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
조승원 지음 / 싱긋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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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문학에 대한 평가와 에피소드, 다양한 주제의 변주 등 시중에 출판된 하루키 관련 책들은 차고 넘치지만 하루키 문학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해보라면 나는 '몽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몽환적'이라는 말은 중독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리얼리티 소설을 고집하는 작가는 독자들이 자신의 작품에 한두 번쯤 열광할 수는 있으나 결코 중독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위 '몽환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는 모두 하루키처럼 중독된 독자 군단을 거느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냉정하지만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예컨대 <百의 그림자>를 쓴 황정은 작가는 지극히 '몽환적'인 작품을 쓴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작가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고 완전히 빠져드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카스테라>와 <핑퐁>,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등으로 유명한 박민규 작가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독자 군단을 거느린 '몽환적' 글쓰기를 추구하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사실 하루키를 다룬 책은 이미 차고도 넘친다. 일반적인 하루키 비평서와 에세이는 국내에서 출간된 것만도 수십 종, 일본에는 수백 종쯤 된다. 하루키가 사랑한 음악을 주제로 쓴 책 역시 너무 많아서, 내 서재에 꽂혀 있는 것만도 다섯 종이다.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요리를 다룬 책이나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를 소개하는 책도 여러 종 나와 있다. 정보 접근성이 좋은 일본 작가가 '하루키의 술'을 주제로 이미 책을 썼다면, 굳이 나까지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다시 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p.8 '들어가며' 중에서)

 

그렇다면 황정은 작가와 박민규 작가 또는 황정은 작가와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단순히 작가의 필력만으로 따질 문제는 아닌 듯하다. 나는 박민규 작가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두 사람이 모두 '몽환적'인 글쓰기를 추구하고는 있지만 현실과 환상 그 중간쯤의 좁은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말하자면 접신을 한 무당이 작두를 타는 것처럼 말이다.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마음이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기술은 작가가 현실과 환상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순간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황정은 작가는 환상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강하다. 작품을 이해하는 여타의 작가들은 황정은 작가의 작품을 박민규 작가보다 더 우월하다고 평할지도 모르지만 독자는 그저 어리벙벙할 뿐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감도 잡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천명관 작가의 <고래>가 한동안 세간에 회자되면서 유명세를 탔던 까닭도 현실과 환상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면서 균형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글쓰기 단계에서 작가의 절제가 병행되지 않는다면 작가는 시나브로 어느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으로 성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렇듯 단순하지만 그 경계를 유지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몽환적' 글쓰기를 추구하는 작가라 할지라도 한두 작품 반짝하고 성공할 수는 있어도 하루키나 박민규처럼 꾸준한 팬덤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조승원 기자가 쓴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책이다.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술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었기에 소위 하루키 덕후'를 자처하는 작가들도 하루키와 술을 연관 지어 책을 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조승원 기자가 쓸 때까지 단 한 권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나로서도 의아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론 하루키에 대한 담론은 술이 아니고서도 주제를 찾자면 너무도 많은 까닭에 굳이 '하루키와 술'을 주제로 엮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술꾼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보태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 (p.342)

 

저자는 자신이 하루키스트인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자는 음악과 술을 사랑하는 미주가(美酒家)로서 하루키의 작품에 나오는 맥주, 와인, 위스키, 칵테일을 분류하여 자신이 찾아낸 해당 작품의 스토리 흐름과 주인공 사이의 대화를 인용함으로써 행간에 녹아 있는 술의 역할과 의미를 분석한다. 게다가 맥주, 와인, 위스키, 칵테일 등 자신이 분류한 술의 문명사와 제조법도 간략하게나마 맛깔나게 정리하고 있다.

 

하루키스트를 자처하는 독자나 그렇지 않은 독자라 할지라도, 심지어 하루키 작품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안티팬이라 할지라도 하루키의 작품에는 언제나 술과 음악(특히 재즈)이 등장하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귀동냥으로라도 들어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앞에서 제시했던 '몽환적'이라는 말과 술, 재즈는 어떻게 연관되는가. 다분히 정형적인 해석일지라도 술은 마시게 되면 취하게 되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이러한 이유로 중독성을 띠게 된다. 재즈 역시 비슷하다. 재즈 특유의 엇박자는 처음에는 낯설고 거친 느낌이 들게 마련이지만 자꾸 듣다 보면 술에 거나하게 취한 것처럼 빠져들게 된다. 말하자면 취하지 않고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것이다. 논리적이고 냉철한 이성을 중시하는 독자라면 하루키의 작품에 결코 빠져들 수 없다. 하루키 소설을 읽는다는 건 마치 시도 때도 없이 술에 취하거나 재즈 선율에 몸을 맡기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루키스트가 된다는 건 마약이나 술에 취하는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 속으로 기꺼이 빠져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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