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업 - 상 - 아름답고 사나운 칼
메이위저 지음, 정주은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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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내기에는 궁중 암투를 그린 역사 소설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를 쓰는 작가도, 책을 읽는 독자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끝없이 쓰고 또 읽는다. 질리지도 않고 말이다. 역사와 문화는 조금씩 다를지언정 국적 불문 역사 소설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왠지 모르겠다. 서양 작가가 쓴 책이건 중국 작가가 쓴 작품이건 혹은 우리나라 작가가 쓴 역사 소설이건 내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따금 존경하던 사람에 대해 크게 실망했거나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했을 때 궁중 암투를 그린 역사 소설 한 편을 읽으면 그렇게 미웠던 사람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마음 한편에서 용서하는 마음이 싹트곤 한다. 모든 걸 다 용서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소기를 믿은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소기도 아버지를 믿은 적이 없거니와, 아버지를 부를 때도 늘 '좌상'이라고 할 뿐 '장인'이라고 표현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해에 내가 혼례복을 입고 재상부 대문을 나서는 순간,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그때부터 이미 나를 가장 친밀하고 믿을 만한 딸이 아니라 그저 맞수의 아내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나를 소기에게 시집보냈을 때부터 막강한 병력을 가진 사위를 경계하기 시작해, 그의 곁에 자신의 눈과 귀를 심어두었을 뿐만 아니라 나까지 멀리했다." (p.389)

 

중국의 여성작가 메이위저(寐語者)의 소설 <제왕업>은 신예작가의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장대한 스케일에 치밀한 구성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게다가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인간의 사랑과 욕망, 권력을 향한 비정함과 서로를 속고 속이는 배반과 모략, 빠른 스토리 전개 등에서 탁월한 진가를 발휘한다. 2007년 출간된 후 10년간 다양한 판본을 거듭하며 50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고 온라인 조회수도 누적 10억 뷰를 돌파했다는 <제왕업>은 2017년 이미 드라마로 제작되어 2019년 말 제작이 완료된 상태이며 2020년 초 절강위성TV에서 방영되는 중국 최고의 기대작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이야기는 궁중 최고의 가문인 낭야왕씨 집안의 왕현이 성인식(계례:筓禮)을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황제의 누이이자 공주인 어머니와 황후인 고모, 좌상 직책의 아버지를 둔 왕현은 궁중의 모든 이들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난다. 그녀가 마음에 두었던 남자는 사 귀비 소생의 3황자 자담이었다. 그러나 사 귀비가 죽고 자담이 궁궐에서 내쳐지면서 왕현의 혼사는 예장왕 소기 쪽으로 빠르게 진척된다.

 

"나도 무척 사랑한 사람이 있었단다. 한때 그는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자 또 슬픔이었지. 그 기쁨과 슬픔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 그것을 얻든 잃든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했단다. 그러나 또 다른 얻음과 잃음은 나 혼자만의 기쁨과 슬픔보다 훨씬 깊고 중하며, 살아 있는 한 거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었지. 그것은 바로 가문의 영예와 책임이었어." (p.57)

 

귀한 신분만큼이나 자신의 뜻대로 모든 걸 이룰 줄 알았던 왕현은 자신이 존귀한 존재가 아닌 한낱 가문을 위한 정략결혼의 도구일 뿐임을 깨닫는다. 게다가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의 소기는 오직 전쟁에서의 승리와 전공을 통하여 황제의 권위를 넘보는 위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된 예장왕은 북방 변경의 급박한 상황으로 인하여 혼례를 치른 첫날밤도 함께 보내지 않고 떠나버린다. 가문을 지키기 위한 결혼의 대가 치고는 치욕도 그런 치욕이 없었다. 왕현의 불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기의 부대에 의해 일족이 몰살당하고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게 되었던 하란잠에 의해 납치되기에 이른다. 그녀의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었을 때 소기가 극적으로 그녀를 구한다.

 

"시든 꽃은 미인처럼 박명(薄命)했다. 팔자를 잘못 타고났고, 길을 잘못 택했고, 사람을 잘못 만났다. 팔자를 잘못 타고나도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일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 가장 가엾은 것은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품은 뜻은 높지만 타고난 팔자가 더없이 기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걸음마다 가시밭길이 펼쳐져 뚫고 나가지 못하면 그 자리에 갇혀 죽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p.238)

 

세상 물정 모른 채 나약하고 순진하기만 했던 왕현은 여러 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강인한 철의 여인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정략결혼으로 서먹했던 소기와 왕현 두 사람의 관계도 더욱 뜨겁고 단단해진다. 자신들 앞에 펼쳐진 위험을 극복하며 두 사람은 무사히 가시밭길을 헤쳐갈 수 있을지... 상권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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