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웨이 부인 소담 클래식 4
버지니아 울프 지음, 유혜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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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있어 하루 24시간은 무척이나 긴 시간이다. 이는 은퇴 후 행동반경이 좁아진 이에게는 매우 현실적인 명제로 작용한다. 하루는 길고 한 달은 짧은 혹은 하루는 길고 1년 역시 짧은, 때로는 짧게 느껴지는 이런 모순은 노년기에 흔히 나타나는 어렵지 않은 마술이다. 하루의 길고 지루한 흐름 탓에 몸이 배배 꼬이는 것은 물론 크게 달라지지 않는 창밖 풍경을 열심히 관찰도 하고 좁은 거실을 괜스레 오가기도 하지만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이를 재촉할 방법은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이처럼 공간이 고정된 채 시간만 흐르는 삶의 비대칭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떻게든 시간과 공간이 맞물리는 삶의 층위를 향해 나아가도록 종용한다. 우리가 꾸려가는 삶의 형태는 시간과 공간을 축으로 하는, 4차원의 보편적인 구성이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고정된 공간을 보충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과거의 기억을 재생한다.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과거 어떤 시점의 공간으로 공간 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과거의 한 공간을 살게 되거나 과거의 한 공간에서 잠시 빠져나와 현재의 시공간을 살아가는, 이중의 삶을 살게 된다. 바람직한 삶의 형태라고는 보기 어렵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형태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기법이지만 시공간을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흔한 형태이기도 하다.


"그것은 끔찍한 고백이었지만(그는 다시 모자를 썼다), 쉰세 살이 된 지금은 누구라도 더 이상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생 그 자체, 인생의 매 순간순간, 한 방울 한 방울, 여기 이곳, 지금 이 순간, 햇살 속 리젠트 공원에 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사실은 지나치게 많았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모든 맛을 끄집어내기에는 한평생은 너무 짧았다. 모든 즐거움, 모든 의미를 다 끄집어내기에는 말이다."  (p.143~p.144)


버지니아 울프가 1925년에 출간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하원의원 댈러웨이의 부인인 클라리사가 겪은 6월의 어느 날 하루를 독자들에게 선보임으로써 우리들 각자가 사는 삶의 구성방식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깨닫게 한다. 이 소설의 화자인 클라리사는 저녁에 있을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꽃을 사러 집을 나선다. 런던의 거리와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그녀가 보고, 만나고, 대화하고, 목적하였던 꽃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길지 않은 시간 속에 30년 전의 추억과 현재의 상황이 교차한다. 더불어 작가는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클라리사 한 사람의 인생에 셉티머스의 삶을 대비시킨다. 전쟁 후유증으로 환각증에 시달리는 셉티머스는 매 순간 죽음의 유혹에 내몰린다.


"그는 그 한 가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죽음은 도전이었다. 죽음은 의사소통을 하려는, 자신들을 피해 가는 중심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의사소통을 하려는 시도였다. 친밀했던 관계는 멀어지고, 황홀함은 시들고, 사람은 혼자였다. 죽음에는 포옹하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자살을 한 이 청년은 자신의 보물을 들고 뛰어내린 걸까? "만약 지금이 죽을 때라면,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이다." 언젠가 흰옷을 입고 내려오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p.328)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많지만 소설을 구성하는 두 축은 화자인 클라리사와 중간중간 노출되는 셉티머스의 이야기이다. 파티를 통해 하루를 고단하게 보낸 지인들의 피로를 풀어줌으로써 그들에게 내일 다시 살아갈 힘을 부여하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믿는 클라리사와 이제나저제나 죽음만을 생각하며 죽기 위해서 하루를 넘기는 셉티머스의 대비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극과 극으로 벌어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드러낸다고 하겠다. 많은 이들이 오늘에 이어 내일을 저 잘 살기 위해서 오늘을 마감하지만, 더이상의 삶이 부담스러워 오늘을 삶의 마지막 말로 선택하는 이도 있다는 걸 소설은 클라리사가 보낸 6월의 어느 하루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에게 망각은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배은망덕은 마음을 좀먹을 수도 잇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끝없이 쏟아지는 이 목소리는 무엇이든 몰고 갈 것이다. 이 맹세든, 이 화물차든, 이 삶이든, 이 행렬이든 아무튼 한데 감싸, 실어 갈 것이다. 마치 거친 빙하의 물결을 타고 얼음이 뼛조각, 푸른 이파리, 떡갈나무를 잡고 몰아가듯이 말이다."  (p.246)


현실과 과거를 넘나드는 바람에 독자들로 하여금 때로는 혼란에 빠지게 할 때도 있지만, 문장 곳곳에서 드러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사색은 한 권의 소설을 통한 한 권의 철학책 읽기를 끝낸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오늘은 한 주를 마감하는 금요일. 휴가를 떠난 사람들로 사무실은 한산하고 창밖에선 말매미의 울음소리가 주말 한낮의 시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자신의 삶이 힘들다고 자살을 꿈꾸는 건 오직 인간밖에 없다는 사실이 말매미의 울음에 섞여 씁쓸한 기분을 자아낸다. 삶의 연속성을 위해 너는 저렇게 간절히 울어본 적 있는가, 말매미가 내게 묻고 있는 듯하다. 주말 한낮의 그 뜨거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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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지인 부부와의 저녁 약속으로 인해 예정에도 없던 외식을 하였다. 생업에서 은퇴를 한 후 한동안 해외여행과 독서 등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유유자적 노년의 여유를 즐기던 지인은 지난 2022년 윤석열이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곧바로 이곳에서의 삶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에서 제2의 삶을 시작했던 것이다. 장성을 하여 혼인 후 분가를 한 아들 부부와 딸 부부를 남겨둔 채 두 부부만 떠난 이민 생활이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쓰고 나오는 추태를 보이는 등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사람을 윽박질러 죄를 캐묻는 것밖에 없는, 단순무식한 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실망하여 이 나라를 떠난다고 했던 지인은 지난 정권 내내 단 한 번도 우리나라를 찾지 않았었다. 새로운 나라에서 정착하느라 달리 시간이 없다는 게 그의 변명이었지만, 나와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외국에 있으니까 한식이 더 그립다는 말의 함의 속에서 나는 그가 얼마나 이곳을 그리워하는지 내심 짐작하곤 했었다. 빈 방이 많으니 휴가 기간 동안 갈 데가 마땅치 않으면 자신의 집에 놀러 오라는 말도 잊지 않던 그였다.


그렇게 전화로만 대화를 하던 그분이 며칠 전 지금 한국이라며 출국하기 전에 식사나 같이 하자며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나는 믿기지가 않아서 정말이냐는 말을 몇 번이나 하였고, 그때마다 그분은 직접 만나 보면 알 게 아니냐며 농담처럼 말을 이어갔다. 일정이 빠듯해서 조만간 시간이 나면 다시 전화를 하겠다던 그분은 어제 낮에 갑자기 전화를 해서 시간이 괜찮으면 오늘 저녁 함께 밥을 먹자는 게 아닌가. 더위 때문에 집에서 뒹굴뒹굴 에어컨 밑에서 소일하던 나는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워하던 한식을 원 없이 드시라고 약속 장소를 한정식집으로 정했던 나는 한국에 온 후 계속 한식만 먹었다는 그분의 말씀에 괜히 머쓱해진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나오는 음식마다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짠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곳에서는 사는 게 어떠시냐 여쭈었더니 한국에 비해 쇼핑이나 교통은 조금 불편하지만 적응이 되면 그럭저럭 살 만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러 이야기가 오갔고, 나는 결국 현실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귀국을 할 생각인지, 재산 상속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이미 한국을 떠날 결심이었으니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고, 재산은 사회에 기부할 생각임을 밝혔다. 식당을 나오기 전에 하셨던 그분의 말씀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어디 좋은 곳에 놀러 가더라도 하룻밤을 묵는 데 몇십, 몇백만 원씩 내는데 인간은 이 아름다운 지구에 칠십 년 혹은 팔십 년을 묵으면서 돈 한 푼 내지 않고 간다는 게 말이 되나. 내가 계산을 해보니까 팔십 년을 하루에 만 원씩 잡으면 3억 원이 조금 안 되더구먼. 자네도 팔십 년을 넘게 산다면 적어도 3억 원 이상은 사회에 기부하고 떠나는 게 예의야. 그러니까 미리미리 준비해 두라구."


며칠 후면 그분은 다시 한국을 떠난다. 내가 다시 그분을 몇 번이나 뵐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어쩐지 어제 들었던 그분의 말씀이 마치 유언처럼 들렸었다. 어디에서 살든 누구에게나 사는 건 결코 녹록지 않은 법. 나는 멀리서 그분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그나저나 3억 원은 또 어찌 마련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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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화서 - 2002-2015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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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더운 날씨에는 맛있는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 헤매는 것도 정말 못할 짓이다. 그러다 보니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평소에 자주 방문하는 식당만 주구장창 다니게 된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로 입맛까지 잃을 판인데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여러 날 같은 음식만 먹다 보니 물린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그리하여 어제는 단순히 점심을 먹기 위한 목적으로 차를 운전하여 외곽으로 나갔다. 메뉴는 순대국밥. 그리 특별한 메뉴도 아니지만 순대국밥을 하는 식당마다 맛은 천차만별이라 흔한 메뉴일수록 늘 찾게 되는 식당만 가는 게 국룰이라면 국룰.


어제도 그런 경우였다. 우리가 자주 가는 순대국밥집은 주 메뉴인 순대국밥과 함께 두툼한 계란말이를 각자에게 한 접시씩 내주는 게 일반적인데, 예전에는 계란말이가 손님이 원하는 만큼 리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식자재값이 오른 탓인지 1인 1 계란말이로 한정이 되어 조금은 아쉽다는 말이 도는 그런 식당이었다. 식당 아주머니는 이따금 찾는 우리를 기억하시는 듯 반갑게 맞아주셨다. 테이블마다 가득 찬 손님들로 식당 내부는 전처럼 북적였고, 손님의 요구에 일일이 응대하느라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힘드시죠?" 하고 물었더니 "아이고, 힘들긴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많을 긴데." 하시며 우리를 빈자리로 안내하셨다. 각자 주문을 하고 메뉴가 나오기 전에 각자 계란말이를 한 접시씩 받았는데 다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이를 본 주인아주머니는 손님 모두 리필을 해줄 수는 없고, 아까 전에 말을 예쁘게 해 줘서 고맙다며 나에게만 계란말이 한 접시를 더 내주시는 게 아닌가.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게 아니라 계란말이 한 접시를 공짜로 얻는 형국이었다.


"별것 아니었는데 밥 먹다 생각하니 은근히 기분 나쁜 말, 그런 말이 힘 있는 말이에요. 치명적 상처를 입은 사람은 '난 괜찮아......' 한대요. 그러고는 퍽 쓰러지지요. 아무것도 아닌 말이었는데, 나중에 '아!' 싶은 것이 좋은 말이에요."  (p.35)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 <무한화서>는 그야말로 우연히 읽게 된 책이지만 읽을수록 맛이 나는 책이다. 시도 잘 안 읽는 주제에 시론집이 가당키나 하느냐 타박할 이도 없지는 않겠으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성복 시인은 자신의 시론집을 씀에 있어서도 뭔가 달라도 크게 달랐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론집 <무한화서>는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후배 시인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지만, 우리말의 수요자인 대한민국의 전체 국민들을 위한 올바른 말 사용 비법서이기도 했다. 나처럼 말이 어눌하고 상황에 맞지 않게 툭툭 던지는 통에 실수도 잦은, 이를테면 언어 학습 부진아인 나에게는 이와 같은 실수를 극복하기 위한 언어 학습서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숨기는 거예요. 혹은 숨김으로써 말하는 거예요. 슬픔을 감추는 것이 슬픔이에요. 슬픔에게 복수하려면, 슬픔이 왔을 때 태연히 시치미를 떼야 해요. 그것이 시예요."  (p.95)


이 책 <무한화서>는 시론집이라기보다 국어 설명서이거나 올바른 국어 사용법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시에는 젬병인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시와 가까워지고 시를 더 잘 이해하는 법을 알려주는 시 안내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술술 읽히는 걸 보면 시를 통하여 시인이 체득한 삶의 지혜가 시론을 핑계로 가득 펼쳐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시라면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키던 내가 이렇게 홀딱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으니 말이다. 한 분야에 특화된 장인의 공통점은 결국 서로 다른 분야에서 얻은 삶의 지혜일지언정 궁극에 이르러 그 결과는 서로 비슷한 면모를 보이게 되고 그 분야의 후배나 일반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역시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다. 이성복 시인도 다르지 않았다.


"시와 인생과 진리는 같은 거예요. 모두 손댈 수 없는 것들이지요. 시와 인생과 진리는 불가항력이에요. 만약 그것들을 조작할 수 있다면 사이비似而非예요."  (p.151)


시를 모르는 이가 시론집을 읽는다는 게 꽤나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시보다는 정작 시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 더 나아가서 삶을 대하는 한 생활인의 태도를 배우는 듯하다. 시인은 시를 쓰는 자신의 업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성실한 생활인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삶을 잘 이끌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얼치기 생활인으로서 시인을 우러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느 성실한 생활인의 자태가 시처럼 고울 수 있다는 걸 나의 삶 속에서, 이성복 시인의 책 속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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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끝나고 견디기 힘든 폭염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폭염의 일수가 길어지면서 우리가 느끼고 바라보는 환경은, 그리고 우리가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비단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만물의 영장이라고 뻐기는 우리 인간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주변의 생물을 둘러볼 여유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더위 때문에 내가 어젯밤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 한낮의 열기 때문에 외출을 포기했던 것, 더위로 인해 떨어진 식욕을 어떻게 하면 반전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등 인간의 관심은 오직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국한될 뿐 이 더위에 도시를 떠도는 비둘기는 어찌 살까? 혹은 불과 몇 미터도 걷기 힘든 아스팔트 열기 속에서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이 여름을 어떻게 견딜까? 하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런 생각들은 불필요한 것들일 뿐입니다.


나는 새벽 등산로의 풍경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목격하게 됩니다. 요즘 등산로에서 흔히 보게 되는 것은 지렁이의 사체와 참나무의 잔가지입니다. 바람이 불었던 것도 아니요,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쏟아진 것도 아닌데 그와 같은 풍경은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피부를 통하여 호흡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지렁이는 살기 위해서는 때때로 땅속이 아닌 지면으로 나와야 하고 물기 하나 없는 등산로를 맨 몸뚱이로 힘겹게 기어가야 합니다. 오직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기어가던 지렁이는 제 몸의 수분마저 다 날려버린 후 등산로 한가운데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렇게 죽은 지렁이 사체가 등산로에 가득합니다. 지렁이 사체에는 파리떼가 까맣게 달려들고 등산객의 발길이 스칠 때마다 약속이나 한 듯 웅 하고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곤 합니다. 살기 위해서 죽음으로 향하는 이 아이러니한 지렁이의 여정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지렁이라면 나는 과연 죽음을 기다리면서 내가 있던 땅속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등산로를 가로질러 어딘가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나는 여전히 답을 하기 어렵습니다.


참나무도 이와 비슷합니다. 열매를 맺고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서는 땅속 수분과 영양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폭염이 지속됨에 따라 뿌리가 있는 땅 안쪽도 잎이 있는 줄기 부분도 수분의 양은 차츰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나무는 스스로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부실한 열매가 달린 잔가지를 자신의 몸통에서 떼어낼 것인가 아니면 힘들지만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전체 가지를 껴안고 버틸 것이가. 현명하게도 참나무는 자신의 부실한 잔가지를 선제적으로 떼어내어 미리 위험을 대비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하여 새벽 등산로에는 우듬지에서 떨어진 참나무 잔가지들이 수북합니다. 나는 그중 하나를 골라 잡아 내게 달려드는 모기를 쫓는 데 쓰곤 합니다.


폭염의 기세는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고 우리는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갑니다. 덥다고 툴툴댈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더위 속에서 땀을 흘리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지렁이의 여정처럼 가난한 누군가는 살기 위해서 죽음의 여정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지만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그들도 여전히 함께 존재한다는 걸 생각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 정도의 인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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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김새너머 2025-08-01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의 제 고민과 맛닿아있는 글을 보게 되서 반갑고 감사합니다.

꼼쥐 2025-08-02 13:14   좋아요 0 | URL
이렇게 댓글 남겨주셔서 제가 더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리타의 산책
안리타 지음 / 홀로씨의테이블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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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의자'라고 부르는 작은 바위가 있다. 내가 매일 아침 산책을 마치고 내려오는 산의 능선을 따라 낮게 솟은 작은 봉우리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다. 물론 그 이름은 내가 명명하여 나만 그렇게 부르는 까닭에 다른 이들은 어찌 부르는지 알지 못한다. 옛날 초등학교 교실의 나무의자를 닮은 그 바위는 한 사람이 겨우 앉을 정도로 그닥 넓은 편은 아닌데, 그곳에 앉으면 앞이 탁 트여서 내가 사는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바람길도 훤히 트여 운동 후 땀을 식히는 데는 그만이다. 나는 아침 출근 시간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그곳에 잠깐 앉아 땀을 식히거나 도시 전경을 감상하곤 한다.


오늘도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왕의 의자'에 앉았는데 근처 참나리 군락에서 꽃이 피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게 언제 꽃이 필까? 늘 궁금했는데 드디어 꽃이 만개한 것이다. 날씨가 더운 탓인지 산을 오르는 이는 많지 않았고 활짝 핀 참나리 꽃이 오가는 이를 반기는 듯했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2025년 7월의 마지막 한 주도 나는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을 듯했다.


"너무도 신비롭고 벅찬 감각에 순간, '이건 운명이야' 하는 확신이 나를 휘감았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나는 찬찬히 자연을 거닐며 같은 감각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 비밀스럽고도 강렬한 인상은 나를 이전의 삶에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아, 그날 이후, 나는 산책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p.41)


이번에 새로 발견한 작가 안리타의 산문집 <리타의 산책>은 200쪽 남짓의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읽는 데 꽤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곁가지로 따라오는 생각의 알갱이들이 포도송이처럼 부풀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이란 이렇듯 작가가 쓴 짧은 문장으로부터 독자의 깊고 넓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책을 일컫는 것이리라. 일차적으로는 작가가 쓴 문장의 기본 의미를 파악하는 게 먼저이겠지만, 작가가 그 문장을 쓰기 위해 서성거렸을 어느 거리, 어느 시간대의 빛나던 햇살과 그늘이 되어주던 숲, 그리고 작가를 환영하고 응원하던 들꽃들...


"그때부터였을까. 이렇듯 내가 늘 숨으로서 매달려 있는 생에 관심이 커진 계기가. 삶에 이토록 깊이 연결된 호흡이라니, 폐부 깊이에 닿는 뜨거운 느낌이 삶이라니, 한 사람을 살리고 한 사람을 죽이는 모든 힘이 거기에 있다니, 존재가 어디에도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이 아찔해서 나는 노을빛까지도 사무치게 들이쉰다."  (p.113)


한때 살아가면서 필요할 때면 언제든 무한대로 지원되던 이웃의 위로는 언제부턴가 '옛다, 위로' 하는 식의 천편일률적이면서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 그럼에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일정액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그마저도 제공되지 않는 값싼 문장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삶의 진정제가 되었다. 삶이 힘들수록 우리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싸구려 위로의 글에도 쉽게 감동하고, 이웃으로부터 소외되면 소외될수록 그 경박한 위로의 글조차 더욱 목말라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회용 밴드에 익숙해진 탓일까 아프니까 청춘이었던 우리는 중년이 되어서도 늘 아프고, 언젠가 읽었던 싸구려 위로의 글에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말이나 글에서 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나를 사랑하고 위로하는 나만의 목소리를.


"나는 내가 발견한 이 알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 삶은 때로 낯설고, 이해할 수 없이 복잡하지만, 그 속에서 문득 마주하는 순간들은 눈부시도록 찬란하다. 이따금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은, 그 고통의 순간에도, 생은 놀랄 만큼 신비하다. 계절처럼 마음은 변덕스럽고 때로 나약하지만, 우리는 그 순환 속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해진다. 이 양가감정 속에서 문득 마주하는 순간들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이상할 만큼 감동적이기도 하다."  (p.193)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멈춰 있는 물레방아를 돌리듯 순환의 처음은 언제나 힘겹고 무겁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모든 처음을 기꺼이 감당하는 이유는 내게 남은 처음이 시나브로 줄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허락된 봄이, 내게 허락된 한 달의 첫날이, 내게 허락된 한 주의 첫날이...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정체되거나 늘지 않는다는 건 명확한 사실. 나는 그렇게 7월 마지막 주의 첫날을 지우고 있다. 습관처럼 또 그렇게. 안리타의 에세이 <리타의 산책>을 마저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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