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을 잃고 나면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삶을 좀 더 대범하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자식들을 위해서 혹은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안위는 뒤로 한 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아등바등하다가 정작 본인은 누려보지도 못한 채 아쉬운 삶을 마감했던 그리운 이들을 생각할라치면 '그렇게 갈 걸 뭐하러 그렇게 소심하게 살았어요?' 하는 공허한 질문을 허공을 향해 묻게 된다. 가까운 이의 죽음은 그렇게 산 자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과거로 변하게 하는 게 죽음이라면 무형의 영혼이 유형의 어떤 것으로 변하는 사물화의 과정 또한 죽음이다. 그러나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 뿐 모든 변화의 순간에는 쾌락이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산 자는 결코 경험해 볼 수 없는 게 죽음의 순간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포에 깃든 영혼을 죽여 자신의 뇌를 끝없이 사물화 시키는 마약 중독자들을 볼 때 우리의 죽음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추정하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우리는 안타까운 죽음을 목격했다. 가수 설리 씨에 이은 가수 구하라 씨의 죽음. 그 배경이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그렇게 쉽게 갈 거였으면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싫은 사람을 향해 욕이라도 실컷 하고 개차반 소리를 들을지언정 분풀이라도 실컷 하고 갈 것이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죽음을 통해 삶의 가치 판단을 새롭게 하고 삶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우리가 꼭 체험해야 할 것들의 순서를 다시 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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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30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02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왕업 - 상 - 아름답고 사나운 칼
메이위저 지음, 정주은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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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내기에는 궁중 암투를 그린 역사 소설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를 쓰는 작가도, 책을 읽는 독자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끝없이 쓰고 또 읽는다. 질리지도 않고 말이다. 역사와 문화는 조금씩 다를지언정 국적 불문 역사 소설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왠지 모르겠다. 서양 작가가 쓴 책이건 중국 작가가 쓴 작품이건 혹은 우리나라 작가가 쓴 역사 소설이건 내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따금 존경하던 사람에 대해 크게 실망했거나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했을 때 궁중 암투를 그린 역사 소설 한 편을 읽으면 그렇게 미웠던 사람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마음 한편에서 용서하는 마음이 싹트곤 한다. 모든 걸 다 용서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소기를 믿은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소기도 아버지를 믿은 적이 없거니와, 아버지를 부를 때도 늘 '좌상'이라고 할 뿐 '장인'이라고 표현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해에 내가 혼례복을 입고 재상부 대문을 나서는 순간,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그때부터 이미 나를 가장 친밀하고 믿을 만한 딸이 아니라 그저 맞수의 아내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나를 소기에게 시집보냈을 때부터 막강한 병력을 가진 사위를 경계하기 시작해, 그의 곁에 자신의 눈과 귀를 심어두었을 뿐만 아니라 나까지 멀리했다." (p.389)

 

중국의 여성작가 메이위저(寐語者)의 소설 <제왕업>은 신예작가의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장대한 스케일에 치밀한 구성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게다가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인간의 사랑과 욕망, 권력을 향한 비정함과 서로를 속고 속이는 배반과 모략, 빠른 스토리 전개 등에서 탁월한 진가를 발휘한다. 2007년 출간된 후 10년간 다양한 판본을 거듭하며 50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고 온라인 조회수도 누적 10억 뷰를 돌파했다는 <제왕업>은 2017년 이미 드라마로 제작되어 2019년 말 제작이 완료된 상태이며 2020년 초 절강위성TV에서 방영되는 중국 최고의 기대작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이야기는 궁중 최고의 가문인 낭야왕씨 집안의 왕현이 성인식(계례:筓禮)을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황제의 누이이자 공주인 어머니와 황후인 고모, 좌상 직책의 아버지를 둔 왕현은 궁중의 모든 이들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난다. 그녀가 마음에 두었던 남자는 사 귀비 소생의 3황자 자담이었다. 그러나 사 귀비가 죽고 자담이 궁궐에서 내쳐지면서 왕현의 혼사는 예장왕 소기 쪽으로 빠르게 진척된다.

 

"나도 무척 사랑한 사람이 있었단다. 한때 그는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자 또 슬픔이었지. 그 기쁨과 슬픔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 그것을 얻든 잃든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했단다. 그러나 또 다른 얻음과 잃음은 나 혼자만의 기쁨과 슬픔보다 훨씬 깊고 중하며, 살아 있는 한 거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었지. 그것은 바로 가문의 영예와 책임이었어." (p.57)

 

귀한 신분만큼이나 자신의 뜻대로 모든 걸 이룰 줄 알았던 왕현은 자신이 존귀한 존재가 아닌 한낱 가문을 위한 정략결혼의 도구일 뿐임을 깨닫는다. 게다가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의 소기는 오직 전쟁에서의 승리와 전공을 통하여 황제의 권위를 넘보는 위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된 예장왕은 북방 변경의 급박한 상황으로 인하여 혼례를 치른 첫날밤도 함께 보내지 않고 떠나버린다. 가문을 지키기 위한 결혼의 대가 치고는 치욕도 그런 치욕이 없었다. 왕현의 불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기의 부대에 의해 일족이 몰살당하고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게 되었던 하란잠에 의해 납치되기에 이른다. 그녀의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었을 때 소기가 극적으로 그녀를 구한다.

 

"시든 꽃은 미인처럼 박명(薄命)했다. 팔자를 잘못 타고났고, 길을 잘못 택했고, 사람을 잘못 만났다. 팔자를 잘못 타고나도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일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 가장 가엾은 것은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품은 뜻은 높지만 타고난 팔자가 더없이 기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걸음마다 가시밭길이 펼쳐져 뚫고 나가지 못하면 그 자리에 갇혀 죽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p.238)

 

세상 물정 모른 채 나약하고 순진하기만 했던 왕현은 여러 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강인한 철의 여인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정략결혼으로 서먹했던 소기와 왕현 두 사람의 관계도 더욱 뜨겁고 단단해진다. 자신들 앞에 펼쳐진 위험을 극복하며 두 사람은 무사히 가시밭길을 헤쳐갈 수 있을지... 상권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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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불위의 권력' 하면 언뜻 떠오르는 게 검찰이 되겠지만 실상은 검찰이나 국세청, 경찰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기관보다 더 우위에 있는 권력층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개신교 목사들이다. 일부 양심적인 목사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어떤 권력기관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권력기관의 장이 자신의 교회 신도이거나 장은 고사하고 그 조직의 고위직 간부만이라도 자신의 교회 신도가 될라치면 목사는 그들 위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거들먹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기관인 대통령도 후보 시절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목사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물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임 중에도 목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으니 목사의 권력이 하늘을 찌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목사의 권력은 마치 만인지상의 황제의 권위를 능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사전에 의하면 목사는 '예배를 인도하며 신도들에게 교의를 가르치는 성직자'라고 한다. 좀 더 범위를 넓혀 목회자라고 말할 때도 사전에는 역시 '교회 안팎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여 신도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정의는 옳지 않은 듯하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목사는 신도와 동등한 입장에서 신앙생활을 이끌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혹은 예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신도들에게 명령하고 지휘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신도들에게 성폭력을 저질러도, 내란 선동을 해도 목사란 직책은 유지되는 것이다. 사적으로 축재를 해도, 담임 목사라는 직책을 아들에게 세습을 하여도 목사는 누구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처벌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다. 신도가 감히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목사에게...

 

살다 보면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더러 있다. 낮부터 욱신욱신 몸이 쑤시고 신열이 나서 얼굴이 벌게졌던 오늘, 목사님께 안수 기도나 부탁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종일 들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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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
조승원 지음 / 싱긋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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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문학에 대한 평가와 에피소드, 다양한 주제의 변주 등 시중에 출판된 하루키 관련 책들은 차고 넘치지만 하루키 문학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해보라면 나는 '몽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몽환적'이라는 말은 중독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리얼리티 소설을 고집하는 작가는 독자들이 자신의 작품에 한두 번쯤 열광할 수는 있으나 결코 중독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위 '몽환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는 모두 하루키처럼 중독된 독자 군단을 거느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냉정하지만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예컨대 <百의 그림자>를 쓴 황정은 작가는 지극히 '몽환적'인 작품을 쓴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작가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고 완전히 빠져드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카스테라>와 <핑퐁>,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등으로 유명한 박민규 작가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독자 군단을 거느린 '몽환적' 글쓰기를 추구하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사실 하루키를 다룬 책은 이미 차고도 넘친다. 일반적인 하루키 비평서와 에세이는 국내에서 출간된 것만도 수십 종, 일본에는 수백 종쯤 된다. 하루키가 사랑한 음악을 주제로 쓴 책 역시 너무 많아서, 내 서재에 꽂혀 있는 것만도 다섯 종이다.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요리를 다룬 책이나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를 소개하는 책도 여러 종 나와 있다. 정보 접근성이 좋은 일본 작가가 '하루키의 술'을 주제로 이미 책을 썼다면, 굳이 나까지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다시 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p.8 '들어가며' 중에서)

 

그렇다면 황정은 작가와 박민규 작가 또는 황정은 작가와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단순히 작가의 필력만으로 따질 문제는 아닌 듯하다. 나는 박민규 작가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두 사람이 모두 '몽환적'인 글쓰기를 추구하고는 있지만 현실과 환상 그 중간쯤의 좁은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말하자면 접신을 한 무당이 작두를 타는 것처럼 말이다.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마음이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기술은 작가가 현실과 환상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순간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황정은 작가는 환상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강하다. 작품을 이해하는 여타의 작가들은 황정은 작가의 작품을 박민규 작가보다 더 우월하다고 평할지도 모르지만 독자는 그저 어리벙벙할 뿐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감도 잡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천명관 작가의 <고래>가 한동안 세간에 회자되면서 유명세를 탔던 까닭도 현실과 환상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면서 균형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글쓰기 단계에서 작가의 절제가 병행되지 않는다면 작가는 시나브로 어느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으로 성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렇듯 단순하지만 그 경계를 유지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몽환적' 글쓰기를 추구하는 작가라 할지라도 한두 작품 반짝하고 성공할 수는 있어도 하루키나 박민규처럼 꾸준한 팬덤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조승원 기자가 쓴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책이다.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술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었기에 소위 하루키 덕후'를 자처하는 작가들도 하루키와 술을 연관 지어 책을 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조승원 기자가 쓸 때까지 단 한 권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나로서도 의아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론 하루키에 대한 담론은 술이 아니고서도 주제를 찾자면 너무도 많은 까닭에 굳이 '하루키와 술'을 주제로 엮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술꾼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보태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 (p.342)

 

저자는 자신이 하루키스트인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자는 음악과 술을 사랑하는 미주가(美酒家)로서 하루키의 작품에 나오는 맥주, 와인, 위스키, 칵테일을 분류하여 자신이 찾아낸 해당 작품의 스토리 흐름과 주인공 사이의 대화를 인용함으로써 행간에 녹아 있는 술의 역할과 의미를 분석한다. 게다가 맥주, 와인, 위스키, 칵테일 등 자신이 분류한 술의 문명사와 제조법도 간략하게나마 맛깔나게 정리하고 있다.

 

하루키스트를 자처하는 독자나 그렇지 않은 독자라 할지라도, 심지어 하루키 작품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안티팬이라 할지라도 하루키의 작품에는 언제나 술과 음악(특히 재즈)이 등장하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귀동냥으로라도 들어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앞에서 제시했던 '몽환적'이라는 말과 술, 재즈는 어떻게 연관되는가. 다분히 정형적인 해석일지라도 술은 마시게 되면 취하게 되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이러한 이유로 중독성을 띠게 된다. 재즈 역시 비슷하다. 재즈 특유의 엇박자는 처음에는 낯설고 거친 느낌이 들게 마련이지만 자꾸 듣다 보면 술에 거나하게 취한 것처럼 빠져들게 된다. 말하자면 취하지 않고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것이다. 논리적이고 냉철한 이성을 중시하는 독자라면 하루키의 작품에 결코 빠져들 수 없다. 하루키 소설을 읽는다는 건 마치 시도 때도 없이 술에 취하거나 재즈 선율에 몸을 맡기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루키스트가 된다는 건 마약이나 술에 취하는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 속으로 기꺼이 빠져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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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마치 갓 들어온 신입생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려는 듯 익숙해지지 않은 추위가 훅 하고 끼쳐온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추위 몰려온 탓인지 허리 통증이 왔다. 전에도 허리가 아팠던 경험은 없지는 않았으나 딱히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이런 경험은 처음인지라 당혹스러웠다. 오전에 한의원을 찾아 물리치료를 받았다. 정말 오랜만에 부항도 뜨고 침도 맞았다. 내원하기 전보다 허리가 더 뻐근하고 굳어져서 걷는 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한 발짝을 떼는 게 이렇게 어렵다는 걸 아프지 않고서는 잘 알지 못한다. 느린 걸음으로 걷다 보니 보도에 쌓인 울긋불긋한 낙엽과 노란 은행잎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은행나무는 그루 수가 많지 않아 귀한 대접을 받았었다. 혈액순환 개선제의 재료로 쓰였던 은행나무 나뭇잎은 미처 물들기도 전에 훑어가는 바람에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아주 귀했고, 어쩌다 볼라치면 책갈피에 끼워 곱게 말려 두곤 했었다. 지금은 냄새가 지독한 은행도, 수북수북 쌓이는 은행잎도 눈길조차 두지 않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프다는 핑계로 바쁠 때는 미처 읽지 못했던 책을 꺼내 놓기는 했으나 청개구리처럼 책에 눈길은 가지 않고 줄곧 엇나가기만 한다. 몸이 아프니까 만사가 귀찮아져서일지도 모른다. 메이위저의 소설 <제왕업> 몇 페이지를 읽었다. 미처 들어보지 못한 작가인데 필력이 대단하다. 다만 아픈 허리 탓에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 게 힘들 뿐이다. 어제 내가 방문했던 어느 마을의 어르신이 내 손에 들려주었던 토종 홍시 몇 개를 점심 대용으로 먹었다. 크기는 작고 맛은 꿀처럼 달지만 씨가 많다는 게 흠이라면 흠. 그러나 다음 세대에는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 귀한 물건을 어르신은 내 손이 무겁게 가득 들려주셨었다.

 

바깥 기온은 여전히 쌀쌀하다. 낮에는 투명한 햇살이 넘쳐흘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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