은 소설과 시를 읽고 영화를 본다. 애도를 완결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도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날마다 읽고 써야만 한다." (p.43~p.44)

 

한 사람의 일기라는 게 늘 그렇듯 글의 소재가 되는 것은 꽤나 다양하다. 세월호와 같은 국가적 재난에 대한 작가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이 글로 쓰일 수도 있고, 최근에 본 영화나 책에 대한 간단한 소회가 글의 소재가 될 수도 있고, 자주 듣던 노래나 문득 떠오르는 추억 혹은 더위나 추위 등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글의 소재로 등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시절 일기>가 우리네 일기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글을 잘 쓰고 못 쓰는 데서 오는 차이가 아니라 '쓰기' 자체에 대한 질문들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데 있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라는 직업의 특성상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소설가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소설가는 평생을 마침표 없이 과정으로서의 삶을 살다 가는 특이한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나 더 많은 소설을 창작하고 난 뒤, 나는 생각과 문장 사이의 시간차를 줄이는 일이 어떤 소설을 끝까지 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중에 그만둔 소설들 - 대개 작가 생활 초기에 이런 미완성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 과 끝까지 써서 출판한 소설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애초의 구상에서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느냐 아니냐에 있었다. 내 경우 출판까지 이른 소설들은 대개 애초의 구상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와 플롯으로 완성됐다." (p.242)   

 

몸이 기억하는 시간은 의식이 기억하는 시간과는 사뭇 다르게 흐른다. 일정한 루틴을 따라 큰 변덕 없이 흐르는 몸의 시간은 매번 죽음이라는 한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식의 시간에 한계와 매듭을 지어주는 것은 몸의 시간이 있기에 가능하다. <시절 일기>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우리의 삶은 우리를 매혹시킨 근대적 기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닮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구불구불 흘러내려가는 강을 닮아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곧잘 지체되며, 때로는 거꾸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지만, 그때가 바로 흐름에 몸을 맡길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쉼 없이 흘러가는 역사에 온전하게 몸을 내맡길 때, 우리는 근대 이후의 인간, 동시대인이 됩니다. 그때 저는 온전히 인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깊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역사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때, 우리의 절망은 서로에게 읽힐 수 있습니다. 문학의 위로는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p.301)

 

13호 태풍 링링이 휩쓸고 간 거리는 참담했다. 강풍에 부러진 가로수 잔가지들이 도로 곳곳에 수북수북 쌓여 있고, 피비린내처럼 질펀한 풋내가 풍겼다. 그러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흐린 하늘 밑으로 태풍의 잔해가 공포처럼 흘렀다. 지난 한 달 동안 뒤덮었던 대한민국의 사법 개혁에 저항하는 괴벨스의 광풍이 태풍 링링과 함께 사라진 듯하다. '뭘 계속 쓰다보니까 어느 날 소설가가 됐다'는 김연수 작가. '수천 번의 무와 대면한 뒤에야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고 믿는 작가는 괴벨스의 광풍이 몰아쳤던 지난 한 달의 대한민국을 어떤 모습으로 쓰고 있을까. 나는 태풍이 스러지고 있는 아득한 하늘을 보며 역사의 침묵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문득 깨닫는다. 꽁꽁 닫았던 창문을 이제야 열어본다. 신선한 바람 한 점이 훅 들이친다. 책상 위에 놓인 <시절 일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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