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소슬한 삶의 한기(寒氣)를 느낄 나이가 되었다는 건 아마도 삶의 속도에 비례하여 삶의 덧없음과 허무의 공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감지한고 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매 순간 '살아있음'을 실감하며 살았던 시간보다는 막막한 현실을 어떻게 하면 떨쳐낼 수 있을까, 궁리하며 겨우겨우 '살아낸' 시간들이 많았던 까닭에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 알갱이처럼 인생은 그저 허망하고 덧없는 어떤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뒤늦게 후회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간에도 '관성의 법칙'은 여전히 통용되는 까닭에 삶의 깨달음이 나의 지난 습관을 말끔히 없애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삶을 '살기'보다는 '살아내기'에 급급한 시간들로 남은 시간들이 채워지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가중되어 매일 밤 나는 불성실한 잠으로 하루의 피곤을 지어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다. 낙태가 금지된 상태에서도 한국의 낙태율은 OECD 최상위권이고 출생률은 전 세계적으로 최하위권이다. 인구 감소로 인해 한국은 2750년 즈음 왜소한 공룡처럼 멸종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누군가 그토록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그 하루를 사는 것이다. 이미 태어난 사람들도 애써 공동체의 소멸에 공헌하고 있다. 이를테면 일정 규모의 경제를 유지하는 국가들 가운데 해외 이민을 떠난 뒤 모국의 국적을 포기하는 비율은 한국인이 2014년 이래 가장 높다."  (p.18)

 

김영민 교수가 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입소문을 타고 내 귀에 전해진 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약간은 의도적으로, 그리고 '일부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책에 대한 대화를 삼가 왔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수도 있고, 불성실한 잠을 전쟁처럼 치르고 난 다음날 아침의 나른한 피곤 때문일 수도 있었다. '죽음'과 '아침'이라는 상반된 이미지의 현격한 거리감이 책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내게 극적인 변화를 던져주었던 건 최근에 걸려 온 지인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서로의 안부와 함께 이런저런 잡담이 이어지던 도중 '김영민 교수'를 아느냐는 뜬금없는 질문이 있었고, 나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모른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최근 장안의 화제인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저자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는 힐난 섞인 반박이 있지 않았겠나. 나는 멍한 기분으로 책을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오늘날 자기계발서들은 당신을 위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삶이 힘들죠? 이제 깨어나실 시간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멈춰서 보세요. 흙에서 나와 흙으로 가기 전에 잠깐 스치는 게 삶이죠. 마음을 고쳐먹으세요. 내려놓으세요. 집착을 버리세요. 세상 탓을 하지 마세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어요. 마음이 행복하면 세상도 행복해요. 옳은 것보다 행복한 것이 더 중요해요. (중략) "삶이 힘들어"라는 말은 대개 "취직을 하고, 괴롭히는 상사가 없고, 빚이 없고, 일주일에 4일만 일하고, 봄가을에는 여행을 다니고 싶어"의 준말이다. 그런 이에게 자기계발서의 달콤한 위로를 선물하는 것은 욕조가 없는 이에게 입욕제를 선물하는 것과 같다."  (p.224~p.225)

 

책의 제목과는 다르게 저자는 이 책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 쓴 여러 편의 칼럼과 예전에 보았던 영화의 리뷰, 자신이 했던 인터뷰 등 우리가 흔히 보았던 산문집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책을 다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이 책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널리 알려진 까닭은 책의 제목이 특이해서라기보다 우리의 상식과 고정관념에 강한 니킥을 날리는 저자의 솔직한 입담 덕분으로 인해 책을 통해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인생의 확고한 의미에 대해서 설파하는 책이나, 한국을 부흥시킬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책이나, 인류 문명의 향방에 대해 확실한 예측을 하는 책 따위는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많은 것들에 대해 확신이 없지만, 그러한 책들의 주장에는 특히 확신이 없거든요. 그런 책들은 확신할 근거가 없는 것들까지 확신하기에, 그런 책들을 확신할 수 없죠. 저는 차라리 불확실성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그나마 큰 고통 없이 살아가기를 원해요."  (p.340 '에필로그' 중에서)

 

지식인의 책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우리 사회를 보다 성숙한 시민들의 공동체로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정파적인 이득이나 경제적 이해득실을 따져 교묘한 말로 독자들을 현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책의 홍수 속에서 객관적인 기준에서 좋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분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가뜩이나 바쁜 현대인들이 책을 읽을 짬을 내기도 힘든데 책을 고르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는 건 더더구나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의 선택을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하며,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책들을 덥석 구매한다. 독서는 그렇게 무분별한 선택과 함께 진행된다. 세밀하게 느끼며 감각하며 살기에도 짧은 시간을 우리는 그저 살아내기에 급급할 뿐이다. 그러다 문득 소슬한 삶의 한기를 느끼는 나이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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