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 맺힘 문지 에크리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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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독자라는 관계에서 작가는 그저 독자가 읽은 몇몇 작품에서 만들어진 희미한 이미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TV에서 보는 어느 연예인의 이미지를 그 사람의 전부인 양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있어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에 대한 인상이나 느낌은 그의 저서 <행복한 책 읽기>로 국한된다. 문학을 통해 나타난 한 시대의 다양하고 복잡한 '꿈'을 작가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이면까지 들추어내어 비평도 창작 못지않은 언어 예술의 한 분야임을 독자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던 문학평론가 김현은 냉철한 분석과 해박한 지식으로 인해 독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곤 했다. 그러나 <행복한 책 읽기>에서 김현은 적확하고 면밀한 언어 구사로 인해 다소 까칠한 이미지로 굳어졌다. 그의 실제 성격과는 별개로.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의 창립자이기도 한 김현의 산문집을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후반에 걸친 글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 책에서 작가는 그 시대의 한국과 예술, 그리고 삶에 관한 사유를 기록하고 있다. 생활의 공간에서 작가가 느낀 단상들을 엮은 1부 '두꺼운 삶과 얕은 삶', 작가의 일기장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2부 '즐거운 고통', 외국을 여행하며 쓴 기행문이 실린 3부 '묘지 순례', 만화·음악·영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글쓰기를 선보인 4부 '사라짐과 맺힘', 작가가 직접 방문했던 유럽의 미술관에서 감상한 피카소, 자코메티, 고흐, 드가, 로댕에 대한 짧은 인상을 남긴 5부 '미술관을 나오면서'로 구성된 <사라짐, 맺힘>을 통해 나는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 지성인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의 드가는 발레리의『드가·춤·데상』이라는 에세이에 나오는 드가이다. 브룬스비크에게 인식론이 무엇인가를 5분 안에 설명해달라는 질문을 던져 그를 당황하게 만들고, 밀라르메에게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도 왜 시를 쓸 수 없느냐고 물었다가, 시란 생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로 쓰는 것이라는 그의 핀잔을 받은 드가가 바로 내 기억 속의 드가이다. 그 드가가 말(馬)과 춤의 형태를 하고 나에게 달려든 것이다." (p.261)

 

비평가로서의 김현은 이 책에서 에세이스트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드러내는 듯하다. 물론 <김현 문학 전집>을 통해 평론뿐만 아니라 작가가 쓴 다양한 장르의 글을 접했던 독자라면 그닥 새로울 것도 없겠지만 나처럼 그가 쓴 평론만 겨우 읽었던 허술한 독자라면 책을 읽는 내내 '아, 작가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았을까 싶다. 첫 한글세대이면서 4·19세대로서 창작과 문학 이론, 비평의 관계를 혁신하고 한국문학에 새로운 통찰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은 작가이기에 빼어난 글솜씨야 이미 정평이 난 것이지만 일상의 언어로 써내려간 여러 꼭지의 글들에서 평론과는 다른 부드러운 면모와 친근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인간은 자기 환상의 노예이다. 그는 항상 자기 안에 그리고 자기 뒤에 유령을 데리고 산다. 때때로 그는 그의 앞에서도 유령을 본다. 술에 취해 있거나, 눈이 눈의 역할을 하기를 포기했을 때에 말이다." (p.166)

 

책을 읽을 때의 우리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한다. 그곳에서 우리들 각자가 건져 올린 사유는 때때로 현실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기발한 생각들로 채워지기도 하고, 현실의 불안과 여러 걱정거리로부터 해방된 무한한 자유를 선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문학은 살풍경한 현실로부터 우리를 잠시 도피시키기도 하고, 다른 시각으로 현실을 돌아볼 수 있는 분명한 계기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불안은 의식인의 사치이다.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자신이 분명하게 알지 못할 때 생겨난다. 그것은 대부분 초조를 동반한다. 그것은 걱정과는 전연 다른 감정의 질이다." (p.172)

 

태풍 링링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에도 아랑곳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가을비가 내리고 이따금 천둥이 치는 하늘을 무심한 눈길로 그저 바라볼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는 것처럼 말이다. 김현의 글을 읽는다는 건 내가 건너온 오래전 시간을 한 번쯤 되새기는 일인 동시에 태풍 전야의 불안을 조금쯤 잠재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오래도록 가라앉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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