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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백을 버린 날,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최유리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8월
평점 :
자기 자신을 조금씩 알아간다는 건 한편 좋은 일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자신이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대개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장점보다는 단점에 치우쳐있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약하다거나, 끈기가 없다거나, 낭비벽이 있다거나, 자제력을 잃고 시시때때로 욱하는 경향이 있다거나, 기분이 나빠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늘 마음에 쌓아두기만 한다는 등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문제들에 대해 그 원인을 캐가는 일은 생각보다 꽤 지난한 작업이며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그 원인을 발견한다고 해도 바로잡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쳤다거나, 비로소 알게 된 원인을 통해 자신의 인식을 수정하고 그것을 통해 나를 좀 더 사랑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을 바보 같다고 비난할 수 있는 여지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자존감.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에 자기 자신에게 지지를 보낼 수 있는 단단한 마음. 그것은 성인이 되어서 부모에게 일일이 말할 수 없는 다양한 위험을 마주쳤을 때 자신을 굳건히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준다. 내가 들었던 "안 돼"는 건강한 자존감을 방해했다. 난 내가 들었던 수많은 "안 돼" 때문에 처음부터 내게 그런 방패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p.23)
나를 깨닫고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간다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본질적인 나의 자아 정체성과 세상이 요구하는 직업 정체성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세상 사이에 불협화음이 존재할 때 세상에 맞서 나를 고집하는 건 꽤나 위험하며 자신에게도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니다. <샤넬백을 버린 날,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의 저자 최유리 역시 다르지 않았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으며, 30대 후반 박사 논문의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찾아온 우울증.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업, 화려하고 멋진 삶을 꿈꾸었던 저자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울증을 치유하기 위해 무작정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썼다. 삶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루저'일 때조차 내가 배워온 것들이 글을 스면서 정리되었다. 그러자 내가 뭘 잘하고, 뭘 좋아하는지 보였다. '패션 힐러'라는 내 업은 이렇게 만났다." (p.50)
단골 쇼핑몰 사장님 어깨에서 보았던 샤넬백만 있으면 삶이 달라질 줄 알았던 저자가 모든 걸 내려놓은 채 온전히 자신으로 돌아가 옷을 좋아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정체성 입기를 돕는 사람, 패션 힐러라는 새로운 업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을 책으로 엮은 <샤넬백을 버린 날,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는 Chapter 1. '패션의 완성은 자존감이다', Chapter 2. '트렌드 말고 나를 입기로 했다', Chapter 3. '진정한 아름다움은 삶에서 나온다', Chapter 4. '행복은 진정한 소통에서 나온다'의 구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가꿀 수 있을까? 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서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저자의 경험을 통해 들려준다.
"잠시 다른 세상을 엿보게 해준 샤넬백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난 이제 누군가의 사진 속 샤넬백을 동경하지 않는다. 진짜 '멋있다'는 샤넬백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었다. 이제 난 건강한 자존감과 진실한 소통에서 진짜 멋있는 삶을 꿈꾼다." (p.230)
소설가 김형경은 20대에 늘 있었던 죽음에 대한 충동으로 인해 2년에 걸쳐 정신분석과 치료를 받은 후 자신은 물론 타인에 대해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 후 <만 가지 행동>, <사람 풍경>, <좋은 이별> 등과 같은 심리 에세이 시리즈를 통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을 볼 때 자신과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세상을 사는 데 더없이 중요한 요소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나는 이따금 우리 주변에서 듣게 되는 혐오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우리 사회가 타인과의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도를 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치녀, 된장녀, 맘충, 한남충 등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단어들이 공공연히 쓰이는 걸 보면 사회 구성원의 스트레스 해소책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쌓이는 스트레스로 인해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화와 적개심만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인생 에세이인 동시에 쇼핑 노하우부터 옷장 점검, 이런 옷은 사지 마세요 check list 등 패션에 대한 전반적인 팁을 제공하는 패션 실용서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원한다고 누구나 '패피'가 되지는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감과 자신의 내면에 부합하는 옷을 선택할 수 있는 센스는 어느 정도의 경험과 조언에 의해 발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의 진척을 위해서라면 이 한 권의 책을 읽는 수고와 노력이 아깝지 않을 듯하다. 우리는 종종 자신보다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꾀죄죄한 자신의 모습을 탈피하려고도 애쓰는 법이니까 말이다. 코앞에 닥친 추석 명절이 마냥 두려운 '패션 루저'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