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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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쩌면 이미 다 완성된 각자의 인생을 시간의 받침대 위의 양쪽 자리에 앉아 자신의 다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이를테면 탄생 쪽에 가까운 나는 동경의 시선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나를 바라보며, 죽음 쪽에 가까운 나는 그리움을 가득 담아 탄생 쪽의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그렇게 우리는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자신의 인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게 아닌가 하는...

 

김금희 작가의 소설 <복자에게>를 읽었던 게 벌써 열흘쯤 지났다. 누가 지시하거나 다그치는 건 아니지만 한 편의 소설을 읽고 가슴에 남는 몇 문장의 글이라도 있다면 짧게라도 리뷰를 남기겠다는 게 독서인으로서의 나의 다짐이고 보면, 나는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이마저도 무시한 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소설의 화자인 이영초롱과 그녀의 친구인 복자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책을 읽는 독자들 가슴에 뭉클한 감동(까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을 안겨주는 소설이니까 말이다.

 

1999년 초봄, 이영초롱의 가족은 기울어진 가세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영초롱의 동생인 영웅은 서울에 있는 큰아버지 댁에 보내졌고, 열세 살의 세상 누구보다 야무진 영초롱은 남동생 대신 제주 본섬에서도 한 번 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고고리 섬'의 고모에게 맡겨진다. 전학 수속을 밟지 않고 며칠을 무료하게 보내던 영초롱이 어느 날 섬에 하나뿐인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 위해 나왔다가 또래인 '복자'를 만나게 된다. 당찬 성격의 복자는 누구나 섬에 왔으면 할망신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며 이영초롱을 다짜고짜 할망당으로 이끌었다. 엉겁결에 할망신을 마주한 영초롱은 자신의 집이 망했음을 고백한다. 복자 역시 부모가 이혼한 후 할머니에게 맡겨진 신세였다. 그렇게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며 두 사람은 단짝이 된다.

 

"영웅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웃으면 정말 멍청한 사자 같은 게 될까 봐"라고 했다. 어쩌면 그 말을 들었던 그 순간에 나는 슬픔에 대해 온전히 알게 되지 않았을까. 마음이 차가워지면서, 묵직한 추가 달린 듯 몸이 어딘가로 기우는 느낌이었다. 어느 쪽으로? 여태껏 가늠하지 못한, 그럴 필요가 없던 세상 편으로." (p.15)

 

그러나 영초롱과 복자와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섬의 유일한 매점을 운영하던 이선 고모(복자는 그녀가 자신의 엄마 친구라는 이유로 이선 이모라고 불렀다)의 집에 임공이 자주 드나든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아 달라는 복자의 부탁을 어기고 영초롱은 어른들에게 사실대로 말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복자는 영초롱의 고모가 교도소에 있는 이규정에게 보내는 편지를 자주 훔쳐봤다는 사실을 말해버림으로써 둘 사이는 데면데면한 사이로 변하고 만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섬에서 나왔던 영초롱은 곧 서울로 떠난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과정에는 상대에 대한 은근한 우월뿐 아니라 일종의 선망이 진득하게 감겨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어린 내가 체득한 인간관계의 조건이었다는 점을 곱씹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유감이 생겨나곤 한다. 내가 주머니에 넣어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상대에게 주려 했던 감정적 보상이 그뿐이었다는 점에 말이다." (p.83)

 

대학을 졸업한 영초롱은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된다. 그러나 성격이 직설적인 영초롱은 재판 과정에서 욕을 했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좌천된다. 제주에 부임한 영초롱은 '고고리 섬'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 '고오세'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영초롱을 좋아하여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서울까지 왔었던 '고오세'는 끝내 그녀를 만나지 못함으로써 가까워질 기회를 갖지 못했던 불운한(?) 과거를 지니고 있었지만 '영광의료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아이를 유산한 후 남편과 이혼하고 '고고리 섬'에 정착한 복자의 근황을 전해줌으로써 영초롱과 한 발 가까워진다.

 

"어떤 그리움이 생겨나는 순간에 불려 들어오던 풍경은 언제나 복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부끄러움이 생겨날 때 불려 들어오던 풍경도 역시 복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지금 이 방, 싸워야 할 사람들이 있고 이겨내야 하는 슬픔이 있고, 그러기 위해 모으는 자료들로 가득 찬 이 방과 복자의 새우잠을 기억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p.139)

 

열악한 근무환경을 견디며 근무하다 유산으로 아이를 잃은 복자는 같은 피해를 입은 간호사들과 힘을 합쳐 산업재해 인정을 받아내고자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힘겨운 소송을 이어간다.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내놓지 않는 의료원을 비롯하여 복자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소송 과정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는 영초롱. 소설은 그렇게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데...

 

작가는 그렇게 우리가 점점 잃어가고 있는 마음의 풍경을 우리들 앞에 우격다짐으로 펼쳐놓는다. 당신들이 그 풍경을 마음속에서 다시 회복하지 않아도 좋으니 단 한 번만이라도 그 흐뭇한 풍경을 그저 바라만 보라고 종용한다. 우리는 시간이 완성한 아스라한 풍경을 그리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가뭇없는 시간들이 조용히 스러져간다. 우리는 종종 잊을 수 없는 이름 뒤에 그리움의 순번을 매겨두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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