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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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추억을 한 권의 책으로 읽는다는 건 푸근한 안개 속에서 온종일 헤매는 일이다. 길은 있으되 보이지 않으며, 시간은 안개 속에 뒤엉켜 뒤죽박죽 흩어지지만, 왔던 길을 고샅고샅 되짚어 볼 필요도, 또는 시간의 순서에 맞춰 읽었던 추억들을 가지런히 나열할 필요도 없이 나는 그저 께느른한 오후를 적당히 즐기며 안개처럼 몽롱해질 뿐이다. 그렇게 한나절 즐기기에는 스가 아쓰코의 산문집 <밀라노, 안개의 풍경>이 제격이다. 1929년생인 작가가 해외여행조차 원활하지 않았던 1960년대 패전국 일본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올라 십삼 년간 이탈리아 밀라노에 거주했던 경험을 담담히 풀어낸 이 책은 이방인의 눈에 비친 오래전 이탈리아의 풍경을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놓는다.


"저녁 무렵 창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안개가 자욱이 깔리곤 한다. 창에서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플라타너스의 가지 끝이 눈 깜짝할 사이 자취를 감추고, 끝내 굵은 줄기까지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가로등 밑을 생물처럼 달려가는 안개를 본 적도 있다. 그런 날에는 몇 번이고 창으로 달려가 짙은 안개 너머를 내다본다."  (p.10)


예순이 넘은 나이에 첫 작품을 발표하고 팔 년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단 다섯 권의 에세이를 출간했다는 스가 아쓰코의 첫 에세이인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그녀가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십삼 년간의 시간 동안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을 동양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문학도로서 보고, 만나고, 겪었던 모든 것들이 단아한 문체에 실려 독자들의 가슴에 안개처럼 스민다.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모인 코르시아 서점의 일원으로 청춘의 한 자락을 보내며, 낯선 땅에서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과 교류했던 스가 아쓰코. 교회 당국의 탄압과 내부 분열로 코르시아 서점이 문을 닫고, 서점 동료이자 남편이었던 페피노와의 결혼생활도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으로 오 년 만에 막을 내렸지만, 십삼 년간의 밀라노 생활은 귀국 후의 작가에게 풍성한 문학적 자양분을 제공한 듯하다.


"무스타키 대신 레너드 코언을 건네주던 가티, 남편을 잃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던 나에게 수면제를 먹을 게 아니라 상실의 시간을 인간답고 성실하게 슬퍼하며 살아야 한다고 엄하게 꾸짖던 가티는 이제 거기 없었다. 그의 한없는 밝음에, 더는 나를 짜증나게 하지 않는 가티의 모습에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p.111)


절제되고 과하지 않은 감정으로 자신의 청춘 시절을 밀도 있게 그려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글로 쓰이지 않았던 긴 시간의 침묵이 작가의 내부에서 이미 완성된 어떤 것으로 서서히 재현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침묵으로 완성한 옛 기억의 엘레지. 전통과 구습에 얽매인 고국에서의 생활에 갑갑함을 느끼고 1960년대의 이른 시절에 유학과 국제결혼이라는 파격적인 선택을 감행했던 작가의 이야기는 21세기를 사는 작금의 젊은이들에게도 공감과 동경의 마음을 품게 한다.


"그러나 환상의 시간은 언젠가 어쩔 수 없이 현실로 회귀한다. 터무니없는 꿈을 현실과 맞바꾸며 살아온 베네치아는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멸망이라는 운명의 무게를 느끼고 문득 진심 어린 한숨을 토해낸다. 언젠가 호텔방 머리맡에서 들었던 은밀한 물소리도 그런 순간에 나온 베네치아의 혼잣말이었는지 모른다."  (p.207)


슬몃 다가온 봄이 어느새 온 마을을 감싸는 농무처럼 흐드러진 봄을 예고하고 있다. 산수유꽃이, 도로변의 개나리가, 봄햇살을 받은 목련이 온통 봄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소설 '무진기행'을 읽으면 때로 골짜기마다 수액처럼 피어오르는 는개의 축축한 감촉이 살아나는 것처럼 <밀라노, 안개의 풍경>을 읽으면 남편을 잃고 밀라노의 안개 속에서 절망과 슬픔의 시간을 보냈을 스가 아쓰코의 청춘 시절이 그리움처럼 밀려올 것만 같다. 우리는 다만 누군가에게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남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봄이 추억과 그리움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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