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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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지만 삶의 실제와 자신의 바람은 늘 어긋나게 마련이다. 그것은 동물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들에게도 꿈이나 바람 같은 게 있는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성격이나 성향이 밝다고 해서 그의 삶도 늘 꽃길만 걸으라는 보장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손으로 셀 수 없는 숱한 부침의 날들을 겪다 보면 '내가 이러자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하고, '나는 어쩌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라 흐르는 시간을 아무런 걱정도 없이 그저 평화롭게 관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시봉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올해 만 네 살이 된 수컷 비숑 프리제다. 시봉이라고 부르면 알은척을 안 하고, 꼭 이시봉이라고 성까지 불러야지만 뒤돌아보거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리다는 종종 이시봉을 '노숙견'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시봉이 없는 자리에서 그랬다. 이시봉이 일 년 넘게 미용실을 가지 않아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도 '노숙자'라고 불러야 마땅하다(혹 모르지, 나 없는 곳에선 그렇게 부를지). 나 또한 일 년 넘게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심한 곱슬머리라서 크게 불편한 것은 없다."  (p.10)


이기호의 소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은 작가의 능청스러운 넉살과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실 우리나라 소설 대부분이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심하게 사실적이거나 문체와 구성 역시 지극히 점잖고 무거워서 독서의 목적이 현실로부터 살짝 비켜가거나 한 발 떨어져서 현실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는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현실과 이어진 끈을 놓지는 않되 소설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은 충분히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나의 바람이었다. 물론 독자들 개개인의 다양한 취향을 소설가가 일일이 맞춰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나의 이러한 바람에 비추어 볼 때 이기호의 소설은 꽤나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개들은 보이지 않는 희망에 들뜨지 않는다. 눈앞에 놓인 희망만 면밀히 관찰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그래서 그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도 서로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의 희망은 대부분 상대와 관계없이, 상대를 신경쓰지 않은 채, 자기 내부의 화학반응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대부분의 희망은 권태에서 온다). 그래서 그 희망이 좌절되었을 땐 상대를 아예 파멸로 몰고 가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면서도 상처받는 쪽은 되레 자기 자신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p.204)


소설은 20대의 청년 이시습의 가족과 반려견인 이시봉의 이야기다. 타이어 공장을 퇴사한 후 피자집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반려견으로 데려온 비숑 프리제 한 마리, 그것이 바로 이시봉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퇴근을 하던 아버지가 도로에 뛰어든 이시봉을 구하려다 교통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뜨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이 이시봉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이시봉을 냉대하고,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딱히 하는 일 없이 지내던 이시습은 술에 빠져 폐인처럼 지낸다. 반면 매사에 똑부러지는 성격인 여동생 이시현은 그와 같은 환경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외동딸로 자란 어머니가 외할머니의 병환으로 집을 비우게 되고, 시습, 시현 남매와 반려견만 남은 집에 반려견 교육 업체인 '앙시앙 하우스' 관계자들이 찾아온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시봉이 과거 유럽 왕실에서 기르던 고귀한 혈통의 후예라며 자신들에게 이시봉을 양도하면 거액의 돈을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시습이 집을 비운 사이에 이시봉을 돌봐주기로 했던 리다가 시습 몰래 '앙시앙 하우 사람들에게 이시봉을 넘기는데...


"실제로 우리집에서 팔 년째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 이름이 이시봉이다. 이시봉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이야기 하나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만 이렇게 길어지고 말았다. 소설은 강아지에 대해 말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장르일지 모른다. 하지만 강아지를 둘러싼 인간의 책임을 묻기엔, 여전히 유효한 장르이다."  (p.525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은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되면서 독자의 흥미를 북돋운다. 앙시앙 하우스의 대표인 정채민이 프랑스 유학 시절 만나게 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통한 비숑 프리제의 한국 유입,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번성했던 비숑 프리제, 즉 이시봉의 선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노조 활동을 하던 이시습의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고 이시봉을 반려견으로 데려오게 된 사연과 그 후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시봉의 선조에 대한 이야기도 일부 다른 책에서 참고한 것은 있으나 이 소설에 맞게 편집되고 각색되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시치미를 뚝 뗀 채 그 이야기가 마치 권위 있는 다른 책에서 인용된 것인 양 가상의 도서 제목과 저자를 표기하기도 한다. 왕실에서 보호되었던 이시봉의 선조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천일야화처럼 꾸며진 이야기이지만 책에서 인용된 것인 양 표기함으로써 권위를 갖게 된다.


업무 때문에 며칠 바빴던 나는 이제야 겨우 한시름 놓게 되었다. 젊었을 때는 힘든 일 하나를 처리하고 나면 뭔가 뿌듯하고 마음이 턱 놓이곤 했었는데 나이가 드니 그런 극적인 기분은 잘 들지 않는다. 오히려 뭔가를 빼먹거나 잃어버린 듯한 불안한 느낌도 괜스레 들고, 조만간 다른 큰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기도 한다. 그런 기분에서 벗어나고자 더 열심히 소설을 읽는지도 모른다. 억지로라도 나는 현실의 뜨뜻미지근한 기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때로는 아주 기쁘고, 때로는 아주 슬프기도 하면서, 때로는 사심 없이 웃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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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우리는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기보다는 지나온 과거가 손상되거나 파괴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노심초사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과거의 기억은 우리가 떠올릴 때마다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번 변형되고 재편집되며 오늘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특별한 노력을 경주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갈고 닦고 매만지면서 오랜 세월 동안 가꿔온 것이기에 그 기억이 어느 한순간 감쪽같이 사라지거나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짠 하고 등장하지나 앓을까 하는 불안,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기억을 끝없이 되새김질하게 됩니다.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한 사람의 편집자이자 제작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유일한 관객으로 초대하고자 함이라는 사실이 다른 영화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일지도 모릅니다.


어제는 군에 있는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오산에 다녀왔습니다. 간간이 비가 내렸고 때로는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아들을 차에 태워 집에 도착한 것은 생각보다 이른 시각이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공원묘지에 들렀는데 생각보다 많은 방문객들이 있어 조금 놀랐습니다. 추석은 아직 먼 느낌인데 말입니다. 저녁으로 피자헛에서 피자를 배달시켜 먹고 집을 나섰던 게 저녁 7시. 병장이 된 아들은 이제 군복을 입은 모습이 꽤나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아들을 부대에 내려주고 홀로 돌아오는 길은 무척이나 어두웠습니다.


김탁환의 산문집 <읽어가겠다>를 읽고 있습니다.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책이 처음 출간되었던 10여 년 전에도 나는 이 책을 읽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책에 대한 기억은 흐릿할 뿐 책의 내용은 온전히 새것인 양 남아 있는 게 전혀 없습니다. 뚝 떨어진 아침 기온으로 인해 가을을 실감하였던 나는 생텍쥐페리의 소설 <남방우편기>에 대한 김탁환의 생각을 읽은 후 책을 덮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잠깐 맑았던 하늘엔 다시 먹구름이 몰려와 어두워졌습니다. 아파트 뒤편 놀이터에는 엄마 아빠와 함께 나온 아이들이 까르르까르르 연신 웃음을 터뜨립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생텍쥐페리에겐 이런 거듭된 단절이 너무나도 강한 충격이었으니까, 삶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갈등이나 마찰은 충격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전쟁 전야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담담하게 출격 준비를 하는, 비행이 곧 자신의 직업인 존재들만이 갖는 특별한 감정에 근거하여, 생텍쥐페리는 삶과 사랑과 죽음을 바라봤던 것이겠지요."  (p.57)


더없이 좋은 계절에 우리는 괜스레 우울해지거나 그런 감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몇몇 이유를 가슴에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좋은 계절이 1년 중에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적다는 것과 이 아름다운 계절에 사랑하는 누군가와 영원한 이별을 경험했던 아픈 기억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올해의 가을이 극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지난여름이 너무나 무더웠던 탓일 테지요. 극과 극의 변화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지금은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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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단단하게, 채근담 - 무너지지 않는 마음 공부
홍자성 지음, 최영환 엮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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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책이 귀하던 시절에는 가정집을 상대로 책을 팔러 다니는 출판사 영업사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위인전이나 문학전집 등 값이 제법 나가는 전집류의 카탈로그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아이들이 있는 집의 부모님을 상대로 책의 장점을 설명하는 것은 물론 어떻게든 책이 팔릴 수 있도록 읍소전략이든 강매든 온갖 방법을 동원하곤 했었다. 전집류는 주로 할부 판매로 이루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할부가 끝나기도 전에 이사를 가는 바람에 남은 대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물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책을 판매했던 영업사원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영업사원을 통한 전집류 구매가 많았던 까닭에 책은 주로 그 집의 부와 고상함을 드러내는 장식용이었을 뿐 아이들의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히려 전집에 딸려 오던 단행본이 아이들에게는 더 인기가 있어서 전집은 새것처럼 깨끗한데 반해 단행본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너덜너덜 찢겨나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렇게 전집에 끼워 일종의 서비스처럼 나갔던 책으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채근담'을 꼽는다. 그 어린 나이에 의미도 모른 채 읽었던 '채근담'은 그 시절의 내게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데 얼마나 큰 몫을 담당했던지...


"158

나를 낮추지도, 높이지도 말고 중심에 머물라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 지닌 내면의 가치를 외면한 채 바깥의 시선과 인정만을 좇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무한한 보물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남이 주는 인정이나 가짜 성공에 의존하려는 모습은 마치 부잣집 자식이 자신을 거지로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p.187)


인문학자 최영환이 엮은 <고요하고 단단하게, 채근담>을 읽었던 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나를 추억하기 위한 일종의 소환 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어느 때보다 책에 집중하여 읽었다.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과연 이 구절을 그 시절에도 읽었었나?' 하는 의문을 품은 채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오래도록 멈추어야만 했었다. 나의 기억 속에 꽁꽁 숨겨둔 '채근담' 속의 문장을 찾아 헤매느라 나는 숨바꼭질의 술래가 된 기분으로 희미한 기억을 고샅고샅 훑었던 것이다. 책을 매개로 과거로의 추억여행을 떠나는 것은 언제든 즐거운 일이다. 삶이란 필요한 것을 언제든 새로 배우는 일이지만 잊었던 것을 필요할 때마다 반복하여 재생하는 지루한 작업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235

찰나 속의 가치는 허무하다

사람은 찰나의 삶 속에서도 우열을 다투고, 사소한 것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마치 돌에서 튀는 불꽃처럼 순간일 뿐이며, 그 안에서의 경쟁이나 다툼은 결국 무의미한 허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광활하고 인생은 짧은데, 달팽이 뿔처럼 좁은 시야 안에서 누가 높고 낮은지를 따지는 일은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p.266)


명나라의 문인 홍자성에 의해 쓰인 <채근담>은 동양의 탈무드로 불리면서 예나 지금이나 삶의 지침서 역할을 하는 뛰어난 잠언서이다. <채근담> 속 마음에 드는 한 구절을 붙잡고 사색에 젖다 보면 우리가 겪는 삶의 고통도 조금씩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한 고비를 넘고 해를 넘기다 보면 어느덧 자신이 지나온 인생을 반추하는 시기에 이르고 만다. 어쩌면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책은 그렇게 많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단 한 권의 책만 있어도 자신이 정한 방향으로, 결코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채근담>은 그런 책이다. 


"347

맑게 살아가는 단단한 품격

삶이란 무엇을 좇느냐에 따라 그 깊이와 향기가 달라집니다. 겉으로 보기엔 가난하고 투박한 삶일지라도, 그 안에 고요함과 진실한 본성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삶입니다."  (p.380)


책상 위에 널브러진 종이쪽들을 간추리듯 어수선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채근담>만 한 책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성인이 되기 전에는 그 의미를 깨닫기 어렵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말이다. 요즘에는 이 책처럼 <채근담>의 의미를 풀어서 해석해 놓은, 일종의 해설서이거나 저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 에세이와 같은 책들이 많이 출판되는지라 어린 나이에도 <채근담>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는 얼마든지 있는 듯하다. 비가 내린 후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낮에는 여전히 덥고 끈끈한 습기가 몸에 들러붙지만 가을의 조짐은 곳곳에서 보이는 듯하다. 삶의 의미를 곰곰 되짚어보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고요하고 단단하게, 채근담>은 다소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던 <채근담>을 우리 곁으로 한 발짝 다가서게 하는 책이다. 지금 누군가 이 책을 펼쳐 읽는다면 책을 덮는 그즈음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통하여 우리네 가슴에 삶의 의미가 아름답게 단풍 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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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벙하고 고요해지면서
이택민 지음 / 책편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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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밤을 보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조금 슬픈 내용의 꿈을 꾸었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에서 깬 나는 침대 주변을 잠시 서성였다. 그러나 한 번 달아난 잠은 좀체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몇 번을 뒤척이다 나는 결국 독서등을 켜고 책을 읽었다.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얼마나 책을 읽었던 것일까. 독서등을 끄고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듯 몸이 찌뿌둥했다. 아침 운동을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몇 번을 고민하다 어렵게 집을 나섰다. 몸도 마음도 서글픈 아침이었다.


"동네 한 바퀴를 뛰다 보면 러너스 하이를 느낀다. 강을 따라 페달을 굴리다 보면 라이딩 모드가 켜지곤 한다. 마찬가지로 수련을 하다 보면 첨벙하고 고요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러너스 하이도, 라이딩 모드도, 첨벙하고 고요해지는 마음도 대번에 찾아오지 않는다. 힘이 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지쳐서 그만두고 싶을 때, 더 이상 시도치 못할 것 같을 때, 파도처럼 한꺼번에 닥쳐온다."  (p.172 '저자의 말' 중에서)


요가에 관련된 에세이를 읽었던 건 이번이 두 번째이지 싶다. 신경숙 작가의 에세이 <요가 다녀왔습니다>를 읽었던 게 첫 번째, 표절 논란으로 잠시 휴지기를 가졌던 작가가 15년 넘게 한 요가에 마음을 담아 펴낸 이 에세이를 읽는 동안 나는 왠지 모르게 삶이 참 덧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후 3년이 흘렀다. 나는 다시 이택민 작가의 요가 에세이 <첨벙하고 고요해지면서>를 읽었다. 내가 딱히 요가에 관심이 있거나 주변에서 요가를 배우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고등학교 시절 잘 아는 스님으로부터 참선을 배웠던 나는 도시 생활에 지치고 힘들 때마다 요가라도 한 번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던 것이다.


"지인의 추천으로 동네의 요가원을 알게 되었다.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고 남성도 이용할 수 있다는 말에 관심이 갔다. 한 번쯤은 요가를 배워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도 언제부턴가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요가원에 연락하고 수강권을 끊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낯설고, 어색하고, 잘하지도 못할 텐데... 그냥 혼자 할 수 있는 러닝이나 계속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에 앉아 에세이 수업 커리큘럼을 작성하는데 불현듯 요가 생각이 났다."  (p.13)


요가를 처음 접한 작가가 요가원에 다니면서 느끼고 체험했던 일상을 책으로 엮은 것이지만, 책의 내용은 일상을 담은 일기처럼 편안하게 읽힌다. '요가 체험기' 또는 '요가 수련기'일 수도 있는 이 책이 이렇게 편안하게 읽히는 까닭은 요가와 우리의 일상이, 요가와 글쓰기가 서로 동떨어지지 않고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근력이 약해지는 것은 물론 그보다도 먼저 유연성이 떨어져 다치기 쉽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말하자면 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진다는 것인데 나 역시 실감하는 부분이다. <첨벙하고 고요해지면서>를 쓴 이택민 작가의 나이를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적은 나이가 아닐 것으로 추측한다. 요가가 필요했던 까닭도, 용기를 내서 요가원을 찾아간 것도 작가의 몸이 원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삶이라는 칠판이 빼곡해질 때까지 수련을 이어가다 보면 나는 나만의 풀이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그 답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정답이 아닐지라도, 오직 나에게만은 안성맞춤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린 모두 저마다의 난제가 주어진 삶을 살고, 그 해답은 오직 자기 내면 안에 은밀하게 존재한다. 비록 넉살이 말한 "정답들 사이에 더 인기 있는 오답"은 못될지라도, 나는 나만의 보폭으로 요가와 글을 통해 천천히 나의 난제를 풀어나갈 것이다."  (p.168~p.169)


가뜩이나 힘든 월요일, 간밤에 잠을 설쳐 몸이 영 맥을 못 추는 나는 점심을 먹은 후에도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술도 못 마시는 내가 숙취에 시달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날이면 유난히 요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더 깊게 든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과의 접촉을 마냥 꺼리는 나의 성격 탓에 그런 생각들은 그저 생각으로만 그칠 뿐 실행에 옮겨진 적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따금 요가를 생각하고 언젠가 요가원에 들러야겠다 결심하기도 한다. 짝사랑 앞에서 수줍어하는 고등학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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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이 이용하는 공공시설에는 언제나 소위 '빌런'이라고 불리는 악당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지하철 빌런이나 아파트 지하 주차장의 주차 빌런도 있다. 게다가 일반인은 잘 알지 못하는 특이한 빌런들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분노를 유발하기도 하고, 가짜 화재 신고나 112 신고를 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개중에는 처벌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는 빌런들의 활약(?)은 여전히 뜨겁다. 심지어 어떤 이는 원고 투고 후 매일 출판사에 전화를 하는, 이른바 원고 투고 빌런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니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어제는 모처럼 도서관 나들이를 갔었다. 자주 가다 보니 도서관 직원들은 대체로 낯이 익은데 그중 한 분과 잠깐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분 왈, 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는 것처럼 매일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으로 인한 민원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반바지 차림에 가방을 메고 나오는 그 사람은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슬리퍼로 갈아 신고 미리 예약한 컴퓨터 좌석에 앉아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한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뭐 그렇다 치는데 문제는 그다음,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던 그 사람은 한쪽 발을 다른 쪽 무릎에 올려 놓고 발바닥을 주물럭거리곤 하는데 그 손으로 컴퓨터 자판을 만지기도 하고, 자세를 삐딱하게 앉아 옆 좌석의 사람과 종종 마찰을 빚기도 한다는 것. 게다가 조금 덥다 싶은 날에는 화장실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기도 하고, 발을 씻기도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현장을 목격한 다른 이용자들이 직원에게 자주 신고를 한다는데, 그때마다 주의를 줘도 막무가내라는 얘기였다. 연세도 많이 든 어르신이라 심하게 말을 할 수도 없으니 직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참 별별 사람도 많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사람은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내가 매일 아침 오르는 산의 능선에 놓인 운동기구, 소위 '산스장'에도 올여름에 나타난 빌런이 있다. 나이도 지긋한 그분 역시 빌런으로서의 모든 재능을 갖추고 있다. 다른 이의 눈치를 보지 않는 능력도 탁월하고, 막무가내 고집불통의 재능도 우수하다. 민소매 운동복 차림으로 산스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산스장에 하나뿐인 역기를 독차지한다. 모기를 쫓기 위해 준비한 스프레이로 주변을 정리하고, 누운 자세로 역기를 몇 번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한 후 그 자리에 앉아 다른 이는 그 시간에 역기를 할 수 없게 만든다. 몇 발자국 옆에는 벤치도 있는데 그분은 도통 움직일 생각이 없다. 그렇게 역기를 전세 낸 채 몇십 분을 보낸다. 출근 때문에 기다릴 수 없는 나는 역기 대신 다른 운동(팔굽혀펴기와 같은)을 하고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다. 역기 옆의 작은 공터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는 어르신들도 그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역기 거치대에 앉아 도통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산스장의 빌런으로 등극하신 그분도 이따금 피곤한 탓인지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아침에 만나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기는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마주치는 빌런들에게는 몇몇 공통된 특징이 있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데 조금 어려운 점이 있거나 제대로 된 공공의식을 교육받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른바 사회성이 뒤떨어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원시부족사회에서 살다가 많은 규칙과 법이 존재하는 문명사회로 어느 날 갑자기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불쌍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 화를 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우리는 지금 수많은 빌런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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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5-09-14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고시공부 하던 시절에 돈이 없어서 신림9동 도서관에서 공부했는데 그때 기억이 납니다. 대체 몇년판인지 모를 오래된 법서 잔뜩 쌓아놓고 있던 초로의 수험생... 지금도 거기 있을까 모르겠네요.

꼼쥐 2025-09-15 16:17   좋아요 0 | URL
그분은 아마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겠죠. 그 자리를 다른 빌런이 대체하고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미림여고 올라가는 그 길이 눈에 선하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