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심약한 인간이 주변에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될 많은 고통 중 하나는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도덕이나 법률, 혹은 관습이나 규칙과 같은 것들로 인한 강한 압박감일지도 모른다. 무릇 도덕이나 관습이라는 게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경우가 태반이지 않은가. 하여 성인이 아닌 장삼이사(張三李四)가 평생 동안 공동체의 법규를 단 한 차례도 위반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양심에 거리끼는 바가 있으나 자신을 비롯한 공동체의 구성원과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지극히 심약하거나 남들보다 높은 도덕적 잣대를 지닌 인간의 경우에는 단 한 번의 실수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럼에도 공동체의 구성원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비난을 스스로 생을 마감한(남들보다 심약하거나 도덕적 잣대가 높은) 그에게 쏟아낸다.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나는 이와 같은 부조리가 마치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상이 아닌, 안드로메다의 어느 행성에서나 있음 직한 것인 양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아니, 나는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한다.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에 관한 사회적 비난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LH에서 근무하던 직원의 잇단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 사회로부터 소중한 생명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하는 게 먼저일 텐데 뉴스를 보던 친구 왈,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죽었겠지." 하였다. 나는 한 사람의 생명을 죄의 대가로 등치 하는 친구의 정형화된 의식 체계에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예컨대 캐디를 성추행하고 뻔뻔하게 살아 있는  박희태 전 국회의원이나 인턴을 성추행하고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떳떳함을 주장하는 윤창중 씨는 피해자에게 잘한 것이고, 성추행의 죄과를 자신의 생명으로 대신한 박원순 전 시장은 피해자에게 정말 몹쓸 짓을 했단 말인가. 과연 이게 말이나 되는가. 그런 논리로 작금의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 사건을 바라본다면 가장을 잃은 유가족들은 과연 누구를 의지하여 남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광기의 경우를 제외하면, 어떤 작가가 썼듯이 "죽음을 대면하고, 잔혹함에 가까운 최후를 일찌감치 받아들이는 것은 자살에 대한 일반적인 경멸과 달리 모욕받기보다 오히려 칭송받을 만하다". 타르드가 말했듯이 삶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그만큼 이 소중한 삶을 버리기 위해서도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자살에 관한 모든 것> - 마르탱 모네스티에)

 

공동체의 유지와 연속성 측면에서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도덕이나 관습은 필요 불가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절제력이란 때로 과도한 욕망을 억제하기에는 너무도 허술한 무기가 아닐 수 없다. 한 번의 실수가 한 사람을 우리 사회로부터 영원히 추방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것은 정말 가혹한 일이지 그 사람의 죄를 부풀려서 비난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본다. 죄를 짓고도 뻔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일부의 사람들, 과연 우리는 자신의 생명마저 내놓은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도덕적인 인간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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