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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화서 - 2002-2015 ㅣ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평점 :
요즘처럼 더운 날씨에는 맛있는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 헤매는 것도 정말 못할 짓이다. 그러다 보니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평소에 자주 방문하는 식당만 주구장창 다니게 된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로 입맛까지 잃을 판인데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여러 날 같은 음식만 먹다 보니 물린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그리하여 어제는 단순히 점심을 먹기 위한 목적으로 차를 운전하여 외곽으로 나갔다. 메뉴는 순대국밥. 그리 특별한 메뉴도 아니지만 순대국밥을 하는 식당마다 맛은 천차만별이라 흔한 메뉴일수록 늘 찾게 되는 식당만 가는 게 국룰이라면 국룰.
어제도 그런 경우였다. 우리가 자주 가는 순대국밥집은 주 메뉴인 순대국밥과 함께 두툼한 계란말이를 각자에게 한 접시씩 내주는 게 일반적인데, 예전에는 계란말이가 손님이 원하는 만큼 리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식자재값이 오른 탓인지 1인 1 계란말이로 한정이 되어 조금은 아쉽다는 말이 도는 그런 식당이었다. 식당 아주머니는 이따금 찾는 우리를 기억하시는 듯 반갑게 맞아주셨다. 테이블마다 가득 찬 손님들로 식당 내부는 전처럼 북적였고, 손님의 요구에 일일이 응대하느라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힘드시죠?" 하고 물었더니 "아이고, 힘들긴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많을 긴데." 하시며 우리를 빈자리로 안내하셨다. 각자 주문을 하고 메뉴가 나오기 전에 각자 계란말이를 한 접시씩 받았는데 다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이를 본 주인아주머니는 손님 모두 리필을 해줄 수는 없고, 아까 전에 말을 예쁘게 해 줘서 고맙다며 나에게만 계란말이 한 접시를 더 내주시는 게 아닌가.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게 아니라 계란말이 한 접시를 공짜로 얻는 형국이었다.
"별것 아니었는데 밥 먹다 생각하니 은근히 기분 나쁜 말, 그런 말이 힘 있는 말이에요. 치명적 상처를 입은 사람은 '난 괜찮아......' 한대요. 그러고는 퍽 쓰러지지요. 아무것도 아닌 말이었는데, 나중에 '아!' 싶은 것이 좋은 말이에요." (p.35)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 <무한화서>는 그야말로 우연히 읽게 된 책이지만 읽을수록 맛이 나는 책이다. 시도 잘 안 읽는 주제에 시론집이 가당키나 하느냐 타박할 이도 없지는 않겠으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성복 시인은 자신의 시론집을 씀에 있어서도 뭔가 달라도 크게 달랐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론집 <무한화서>는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후배 시인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지만, 우리말의 수요자인 대한민국의 전체 국민들을 위한 올바른 말 사용 비법서이기도 했다. 나처럼 말이 어눌하고 상황에 맞지 않게 툭툭 던지는 통에 실수도 잦은, 이를테면 언어 학습 부진아인 나에게는 이와 같은 실수를 극복하기 위한 언어 학습서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숨기는 거예요. 혹은 숨김으로써 말하는 거예요. 슬픔을 감추는 것이 슬픔이에요. 슬픔에게 복수하려면, 슬픔이 왔을 때 태연히 시치미를 떼야 해요. 그것이 시예요." (p.95)
이 책 <무한화서>는 시론집이라기보다 국어 설명서이거나 올바른 국어 사용법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시에는 젬병인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시와 가까워지고 시를 더 잘 이해하는 법을 알려주는 시 안내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술술 읽히는 걸 보면 시를 통하여 시인이 체득한 삶의 지혜가 시론을 핑계로 가득 펼쳐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시라면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키던 내가 이렇게 홀딱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으니 말이다. 한 분야에 특화된 장인의 공통점은 결국 서로 다른 분야에서 얻은 삶의 지혜일지언정 궁극에 이르러 그 결과는 서로 비슷한 면모를 보이게 되고 그 분야의 후배나 일반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역시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다. 이성복 시인도 다르지 않았다.
"시와 인생과 진리는 같은 거예요. 모두 손댈 수 없는 것들이지요. 시와 인생과 진리는 불가항력이에요. 만약 그것들을 조작할 수 있다면 사이비似而非예요." (p.151)
시를 모르는 이가 시론집을 읽는다는 게 꽤나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시보다는 정작 시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 더 나아가서 삶을 대하는 한 생활인의 태도를 배우는 듯하다. 시인은 시를 쓰는 자신의 업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성실한 생활인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삶을 잘 이끌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얼치기 생활인으로서 시인을 우러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느 성실한 생활인의 자태가 시처럼 고울 수 있다는 걸 나의 삶 속에서, 이성복 시인의 책 속에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