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지인 부부와의 저녁 약속으로 인해 예정에도 없던 외식을 하였다. 생업에서 은퇴를 한 후 한동안 해외여행과 독서 등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유유자적 노년의 여유를 즐기던 지인은 지난 2022년 윤석열이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곧바로 이곳에서의 삶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에서 제2의 삶을 시작했던 것이다. 장성을 하여 혼인 후 분가를 한 아들 부부와 딸 부부를 남겨둔 채 두 부부만 떠난 이민 생활이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쓰고 나오는 추태를 보이는 등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사람을 윽박질러 죄를 캐묻는 것밖에 없는, 단순무식한 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실망하여 이 나라를 떠난다고 했던 지인은 지난 정권 내내 단 한 번도 우리나라를 찾지 않았었다. 새로운 나라에서 정착하느라 달리 시간이 없다는 게 그의 변명이었지만, 나와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외국에 있으니까 한식이 더 그립다는 말의 함의 속에서 나는 그가 얼마나 이곳을 그리워하는지 내심 짐작하곤 했었다. 빈 방이 많으니 휴가 기간 동안 갈 데가 마땅치 않으면 자신의 집에 놀러 오라는 말도 잊지 않던 그였다.
그렇게 전화로만 대화를 하던 그분이 며칠 전 지금 한국이라며 출국하기 전에 식사나 같이 하자며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나는 믿기지가 않아서 정말이냐는 말을 몇 번이나 하였고, 그때마다 그분은 직접 만나 보면 알 게 아니냐며 농담처럼 말을 이어갔다. 일정이 빠듯해서 조만간 시간이 나면 다시 전화를 하겠다던 그분은 어제 낮에 갑자기 전화를 해서 시간이 괜찮으면 오늘 저녁 함께 밥을 먹자는 게 아닌가. 더위 때문에 집에서 뒹굴뒹굴 에어컨 밑에서 소일하던 나는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워하던 한식을 원 없이 드시라고 약속 장소를 한정식집으로 정했던 나는 한국에 온 후 계속 한식만 먹었다는 그분의 말씀에 괜히 머쓱해진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나오는 음식마다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짠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곳에서는 사는 게 어떠시냐 여쭈었더니 한국에 비해 쇼핑이나 교통은 조금 불편하지만 적응이 되면 그럭저럭 살 만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러 이야기가 오갔고, 나는 결국 현실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귀국을 할 생각인지, 재산 상속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이미 한국을 떠날 결심이었으니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고, 재산은 사회에 기부할 생각임을 밝혔다. 식당을 나오기 전에 하셨던 그분의 말씀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어디 좋은 곳에 놀러 가더라도 하룻밤을 묵는 데 몇십, 몇백만 원씩 내는데 인간은 이 아름다운 지구에 칠십 년 혹은 팔십 년을 묵으면서 돈 한 푼 내지 않고 간다는 게 말이 되나. 내가 계산을 해보니까 팔십 년을 하루에 만 원씩 잡으면 3억 원이 조금 안 되더구먼. 자네도 팔십 년을 넘게 산다면 적어도 3억 원 이상은 사회에 기부하고 떠나는 게 예의야. 그러니까 미리미리 준비해 두라구."
며칠 후면 그분은 다시 한국을 떠난다. 내가 다시 그분을 몇 번이나 뵐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어쩐지 어제 들었던 그분의 말씀이 마치 유언처럼 들렸었다. 어디에서 살든 누구에게나 사는 건 결코 녹록지 않은 법. 나는 멀리서 그분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그나저나 3억 원은 또 어찌 마련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