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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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이렇게 다채로운 삶의 풍경을 그려낼 수 있는 건 어쩌면 그가 무라카미 하루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일정 부분 본인이나 가족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 흘러들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초기 작품이 아닌 이상 전적으로 자신의 경험에 의지하여 소설을 꾸려나가지는 않을 터, 세계적인 명성과 더불어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매년 단골처럼 이름을 올리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와 같은 위험성을 모르는 채 자신의 지난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들을 한 권의 소설집으로 엮어 출간하지는 않았으리라. '일부러'라고 밖에는 달리 그의 의도를 설명할 수 없는(그래서 더욱 놀랍기도 하지만) <일인칭 단수>는 애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의 경험담을 소설로 개작한, 익숙한 듯하면서도 새로운 하루키 월드로의 여행 안내서 역할을 한다.

 

책에는 표제작인 '일인칭 단수'를 포함하여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대학교 2학년 시절 같은 일터에서 같은 시기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이십대 중반쯤의 여인과 어느 날 우연히 단발성의 밀애를 즐겼던 기억을 되살려 그녀가 보내준 가집에 실린 몇 편의 단카 역시 마음 깊이 남아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돌베개에', 재수생 시절 열여섯 살까지 같은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한 학년 아래의 여자애로부터 연주회 초대장을 받았던 '나'는 못내 미심쩍어하면서도 초대장에 적힌 콘서트홀을 어렵게 찾아갔지만 그곳은 아무도 없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되돌아오다가 우연히 들른 마을의 작은 공원과 그곳의 정자 벤치에서 한 노인을 만났던 고베의 어느 흐린 일요일 오후를 그린 '크림',  열혈 재즈 팬이었던 '나'는 알토색소폰의 대부인 찰리 파커가 요절하지 않고 음악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만으로 대학 시절 있지도 않은 음반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에 대한 가상의 비평을 쓴 글이 대학교 문예지에 실린 적이 있었고, 몇십 년 후 그 음반을 실제로 마주했던 경험의 이야기가 실린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전 세계가 비틀스 열풍에 휩싸였던 시절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위드 더 비틀스>라는 음반의 LP판을 가슴에 안고 복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던 아름다운 소녀에 대한 기억과 그 시절의 풍경을 담은 '위드 더 비틀스'.

 

"그래도 만약 행운이 따라준다면 말이지만, 때로는 약간의 말語이 우리 곁에 남는다. 그것들은 밤이 이슥할 때 언덕 위로 올라가서, 몸에 꼭 들어맞게 판 작은 구덩이에 숨어들어, 기척을 죽이고, 세차게 휘몰아치는 시간의 바람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동이 트고 거센 바람이 잦아들면, 살아남은 말들은 땅 위로 남몰래 얼굴을 내민다." (p.24 '돌베개에' 중에서)

 

야구를 좋아하고 야구장을 찾아 경기를 직관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산케이 아톰스이던 시절부터 경기장을 찾았고 외야석에 앉아 경기를 관전하면서 심심풀이로 썼던 시를 모아 자비출판의 형태로 시집을 낸 경험을 토대로 쓴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수많은 피아노 클래식곡 중에서도 슈만의 <사육제>를 특히 좋아한다는 공통의 관심사로 인해 자주 교제를 하고 왕래했던 한 여인에 얽힌 묘한 경험을 소설로 쓴 '사육제', 여행 중 쇠락한 온천 마을 료칸에서 인간의 말을 할 줄 알 뿐만 아니라 나름의 교양도 지녔던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를 쓴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평소 슈트를 입을 기회가 거의 없는 '나'는 일상에서 벗어난 신선한 감각을 즐기기 위해 이따금 슈트를 입고 '나'만의 비밀스러운 의식을 치르곤 하였는데, 어느 날 슈트를 입고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중 처음 보는 여자로부터 삼 년 전 내가 저질렀다는 '고약한 짓'에 대하여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되는데 차마 확인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불쾌한 감정만 안고 돌아왔다는 내용의 '일인칭 단수'가 그것이다.

 

"계단을 다 올라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계절은 더이상 봄이 아니었다. 하늘의 달도 사라졌다. 그곳은 더이상 내가 알던 원래의 거리가 아니었다. 가로수도 낯설었다. 그리고 가로수 가지마다 미끈미끈하고 굵은 뱀들이 살아 있는 장식처럼 단단히 몸을 휘감은 채 꿈틀대고 있었다. 스륵스륵 비늘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p.232 '일인칭 단수' 중에서)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그가 겪은 경험과 기억의 총체로 규정한다면 하루키 내부에 있는 다채로움 역시 하루키 본인의 정체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루키 자신이 풀어놓은 색색깔의 경험들은 어찌나 선명하고 개성이 독특한지 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독자라면 이것이 모두 한 사람의 경험에서 비롯된 글이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할 듯하다. 생각해 보면 같은 지역에서 비슷한 일상을 보낸 사람들마저 그들이 겪고 느낀 바는 저마다 다를 텐데 시간의 갈피에 새겨진 한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다채로울 것인가. 다만 우리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린 저 아래쪽의 풍경을 눈에 그리듯 자세히 떠올리지 못할 뿐이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 아름다웠던 풍경을 다만 잊고 지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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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진자가 드디어 천 명을 넘어섰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마치 이런 상황을 무척이나 기다려왔던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국가의 위기 상황에 국민 중 1인으로서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솔직한 기분이라면 나날이 악화되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걱정이 70%, 나머지 30%는 이런 상황을 야기한,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괜한 분노라고 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외출도 삼간 채 조심조심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국민들과는 달리 술집이며, 음식점이며, 영화관이며, 심지어 호텔 파티룸에 이르기까지 조심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분별없는 젊은이들에 와락 화가 치솟는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작금의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교회로 교회로 신도들을 불러들이는 정신 나간 종교인들도 있고, 코로나의 무서움이라곤 전혀 모르고 지냈던 일자무식의 무지렁이 촌부도 더러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젊은 청춘들의 일탈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을 보면서 감탄하거나 어떤 경외심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의 생명력, 목숨을 바쳐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겠다는 일념,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코로나라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젊은이들은 짝짓기를 하기 위해 술집으로, 교회로, 호텔로 떠도는 게 연어들의 진한 생명력과 비교하여 무엇이 다를 수 있을까. 물론 생각이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연어들의 행태를 단순 비교한다는 게 불만인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처럼
그 언제서부터인가 걸어 걸어 걸어오는 이 길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가야만 하는지
여러 갈래 길 중 만약에 이 길이 
내가 걸어가고 있는
돌아서 갈 수밖에 없는 꼬부라진 길 일지라도
딱딱해지는 발바닥 걸어 걸어 걸어 가다 보면
저 넓은 꽃밭에 누워서 나 쉴 수 있겠지  (강산에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아침에 내린 눈으로 아파트 주차장에는 흰 눈을 뒤집어쓴 차들이 빼곡하다. 이렇게 쌓인 눈을 올겨울 들어 처음이지 싶다. 말하자면 첫눈인 셈인데 예년과 다르게 마음은 그저 착잡할 뿐이다. 코로나 확진자는 확산 일로에 있고, 일 년 가까이 자신의 생명력을 억누르며 살았던 대부분의 젊은 청춘들 중 일부 젊은이들의 일탈을 마냥 비난할 수도 없고... 첫눈에 대한 감상 치고는 이래저래 심란한 기분이다.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있는 국가의 역할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시국을 어떻게든 빨리 종결지어야겠다는 국민들의 일치된 마음과 행동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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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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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혼자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코로나 확산으로 가뜩이나 손님이 없는 식당은 점심시간도 지난 까닭에 휑뎅그렁했다. '코로나에 감염될 염려는 없겠네.'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혼자 늦은 점심을 먹는다는 건 여전히 힘들고 어색했다. 음식 주문을 하면서도 뭔가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던 건 나만의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끝으로 갈수록 나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고 입 안으로 말려들어갔다. '이럴 거면 차라리 점심을 굶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점심을 먹으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은 캐럴라인 냅의 산문집 <명랑한 은둔자>에 대한 리뷰를 써야겠다는 것이었다. 정신분석가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던 작가는 브라운 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20년 가까이 저널리스트로 살았다고 한다. 남 부럽지 않은 화려한 삶을 살았을 것 같은 작가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알코올 중독과 다이어트 강박증, 섭식장애 등 불행의 연속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삶은 힘겨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2002년 마흔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면서 삶의 밝은 쪽으로 나아가려 애썼다. 냅의 자전적 에세이집인 이 책은 그녀가 죽은 후에 출간된, 말하자면 유고집인 셈이다. 늦은 점심을 먹는 내게 아릿한 슬픔을 안겨주었던 책, 그럼에도 삶의 아름다움을 끝끝내 증명하고 싶어 했던 캐럴라인 냅의 분투의 기록들이 오롯이 담긴 책, <명랑한 은둔자>라는 책의 제목이 추락하는 석양처럼 가슴 한 켠을 무겁게 짓눌렀던...

 

"마취제 없는 삶은 격렬한 운동과도 좀 비슷하다. 각자 선택했던 중독의 대상이 없는 채로 고통스러운 순간을 반복하여 겪다 보면, 결국에는 감정의 근육이 길러진다. 우리가 술을 마셔서-혹은 굶어서, 먹어서, 도박을 해서, 살을 찌워서-감정을 몰아낼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이해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셈이다. 자신의 두려움과 자기 의심과 분노를 이해해볼 기회를, 마음속에 묻혀 있는 감정의 지뢰들과 제대로 한 번 싸워볼 기회를. 중독은 우리를 보호해줄지 몰라도 성장을 저지한다. 사람을 한층 더 성숙시키는 인생의 여러 두려운 경험들을 우리가 온전히 겪지 못하도록 막는다." (P.224)

 

'사랑하는 아빠, 아빠가 돌아가신 날 밤 저는 술에 취했습니다.'로 시작되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먹먹한 느낌을 전해주지만 어쩌면 이것은 작가가 누구보다 가족과 친구와 개에 대한 사랑이 넘쳤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공허와 불안과 사투를 벌였던 사람임을 말해주는 슬픈 문장일지도 모른다. 정신분석가인 아버지의 딸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이 얼마나 꼴불견이냐며 자책하는 모습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자 독자를 대신한 작가의 솔직한 자기 고백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보통 사람이 되는 수업을 듣고 싶다. 이런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나는 평범한 노동자,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시민, 바글거리는 군중 속의 이름 없고 얼굴 없는 한 구성원이고 싶다. 당신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당신도 혹시 그러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것이 얼마나 손에 넣기 어려운 목표인지 알 것이다." (p.285)

 

나는 상실, 결핍이라는 단어가 고립과 고독의 한 원인이 될 수는 있지만 필연적인 인과관계에 놓여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를 둘러싼 내, 외부적인 환경과 유전적 특질 - 말하자면 개인의 성격, 체력, 인생관, 가족이나 친척의 사회적 위치, 기대심리 등-로 인해 같은 물리적 환경 하에서도 천차만별의 결과가 도출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보통의 환경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파악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말했듯이 평생을 '보통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캐럴라인 냅의 글이 독자들의 공감을 사는 이유는 명백한 듯 보인다. 자신이 실수와 결함 투성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파악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남들이 기대하는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는 점일 것이다. 자신의 결함을 숨기기에 급급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결핍이나 결함을 숨기면서 스스로 우울의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냐, 아니면 세상의 모든 비난이나 조롱을 감수할지라도 나를 드러내고 그들과 어울려 '명랑' 속으로 진입할 것이냐' 묻고 있는 것이다. 늦은 점심을 혼자 먹는다는 것에 대해 타인의 시선을 무척이나 의식했던 나의 위선이 말할 수 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던 어제, 그리고 늦은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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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공수처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로써 공수처법이 국회를 통과하고도 정작 공수처 구성에 있어서는 국민의힘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혀 지지부진하기만 했던 공수처의 출범이 비로소 가시권에 들어온 셈이다. 물론 아직도 공수처장의 선출과 국회 청문회 등 남은 일정은 첩첩산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공수처의 설립이 기정사실로 굳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검찰을 견제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드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의 행태를,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이 폭로한 '검사 술 접대 의혹'에 연루된 현직 검사 3명 중 1명만 재판에 넘겨지고 나머지 2명은 각각 100만 원에서 4만 원이 모자라는 96만 원의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는 코미디와 같은 행태를 더는 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물론 180석에 가까운 거대 여당을 만들어준 국민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당의 의석수가 야당과 엇비슷하거나 몇 석 많은 수준에서 머물렀다면 몇십 년째 대다수 국민의 염원이었던 공수처는 앞으로도 영원히 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선거 때마다 여, 야를 가리지 않고 공수처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실천 단계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외면하기에 급급했던 야당 국회의원들의 뻔뻔한 행태를, 필요에 따라 기소, 불기소를 제멋대로 결정하던 검찰의 막가파식 행태를 우리는 이제 더는 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와 같은 복장 터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법이 그러니까' 하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국민 대다수가 '화병' 전조 증상을 안고 살았던 지난 세월을 웃으며 회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검찰을 앞세워 독재정권에 기생하면서 온갖 특권을 향유하던 수구 보수 세력의 종말은 아닐지라도, 더는 그들에게 불법적인 특권의식과 법을 이용한 교묘한 부정축재의 기회는 제공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공수처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와 더불어 검찰개혁에 반대하고, 비위로 점철된 검찰 조직의 우두머리 윤석열에 대한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있다.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언론을 이용하여 국민 여론을 호도하고 검찰개혁이 마치 국가 대세를 그르치는 반헌법적 행위인 양 연일 떠벌렸던 검찰과 보수 언론의 행태도 오늘을 기점으로 더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물론 나의 바람에 그치겠지만 말이다. 독재권력에 기생하던 모든 세력들, 언론들, 기업인들, 그리고 소수의 종교인들은 악을 쓰고 덤벼들 것은 명약관화한 일, 그러나 역사는 그 모든 저항을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오늘은 올해 수능을 치룬 수험생이 있는 이웃에게 떡이라도 돌려야겠다. 겸사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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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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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쩌면 이미 다 완성된 각자의 인생을 시간의 받침대 위의 양쪽 자리에 앉아 자신의 다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이를테면 탄생 쪽에 가까운 나는 동경의 시선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나를 바라보며, 죽음 쪽에 가까운 나는 그리움을 가득 담아 탄생 쪽의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그렇게 우리는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자신의 인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게 아닌가 하는...

 

김금희 작가의 소설 <복자에게>를 읽었던 게 벌써 열흘쯤 지났다. 누가 지시하거나 다그치는 건 아니지만 한 편의 소설을 읽고 가슴에 남는 몇 문장의 글이라도 있다면 짧게라도 리뷰를 남기겠다는 게 독서인으로서의 나의 다짐이고 보면, 나는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이마저도 무시한 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소설의 화자인 이영초롱과 그녀의 친구인 복자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책을 읽는 독자들 가슴에 뭉클한 감동(까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을 안겨주는 소설이니까 말이다.

 

1999년 초봄, 이영초롱의 가족은 기울어진 가세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영초롱의 동생인 영웅은 서울에 있는 큰아버지 댁에 보내졌고, 열세 살의 세상 누구보다 야무진 영초롱은 남동생 대신 제주 본섬에서도 한 번 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고고리 섬'의 고모에게 맡겨진다. 전학 수속을 밟지 않고 며칠을 무료하게 보내던 영초롱이 어느 날 섬에 하나뿐인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 위해 나왔다가 또래인 '복자'를 만나게 된다. 당찬 성격의 복자는 누구나 섬에 왔으면 할망신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며 이영초롱을 다짜고짜 할망당으로 이끌었다. 엉겁결에 할망신을 마주한 영초롱은 자신의 집이 망했음을 고백한다. 복자 역시 부모가 이혼한 후 할머니에게 맡겨진 신세였다. 그렇게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며 두 사람은 단짝이 된다.

 

"영웅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웃으면 정말 멍청한 사자 같은 게 될까 봐"라고 했다. 어쩌면 그 말을 들었던 그 순간에 나는 슬픔에 대해 온전히 알게 되지 않았을까. 마음이 차가워지면서, 묵직한 추가 달린 듯 몸이 어딘가로 기우는 느낌이었다. 어느 쪽으로? 여태껏 가늠하지 못한, 그럴 필요가 없던 세상 편으로." (p.15)

 

그러나 영초롱과 복자와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섬의 유일한 매점을 운영하던 이선 고모(복자는 그녀가 자신의 엄마 친구라는 이유로 이선 이모라고 불렀다)의 집에 임공이 자주 드나든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아 달라는 복자의 부탁을 어기고 영초롱은 어른들에게 사실대로 말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복자는 영초롱의 고모가 교도소에 있는 이규정에게 보내는 편지를 자주 훔쳐봤다는 사실을 말해버림으로써 둘 사이는 데면데면한 사이로 변하고 만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섬에서 나왔던 영초롱은 곧 서울로 떠난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과정에는 상대에 대한 은근한 우월뿐 아니라 일종의 선망이 진득하게 감겨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어린 내가 체득한 인간관계의 조건이었다는 점을 곱씹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유감이 생겨나곤 한다. 내가 주머니에 넣어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상대에게 주려 했던 감정적 보상이 그뿐이었다는 점에 말이다." (p.83)

 

대학을 졸업한 영초롱은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된다. 그러나 성격이 직설적인 영초롱은 재판 과정에서 욕을 했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좌천된다. 제주에 부임한 영초롱은 '고고리 섬'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 '고오세'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영초롱을 좋아하여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서울까지 왔었던 '고오세'는 끝내 그녀를 만나지 못함으로써 가까워질 기회를 갖지 못했던 불운한(?) 과거를 지니고 있었지만 '영광의료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아이를 유산한 후 남편과 이혼하고 '고고리 섬'에 정착한 복자의 근황을 전해줌으로써 영초롱과 한 발 가까워진다.

 

"어떤 그리움이 생겨나는 순간에 불려 들어오던 풍경은 언제나 복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부끄러움이 생겨날 때 불려 들어오던 풍경도 역시 복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지금 이 방, 싸워야 할 사람들이 있고 이겨내야 하는 슬픔이 있고, 그러기 위해 모으는 자료들로 가득 찬 이 방과 복자의 새우잠을 기억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p.139)

 

열악한 근무환경을 견디며 근무하다 유산으로 아이를 잃은 복자는 같은 피해를 입은 간호사들과 힘을 합쳐 산업재해 인정을 받아내고자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힘겨운 소송을 이어간다.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내놓지 않는 의료원을 비롯하여 복자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소송 과정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는 영초롱. 소설은 그렇게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데...

 

작가는 그렇게 우리가 점점 잃어가고 있는 마음의 풍경을 우리들 앞에 우격다짐으로 펼쳐놓는다. 당신들이 그 풍경을 마음속에서 다시 회복하지 않아도 좋으니 단 한 번만이라도 그 흐뭇한 풍경을 그저 바라만 보라고 종용한다. 우리는 시간이 완성한 아스라한 풍경을 그리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가뭇없는 시간들이 조용히 스러져간다. 우리는 종종 잊을 수 없는 이름 뒤에 그리움의 순번을 매겨두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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