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할 때가 더러 있다. 미국 시민도 아닌 내가 남의 나라 소식에 뭐 그리 놀랄 일이 있을까마는 오래전에 이민을 간 여동생이 뉴욕에 살고 있는 까닭에 여동생 부부를 비롯한 어린 조카들의 안부가 몹시 걱정이 되고 말할 수 없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작년 이맘때의 코로나19 팬데믹 초창기에도 그러했고, 동양인 혐오 범죄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최근에도 걱정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여동생 가족의 신변이 불안한 것은 어쩌면 미국 사회에서 소수민족이라는 비주류에 속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이 미국의 우방이자 동맹국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유럽계 백인종이 다수인 미국에서 아시아 인종은 소수민족으로서의 차별과 냉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차별금지법이 존재하는 국가에서 차별로 인한 폭력의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만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어긋나는 법, 차별금지법도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비주류에 속한 그들에게 공포,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국방부로부터 부당한 전역 통보를 받고 복직 투쟁을 하던 변희수 하사가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를 언론 매체를 통해 들었다.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는 이유로 강제 전역을 통보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인권위의 결정도 소용없었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비주류의 삶을 선택한다는 건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거는 일이다. 그것이 일시적인 기분에 의해 즉흥적으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비주류를 선택할 수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 차별과 냉대를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비주류의 길을 간다는 건 차마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민자는 다시 돌아올 수라도 있지만 난민이나 성소수자는 되돌릴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주변에는 성소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언론에서 접할 때마다 우리 사회의 미개함에 분노를 금치 못한다.

 

고인이 된 변희수 하사의 기사는 영국의 BBC나 가디언에도 소개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차별금지법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낯부끄러운 설명도 있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꼴통 짓거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사회가 바뀌고, 국민들의 인식이 바뀌면 언젠가 그들이 성소수자를 향해 겨누었던 그들의 칼날이 오히려 자신들의 목을 겨눌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입법을 미루고 미루었던 이해충돌방지법이 결국 지금의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의 목을 겨누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속담에 '당장 먹기엔 곶감이 달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자신들에게 이익인 듯 보이지만 대가를 치를 날이 곧 닥친다는 뜻일 게다. 어렵고 힘든 비주류의 길을 스스로가 원해서 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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