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삶 - 타인의 눈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는 독서의 즐거움
C. S. 루이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적 경험은 개성이라는 특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개성이 입은 상처를 치유해 준다. 상처를 치유해 주는 집단적 감정들도 있지만 그것들은 개성이라는 특권을 파괴한다. 집단적 감정 속에서는 우리 개개의 자아들이 서로 뭉뚱그려지면서 개성이 흐릿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훌륭한 문학을 읽으면 나는 천의 인물이 되면서도 여전히 나로 남아 있다. 그리스 시에 나오는 밤하늘처럼 나도 무수한 눈으로 보지만, 보는 주체는 여전히 나다. 예배할 때나 사랑할 때, 또 도덕적 행위를 할 때나 지식을 얻는 순간처럼, 독서를 통해서도 나는 나를 초월하되 이때처럼 나다운 때는 없다."  (p.22)

 

책을 읽는다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불가사의한 경험'이라고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을 넘어 머릿속에서 하나하나의 장면을 상상하고, 때로는 춥거나 무덥거나 습하거나 건조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도 하며, 기쁘고 슬픈 감정을 현실에서와 같이 직접적으로 체험하기도 한다. 그것은 다른 어떠한 보조장치의 도움도 없이 순전히 자신의 독자적인 인식 체계만으로 구동된다는 점에서 가상현실(VR)이나 증강현실(AR)과 구별되며, 그 어떤 가상현실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세밀하게 구현된다는 점에서 현대의 과학기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가상현실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띤다고 하겠다.

 

독서의 이점은 사실 아무리 말해도 부족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혜택을 하나의 문장으로 말하기는 또 쉽지 않다. <나니아 연대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C.S.루이스 역시 '당대에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 무엇이든 읽고, 읽은 것은 전부 기억한 사람'으로 평가될 정도로 독서가 몸에 배어 있었던 사람이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독서의 이점을 설파하였던 것을 보면 그 역시 독서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는 게 쉽지 않았던 듯하다.

 

"요컨대 시 예술 전반에서 최고 경지는 결국 일종의 물러남이다. 거기에 도달하려면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 전체가 그의 뇌리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제 시인은 길을 비켜나기만 하면 된다. 가만히 있으면 파도가 밀려오고, 산들이 잎을 흔들고, 빛이 비쳐 들고, 천체가 회전한다. 이 모두가 시를 짓는 데 필요한 소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시다."  (p.157)

 

나는 사실 이 책, C.S.루이스의 <책 읽는 삶>을 두 번째 읽고 있다. 시간이 날 때 일부분을 읽었던 것까지 포함하면 여러 번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군데군데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을 발견하기도 하고,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새롭게 발견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게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물론 독서라는 한정된 행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역시 제한된 것일 테지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육체에 갇힌 나를 잊은 채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유로운 시간을 유영했던 것이다.

 

"여기 충격적 사실이 있다. 진실하지 않고는 글을 잘 쓰기가 치명적으로 어려울 수 있지만, 진실성 자체는 누구에게도 좋은 작법을 가르친 적이 없다. 진실성은 문학적 재능이 아니라 도덕적 덕목이다. 진실성에 대한 보상을 바랄 곳은 내세이지 문단이 아니다."  (p.130)

 

단지 한 권의 책만 갖고 하루를 이토록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건 소위 '가성비'의 측면에서 단연 '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토네이도가 덮쳐 순식간에 나를 날려 보낸다고 할지라도 나는 두려움 없이 그 직전까지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그 사이에 바깥 기온이 많이 떨어졌나 보다. 으슬으슬한 한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걸 보니... 보일러 온도를 높여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친숙하지 않다는 것은 곧 신기하다거나 독특하다는 느낌을 넘어 때로는 이상한 혹은 싫은 등의 부정적인 인식으로 발전하기 쉽다. 그러므로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얼마만큼 반복적으로 노출되었는가에 따라 대중이 혐오하는 대상도 얼마든지 친숙하다거나 옳은 것으로 인식할 수 있고, 일반 대중이 옳다고 믿는 어떤 사건이나 대상도 이상한 것 혹은 잘못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든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은 인간의 신념이나 가치 체계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뿐 아니라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학습 환경이나 언론의 다양성을 편견 없이 접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육 환경이 제공되지 않는 한 건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반증이기도 하다.

 

얼마 전 야당의 선대위에 가담했던 한 젊은이(라고 말하기는 나이가 꽤나 들었지만)의 독선적인 자기 주장 내지는 지나친 편견에 대해 연일 이어지던 언론이나 대중의 지적에 대해 나는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깊은 비애를 느꼈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치열한 경쟁과 부의 불평등 구조로 전 세계에 악명이 높다. 이런 까닭에 아이가 있는 학부모들은 아이의 인성이나 건전한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소위 'SKY'로 지칭되는 명문 대학을 향한 외길에 아이를 줄 세우곤 한다. 물론 예외적인 학부모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대부분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관점도 다양한 책이나 영상을 통해 습득하고 토론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부모로부터 대물림받는 게 일반적이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명문 대학 진학을 위해 학교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인성 교육이 웬 말이냐는 투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누군가(대개는 부모님)로부터의 강제적인 세뇌나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이 곧 자신의 노력이나 가치 판단의 결과로 형성된 것인 양 속단하곤 한다. 인생이 불행해지는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일반인의 생각이나 그들의 가치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전혀 없거나 그들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사고를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공감능력이 현저히 낮거나 숫제 없는 사람을 우리는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존경해 마지않는 김구 선생에 대해 '국밥 좀 늦게 나왔다고 사람 죽인 인간'이라고 치부하거나, 5·18 민주화 운동을 일컬어 폭동이라고 하거나, 긴급재난지원금을 개밥에 비유하거나, 실업급여 수급자를 향해 거지근성이라고 하는 등 일반적인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이와 같은 사고를 지닌 당사자를 그저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만 한다. 그는 다만 5·18 민주화 운동의 실상에 대해서도, 김구 선생의 사상이나 업적에 대해서도, 혹은 가난한 이의 삶에 대해서도 별반 아는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말이나 행동에 대해 그저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이면에 곪을 대로 곪은 병폐를 파악하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우리는 제2, 제3의 노 씨를 언제든 다시 마주칠 수 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지독한 편견의 소유자가 대통령 후보로 나설 날이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국제 사회의 정서와 동떨어진 일본이 끝을 알 수 없는 쇠락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우리나라의 정서가 그렇게 변해간다면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동시에 먼 나라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한 명의 지구인인 까닭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잘 있지 말아요 -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연애담
정여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흐르는 시간이 야속한 것은 비단 나 스스로가 늙어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와 내 주변의 다정했던 사람들을 속절없이 앗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이 태어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계속해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가까웠던 사람들을 차츰 잃어간다는 건 더없이 슬픈 일이다. 하여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반복해서 만나기도 하고 좋아하는 책을 반복해서 읽기도 한다. 이것 역시 속절없는 세월과 유한한 생명에 대한 반작용임을 나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자연의 매몰찬 냉대에 대한 티끌처럼 가벼운 한 인간의 무위한 반항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1인분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닮은꼴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다채로운 시간들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디선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뿐 아니라 현재에도 많지 않을까.『세월』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신비체험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 닮은꼴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 나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다는, 너무도 그럴듯한 상상.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 없는 타인과 만나고, 한 몸으로는 다 살아낼 수 없는 무지갯빛 시공간을 겪어내는 것은 아닐까. 지구라는 별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와 같은 고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덜 외롭고, 덜 아프고,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p.282)


정여울의 에세이 <잘 있지 말아요>는 작가가 읽었던, 혹은 보고 느꼈던 수많은 '사랑 이야기'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이자 해석이며, 사랑에 대한 통념과 전문가의 해설을 곁들인 진지한 논평이기도 하다. 작가는 다양한 연관 매체의 지식을 자신의 글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 책에 국한하지 않는 독자의 다양한 관심을 아우른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스탕달의 <적과 흑>,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트루먼 커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이언 매큐언의 <속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악> 등 서른일곱 편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사랑에 대한 자신의 지적 경험과 그를 통해 정립된 개인의 사랑관을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상처가 스스로 발화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사랑은 매력으로 시작되어 우정으로 승화되고, 마침내 서로에게서 최고의 스승을 발견하는 위대한 배움으로 이어진다. 이미 만들어진 완벽한 사랑의 저수지에 풍덩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무거운 돌을 나르고 빈틈을 메워 세상에 하나뿐인 사랑의 호수를 만들어가야 한다."  (p.323 '에필로그' 중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홀로 오지 않는다. 행복과 사랑, 분노와 사랑, 기쁨과 사랑, 슬픔과 사랑, 때로는 엄숙함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느끼는 대부분의 감정에 약방의 감초처럼 사랑이 함께하는 까닭은 혹여라도 우리가 사랑으로 가는 길을 잃었을 때, 다른 감정과 더불어 사랑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했던 신의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사랑이 없다면 삶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네 삶의 전부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진정 아름다운 이유는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소망을 충족시켜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사랑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 그 사랑을 통해 그들 주변의 세상을 좀 더 환하게 밝혀줄 수 있다는 희망이야말로 사랑을 아름답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빛이다."   (p.290)


많은 예술가들이 그토록 사랑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랑의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인간의 역사와 함께 면면히 이어져 왔던 감정. 그 숭고한 역사의 흔적을 우리는 한 권의 책으로, 혹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혹은 감동적인 연극이나 심금을 울리는 음악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우리가 자신의 눈을 통해 빛 속에 감추어진 다양한 스펙트럼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통해 다채로운 사랑의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사랑의 실체를 그저 희미하게 짐작할 뿐이다. 그것이 우리가 예술을 포기할 수 없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에 눈먼 청맹과니인 까닭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말연시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이제 옛말이 되고 말았다. 회사는 물론 친한 친구들도 몇몇이 만나 식사나 한 끼 하는 정도이지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부어라 마셔라 하는 분위기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적 분위기 중 많은 것들이 변하였고, 변하고 있는 중임을 실감하게 된다. 사람들도 이제는 대면 모임보다는 비대면 모임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추세이니 이렇게 몇 년만 지나면 송년 모임은 숫제 우리의 기억에서 영영 사라지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고등학교 동창들 모임이 있어 잠깐 얼굴을 비쳤었다. 오미크론의 공포 탓인지 많은 친구들이 모였던 건 아니지만 위드 코로나 이전에는 모임 자체를 금했던 터라 열 명 안팎의 인원도 꽤나 많은 듯 느껴졌던 것이다. 오프라인 모임에서나 느낄 수 있는 반가움과 살아 있다는 느낌은 온라인에서의 난무하는 하트나 과한 사진들 속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친구들 얼굴을 못 본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친구들 각자의 독특한 표정이나 말투, 특유의 제스쳐 등이 보면 볼수록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껏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만 그들 각자는 자신만의 행동 양식에 길들여져 있다는 걸 매번 느끼게 된다.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 양식으로 인해 그들 내부의 지적 수준이나 교양, 인격 등이 평가되고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알게 모르게 평가하곤 하는 것이다. 최근에 언론 보도가 많아진 야당 후보의 화법이나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태도를 보면서 이 사람의 지적 수준이 아주 낮거나 무엇인가 숨기고 싶은 게 많아서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타인의 질문을 귀 담아 듣지 않는 버릇이 있어서 질문의 요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그의 대답은 항상 횡설수설 명확한 논지도 없이 산으로 향하고 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다른 나라의 정상을 만나 우리나라의 상황을 설명하고 국익에 합당한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낸다는 건 처음부터 물 건너간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끝을 흐리거나 논점을 회피한 채 횡설수설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거나 알고는 있지만 자신을 숨겨야 할 필요가 있을 때이다. 사람이 솔직하고 자신감이 있다면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고 명확히 말할 일이지 질문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대답을 한다는 건 질문자를 무시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예컨대 "삼국지연의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인물이 있나? 특별히 없다면 좋아하는 문학작품이 있느냐?"는 질문에 뜬금없이 닥터지바고가 생각난다는 대답 같은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0월
평점 :
절판


어떤 기억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가 어느 날 우리의 의식 표면으로 가볍게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생각의 주인인 나에게 "이제 좀 나가도 되겠습니까?" 하고 정중히 허락을 득하는 것은 아니다. 도식적인 경로를 통해 멀리서 다가오는 것도 아닌 까닭에 미리 대비를 하거나 환영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사채업자처럼 어느 날 불쑥 나타났다가 가만히 사라지는 까닭에 '이런 기억도 있었구나.' 재차 확인할 뿐이다. 그런 기억들은 대개 나와는 전혀 다른 생명력을 지닌,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이 나도 모르게 내 머릿속에 이식된 듯한, 전혀 다른 개체의 기억처럼 느껴지곤 한다. 먼 훗날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이 사람 저 사람의 기억 속을 둥둥 떠다니면서 끈질긴 생명을 이어갈 것만 같은 것이다.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는 어른이 된 지금은 내 딸의 감정적인 혼란과 비틀거림을 용납할 수 없어 짜증스러운 것만큼이나 나는 당시의 내가 낯설고 멋쩍다. 질서 정연하지 않고 안정감이 없는 것이 오히려 버거워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나왔던 것처럼, 그리고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처럼 내 딸 역시, 아니 이 땅의 모든 여고생들이 성장기란 어두운 터널 속을, 그 감정의 도가니 속을, 그리고 언젠가는 기억에서 멀어져 갈 현재를 힘겹게 통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p.204 '역자 후기' 중에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집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는 여고생 시절의 기억들을 여섯 편의 단편을 통해 소환한다. 물론 나와 같은 남자 독자라면 사정이 다를 테지만 책을 읽는 여성 독자라면 그 시절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르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1964년생인 에쿠니 가오리의 고교 시절과 완전히 닮은, 판박이의 경험들이 독자들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일본이 아닌 한국은 생각이나 배경부터가 다를 테고. 하지만 그 시절에 들었던 생각들, 이를테면 학교생활, 성적, 부모님과의 갈등, 연애나 우정 등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누구나가 겪는 경험들로부터 비롯된 괜한 오해와 분노, 서글픔, 기쁨 등의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하던 순간들은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때로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어린 탓이 아니라 엄마가 나이를 너무 먹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똑같지 않다.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리다면 언젠가는 이해할 때가 온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아주 아주 슬픈 일이다."  (p.138 '천국의 맛' 중에서)

 

그 시절의 우리는 덩치만 컸지 미처 성장하지 못한 이성의 발달을 탓할 새도 없이 분출하는 감정의 지배하에 놓인 몸뚱어리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난감해하곤 했다. 실수는 다반사였고, 실수를 통해 깨닫고 배운 바를 다음에는 제대로 기억하여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노라는 다짐이나 결심은 번번이 빗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성이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어른이 된 지금 "그때보다 사는 게 조금 더 편해졌거나 그때보다 더 행복해졌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우리는 지금도 만나야 했기에 만났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반년쯤 지나 미요와 다시 마주쳤다. 미요는 밤인데도 교복을 입고 시부야의 센터 거리를 혼자 걷고 있었다. 앞으로 가로막는 나를 보고도 금방은 기억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노골적으로 '아뿔싸' 싶어 하는 표정을 짓고는, 헤실헤실 미소를 지어댔다."  (p.195 '머리빗과 사인펜' 중에서)

 

겨울은 왠지 모르게 여름보다 농밀하거나 균질한 시간들로 채워지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물론 청소년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동네의 말썽꾸러기들이 친구의 집에 모두 모여 엉뚱한 작당을 하거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거나, 춥고 어두운 거리를 이유도 없이 걷곤 했었다. 그러다 보면 길었던 밤은 온데간데없고 여느 날처럼 부옇게 해가 떠오르곤 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겨울밤은 매년 조금씩 길어져만 가는 듯하다. 가뜩이나 12월의 밤은 무리하게 길기만 하고, 독서로도 채울 수 없는 기나긴 시간이 부담스러운 나는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부르곤 한다. 길기만 했던 겨울밤도 언젠가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테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