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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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추억을 한 권의 책으로 읽는다는 건 푸근한 안개 속에서 온종일 헤매는 일이다. 길은 있으되 보이지 않으며, 시간은 안개 속에 뒤엉켜 뒤죽박죽 흩어지지만, 왔던 길을 고샅고샅 되짚어 볼 필요도, 또는 시간의 순서에 맞춰 읽었던 추억들을 가지런히 나열할 필요도 없이 나는 그저 께느른한 오후를 적당히 즐기며 안개처럼 몽롱해질 뿐이다. 그렇게 한나절 즐기기에는 스가 아쓰코의 산문집 <밀라노, 안개의 풍경>이 제격이다. 1929년생인 작가가 해외여행조차 원활하지 않았던 1960년대 패전국 일본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올라 십삼 년간 이탈리아 밀라노에 거주했던 경험을 담담히 풀어낸 이 책은 이방인의 눈에 비친 오래전 이탈리아의 풍경을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놓는다.


"저녁 무렵 창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안개가 자욱이 깔리곤 한다. 창에서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플라타너스의 가지 끝이 눈 깜짝할 사이 자취를 감추고, 끝내 굵은 줄기까지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가로등 밑을 생물처럼 달려가는 안개를 본 적도 있다. 그런 날에는 몇 번이고 창으로 달려가 짙은 안개 너머를 내다본다."  (p.10)


예순이 넘은 나이에 첫 작품을 발표하고 팔 년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단 다섯 권의 에세이를 출간했다는 스가 아쓰코의 첫 에세이인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그녀가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십삼 년간의 시간 동안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을 동양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문학도로서 보고, 만나고, 겪었던 모든 것들이 단아한 문체에 실려 독자들의 가슴에 안개처럼 스민다.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모인 코르시아 서점의 일원으로 청춘의 한 자락을 보내며, 낯선 땅에서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과 교류했던 스가 아쓰코. 교회 당국의 탄압과 내부 분열로 코르시아 서점이 문을 닫고, 서점 동료이자 남편이었던 페피노와의 결혼생활도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으로 오 년 만에 막을 내렸지만, 십삼 년간의 밀라노 생활은 귀국 후의 작가에게 풍성한 문학적 자양분을 제공한 듯하다.


"무스타키 대신 레너드 코언을 건네주던 가티, 남편을 잃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던 나에게 수면제를 먹을 게 아니라 상실의 시간을 인간답고 성실하게 슬퍼하며 살아야 한다고 엄하게 꾸짖던 가티는 이제 거기 없었다. 그의 한없는 밝음에, 더는 나를 짜증나게 하지 않는 가티의 모습에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p.111)


절제되고 과하지 않은 감정으로 자신의 청춘 시절을 밀도 있게 그려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글로 쓰이지 않았던 긴 시간의 침묵이 작가의 내부에서 이미 완성된 어떤 것으로 서서히 재현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침묵으로 완성한 옛 기억의 엘레지. 전통과 구습에 얽매인 고국에서의 생활에 갑갑함을 느끼고 1960년대의 이른 시절에 유학과 국제결혼이라는 파격적인 선택을 감행했던 작가의 이야기는 21세기를 사는 작금의 젊은이들에게도 공감과 동경의 마음을 품게 한다.


"그러나 환상의 시간은 언젠가 어쩔 수 없이 현실로 회귀한다. 터무니없는 꿈을 현실과 맞바꾸며 살아온 베네치아는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멸망이라는 운명의 무게를 느끼고 문득 진심 어린 한숨을 토해낸다. 언젠가 호텔방 머리맡에서 들었던 은밀한 물소리도 그런 순간에 나온 베네치아의 혼잣말이었는지 모른다."  (p.207)


슬몃 다가온 봄이 어느새 온 마을을 감싸는 농무처럼 흐드러진 봄을 예고하고 있다. 산수유꽃이, 도로변의 개나리가, 봄햇살을 받은 목련이 온통 봄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소설 '무진기행'을 읽으면 때로 골짜기마다 수액처럼 피어오르는 는개의 축축한 감촉이 살아나는 것처럼 <밀라노, 안개의 풍경>을 읽으면 남편을 잃고 밀라노의 안개 속에서 절망과 슬픔의 시간을 보냈을 스가 아쓰코의 청춘 시절이 그리움처럼 밀려올 것만 같다. 우리는 다만 누군가에게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남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봄이 추억과 그리움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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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할 때가 더러 있다. 미국 시민도 아닌 내가 남의 나라 소식에 뭐 그리 놀랄 일이 있을까마는 오래전에 이민을 간 여동생이 뉴욕에 살고 있는 까닭에 여동생 부부를 비롯한 어린 조카들의 안부가 몹시 걱정이 되고 말할 수 없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작년 이맘때의 코로나19 팬데믹 초창기에도 그러했고, 동양인 혐오 범죄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최근에도 걱정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여동생 가족의 신변이 불안한 것은 어쩌면 미국 사회에서 소수민족이라는 비주류에 속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이 미국의 우방이자 동맹국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유럽계 백인종이 다수인 미국에서 아시아 인종은 소수민족으로서의 차별과 냉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차별금지법이 존재하는 국가에서 차별로 인한 폭력의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만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어긋나는 법, 차별금지법도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비주류에 속한 그들에게 공포,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국방부로부터 부당한 전역 통보를 받고 복직 투쟁을 하던 변희수 하사가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를 언론 매체를 통해 들었다.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는 이유로 강제 전역을 통보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인권위의 결정도 소용없었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비주류의 삶을 선택한다는 건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거는 일이다. 그것이 일시적인 기분에 의해 즉흥적으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비주류를 선택할 수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 차별과 냉대를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비주류의 길을 간다는 건 차마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민자는 다시 돌아올 수라도 있지만 난민이나 성소수자는 되돌릴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주변에는 성소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언론에서 접할 때마다 우리 사회의 미개함에 분노를 금치 못한다.

 

고인이 된 변희수 하사의 기사는 영국의 BBC나 가디언에도 소개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차별금지법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낯부끄러운 설명도 있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꼴통 짓거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사회가 바뀌고, 국민들의 인식이 바뀌면 언젠가 그들이 성소수자를 향해 겨누었던 그들의 칼날이 오히려 자신들의 목을 겨눌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입법을 미루고 미루었던 이해충돌방지법이 결국 지금의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의 목을 겨누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속담에 '당장 먹기엔 곶감이 달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자신들에게 이익인 듯 보이지만 대가를 치를 날이 곧 닥친다는 뜻일 게다. 어렵고 힘든 비주류의 길을 스스로가 원해서 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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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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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슬한 삶의 한기(寒氣)를 느낄 나이가 되었다는 건 아마도 삶의 속도에 비례하여 삶의 덧없음과 허무의 공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감지한고 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매 순간 '살아있음'을 실감하며 살았던 시간보다는 막막한 현실을 어떻게 하면 떨쳐낼 수 있을까, 궁리하며 겨우겨우 '살아낸' 시간들이 많았던 까닭에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 알갱이처럼 인생은 그저 허망하고 덧없는 어떤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뒤늦게 후회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간에도 '관성의 법칙'은 여전히 통용되는 까닭에 삶의 깨달음이 나의 지난 습관을 말끔히 없애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삶을 '살기'보다는 '살아내기'에 급급한 시간들로 남은 시간들이 채워지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가중되어 매일 밤 나는 불성실한 잠으로 하루의 피곤을 지어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다. 낙태가 금지된 상태에서도 한국의 낙태율은 OECD 최상위권이고 출생률은 전 세계적으로 최하위권이다. 인구 감소로 인해 한국은 2750년 즈음 왜소한 공룡처럼 멸종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누군가 그토록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그 하루를 사는 것이다. 이미 태어난 사람들도 애써 공동체의 소멸에 공헌하고 있다. 이를테면 일정 규모의 경제를 유지하는 국가들 가운데 해외 이민을 떠난 뒤 모국의 국적을 포기하는 비율은 한국인이 2014년 이래 가장 높다."  (p.18)

 

김영민 교수가 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입소문을 타고 내 귀에 전해진 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약간은 의도적으로, 그리고 '일부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책에 대한 대화를 삼가 왔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수도 있고, 불성실한 잠을 전쟁처럼 치르고 난 다음날 아침의 나른한 피곤 때문일 수도 있었다. '죽음'과 '아침'이라는 상반된 이미지의 현격한 거리감이 책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내게 극적인 변화를 던져주었던 건 최근에 걸려 온 지인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서로의 안부와 함께 이런저런 잡담이 이어지던 도중 '김영민 교수'를 아느냐는 뜬금없는 질문이 있었고, 나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모른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최근 장안의 화제인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저자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는 힐난 섞인 반박이 있지 않았겠나. 나는 멍한 기분으로 책을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오늘날 자기계발서들은 당신을 위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삶이 힘들죠? 이제 깨어나실 시간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멈춰서 보세요. 흙에서 나와 흙으로 가기 전에 잠깐 스치는 게 삶이죠. 마음을 고쳐먹으세요. 내려놓으세요. 집착을 버리세요. 세상 탓을 하지 마세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어요. 마음이 행복하면 세상도 행복해요. 옳은 것보다 행복한 것이 더 중요해요. (중략) "삶이 힘들어"라는 말은 대개 "취직을 하고, 괴롭히는 상사가 없고, 빚이 없고, 일주일에 4일만 일하고, 봄가을에는 여행을 다니고 싶어"의 준말이다. 그런 이에게 자기계발서의 달콤한 위로를 선물하는 것은 욕조가 없는 이에게 입욕제를 선물하는 것과 같다."  (p.224~p.225)

 

책의 제목과는 다르게 저자는 이 책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 쓴 여러 편의 칼럼과 예전에 보았던 영화의 리뷰, 자신이 했던 인터뷰 등 우리가 흔히 보았던 산문집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책을 다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이 책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널리 알려진 까닭은 책의 제목이 특이해서라기보다 우리의 상식과 고정관념에 강한 니킥을 날리는 저자의 솔직한 입담 덕분으로 인해 책을 통해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인생의 확고한 의미에 대해서 설파하는 책이나, 한국을 부흥시킬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책이나, 인류 문명의 향방에 대해 확실한 예측을 하는 책 따위는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많은 것들에 대해 확신이 없지만, 그러한 책들의 주장에는 특히 확신이 없거든요. 그런 책들은 확신할 근거가 없는 것들까지 확신하기에, 그런 책들을 확신할 수 없죠. 저는 차라리 불확실성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그나마 큰 고통 없이 살아가기를 원해요."  (p.340 '에필로그' 중에서)

 

지식인의 책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우리 사회를 보다 성숙한 시민들의 공동체로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정파적인 이득이나 경제적 이해득실을 따져 교묘한 말로 독자들을 현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책의 홍수 속에서 객관적인 기준에서 좋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분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가뜩이나 바쁜 현대인들이 책을 읽을 짬을 내기도 힘든데 책을 고르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는 건 더더구나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의 선택을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하며,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책들을 덥석 구매한다. 독서는 그렇게 무분별한 선택과 함께 진행된다. 세밀하게 느끼며 감각하며 살기에도 짧은 시간을 우리는 그저 살아내기에 급급할 뿐이다. 그러다 문득 소슬한 삶의 한기를 느끼는 나이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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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심약한 인간이 주변에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될 많은 고통 중 하나는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도덕이나 법률, 혹은 관습이나 규칙과 같은 것들로 인한 강한 압박감일지도 모른다. 무릇 도덕이나 관습이라는 게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경우가 태반이지 않은가. 하여 성인이 아닌 장삼이사(張三李四)가 평생 동안 공동체의 법규를 단 한 차례도 위반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양심에 거리끼는 바가 있으나 자신을 비롯한 공동체의 구성원과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지극히 심약하거나 남들보다 높은 도덕적 잣대를 지닌 인간의 경우에는 단 한 번의 실수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럼에도 공동체의 구성원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비난을 스스로 생을 마감한(남들보다 심약하거나 도덕적 잣대가 높은) 그에게 쏟아낸다.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나는 이와 같은 부조리가 마치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상이 아닌, 안드로메다의 어느 행성에서나 있음 직한 것인 양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아니, 나는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한다.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에 관한 사회적 비난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LH에서 근무하던 직원의 잇단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 사회로부터 소중한 생명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하는 게 먼저일 텐데 뉴스를 보던 친구 왈,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죽었겠지." 하였다. 나는 한 사람의 생명을 죄의 대가로 등치 하는 친구의 정형화된 의식 체계에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예컨대 캐디를 성추행하고 뻔뻔하게 살아 있는  박희태 전 국회의원이나 인턴을 성추행하고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떳떳함을 주장하는 윤창중 씨는 피해자에게 잘한 것이고, 성추행의 죄과를 자신의 생명으로 대신한 박원순 전 시장은 피해자에게 정말 몹쓸 짓을 했단 말인가. 과연 이게 말이나 되는가. 그런 논리로 작금의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 사건을 바라본다면 가장을 잃은 유가족들은 과연 누구를 의지하여 남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광기의 경우를 제외하면, 어떤 작가가 썼듯이 "죽음을 대면하고, 잔혹함에 가까운 최후를 일찌감치 받아들이는 것은 자살에 대한 일반적인 경멸과 달리 모욕받기보다 오히려 칭송받을 만하다". 타르드가 말했듯이 삶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그만큼 이 소중한 삶을 버리기 위해서도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자살에 관한 모든 것> - 마르탱 모네스티에)

 

공동체의 유지와 연속성 측면에서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도덕이나 관습은 필요 불가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절제력이란 때로 과도한 욕망을 억제하기에는 너무도 허술한 무기가 아닐 수 없다. 한 번의 실수가 한 사람을 우리 사회로부터 영원히 추방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것은 정말 가혹한 일이지 그 사람의 죄를 부풀려서 비난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본다. 죄를 짓고도 뻔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일부의 사람들, 과연 우리는 자신의 생명마저 내놓은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도덕적인 인간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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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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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소설의 성패는 촘촘한 디테일과 허를 찌르는 반전에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읽는 사람에 따라 장쾌한 액션과 국경을 넘나드는 큰 스케일에 매력을 느낀다고 말하는 이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대실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에 의해 발전되어 온 20세기 탐정소설의 주류는 역시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탐정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폭력과 섹스를 다루는 데 있어 너무 노골적이고 선정적이라는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폭력적인 주제를 다소 냉철하고 무감한 태도로 묘사한다는 측면에서 비판보다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것은 부조리한 세계를 응시하는 작가의 냉소적인 시선에 더욱 열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 하라 료는 하드보일드 소설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일본 땅에서 하드보일드 소설을 도입하여 크게 유행시킨 일본 하드보일드의 역사이자 전설로 평가받는 작가이다. 그런 까닭인지 하라 료의 최신작 <지금부터의 내일> 역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부터의 내일>이 탄생하는 데 무려 십사 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420여 쪽에 이르는 긴 이야기이지만 스릴 넘치는 하드보일드 소설이 으레 그렇듯 매 순간이 사건의 연속이고, 다음 장면이 궁금한 독자들은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결코 내려놓을 수 없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니시신주쿠 변두리 쇠락한 거리에 있는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를 찾아오는 건 의뢰인만이 아니었다. 낡은 문을 노크만 하면, 기억을 잃은 사격 선수도, 성전환 수술을 받은 대필 작가도, 탐정을 지망하는 불량소년도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었다. 1억 엔을 빼앗긴 폭력단 조직원도,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악덕 경찰도 나타났다."  (p.9)

 

소설의 주인공이자 '와타나베 탐정사무소'의 주인인 사와자키 역시 쇠락한 거리와 함께 나이가 든 오십 대의 탐정이었다. 소설은 그가 근처 흥신소에서 하청 받은 잠복근무를 마치고 사흘 만에 자신의 사무실로 출근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때 마침 '밀레니엄 파이낸스' 신주쿠 지점 지점장인 모치즈키 고이치가 찾아온다. 모치즈키는 자신의 지점에서 대출이 예정된 아카사카 요정 여주인인 히라오카 시즈코의 사생활을 조사해달라며 선금을 주고 사라진다. 그러나 의뢰받은 여주인이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와자키는 모치지키와의 연락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결국 그는 '밀레니엄 파이낸스' 신주쿠 지점을 직접 찾아가기에 이르렀고,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으로 그 시간에 마주친 은행강도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요정 여주인의 사생활을 조사하고자 했던 흔하고 단순했던 일에서 오십 대의 노련한 탐정에게도 벅찬 큰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빠져 들게 되는데...

 

"그날 아침 집 근처 식당에서 본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밀레니엄 파이낸스 신주쿠 지점의 강도사건을 충동적이고 무계획적인 범행이라고 보도했다. 이인조 범인 중 한 명은 아무것도 훔치지 않은 채 도주했고 다른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으며 다행히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앞머리를 반듯하게 손질한 아나운서가 뉴스 원고를 단조롭게 읽어내려 갔다."  (p.86)

 

모치즈키 지점장마저 행방불명인 상태에서 사건은 점차 분화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 속에서 책을 읽는 독자들은 사건이 도대체 어떤 시점에서 해결될 것이며, 사와자키는 또 어떤 단서를 통해 사건을 해결할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한 채 복잡한 플롯을 따라잡기에 여념이 없는, 다소 산만하고 분주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오십 년 이상 살다 보면 놀랄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탐정 업무를 하는 탓에 죽음의 위험에 빈번히 노출되기도 하지만, 땅속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폭력이 상대라면 악담을 내뱉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에 들린 담배를 다시 물고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나는 아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  (p.423)

 

의뢰받은 사건에 따라 시간에 쫓기는 일도 다반사일 테고, 위험에 처해 긴급히 구조 요청을 해야 할 경우도 많을 텐데 사와자키는 여전히 휴대전화도 없이 전화응답 서비스를 애용하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탐하는 돈과 건강에는 초연한 듯 줄담배와 위험 속으로 빠져들고, 자신의 인생에서 내일은 마치 선물처럼 주어질 뿐, 약속된 것이 아니라는 태도로 일관하는 사와자키. 안락하고 풍요로운 가정도 없이 하루살이처럼 삐딱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와자키를 독자들이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까닭은 아마도 그가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독자들 대다수가 사와자키와 같은 삶을 꿈꾸지는 않지만, 이번 생에서는 결코 가보지 못할 그런 삶을 사와자키가 대신 살아주는 까닭에 우리는 세상 어느 것에도 거리낄 게 없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봄비가 촉촉히 내렸던 오늘, 탐정 사와자키라면 빗속을 우산도 없이 걸었겠지만, 세상의 이목을 신경 쓰는 나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 우산을 쓰고 소심하게 은행을 다녀왔다. 그러나 복면강도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소심한 나의 삶에 예외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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