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고 단단하게, 채근담 - 무너지지 않는 마음 공부
홍자성 지음, 최영환 엮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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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책이 귀하던 시절에는 가정집을 상대로 책을 팔러 다니는 출판사 영업사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위인전이나 문학전집 등 값이 제법 나가는 전집류의 카탈로그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아이들이 있는 집의 부모님을 상대로 책의 장점을 설명하는 것은 물론 어떻게든 책이 팔릴 수 있도록 읍소전략이든 강매든 온갖 방법을 동원하곤 했었다. 전집류는 주로 할부 판매로 이루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할부가 끝나기도 전에 이사를 가는 바람에 남은 대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물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책을 판매했던 영업사원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영업사원을 통한 전집류 구매가 많았던 까닭에 책은 주로 그 집의 부와 고상함을 드러내는 장식용이었을 뿐 아이들의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히려 전집에 딸려 오던 단행본이 아이들에게는 더 인기가 있어서 전집은 새것처럼 깨끗한데 반해 단행본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너덜너덜 찢겨나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렇게 전집에 끼워 일종의 서비스처럼 나갔던 책으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채근담'을 꼽는다. 그 어린 나이에 의미도 모른 채 읽었던 '채근담'은 그 시절의 내게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데 얼마나 큰 몫을 담당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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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낮추지도, 높이지도 말고 중심에 머물라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 지닌 내면의 가치를 외면한 채 바깥의 시선과 인정만을 좇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무한한 보물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남이 주는 인정이나 가짜 성공에 의존하려는 모습은 마치 부잣집 자식이 자신을 거지로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p.187)


인문학자 최영환이 엮은 <고요하고 단단하게, 채근담>을 읽었던 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나를 추억하기 위한 일종의 소환 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어느 때보다 책에 집중하여 읽었다.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과연 이 구절을 그 시절에도 읽었었나?' 하는 의문을 품은 채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오래도록 멈추어야만 했었다. 나의 기억 속에 꽁꽁 숨겨둔 '채근담' 속의 문장을 찾아 헤매느라 나는 숨바꼭질의 술래가 된 기분으로 희미한 기억을 고샅고샅 훑었던 것이다. 책을 매개로 과거로의 추억여행을 떠나는 것은 언제든 즐거운 일이다. 삶이란 필요한 것을 언제든 새로 배우는 일이지만 잊었던 것을 필요할 때마다 반복하여 재생하는 지루한 작업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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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 속의 가치는 허무하다

사람은 찰나의 삶 속에서도 우열을 다투고, 사소한 것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마치 돌에서 튀는 불꽃처럼 순간일 뿐이며, 그 안에서의 경쟁이나 다툼은 결국 무의미한 허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광활하고 인생은 짧은데, 달팽이 뿔처럼 좁은 시야 안에서 누가 높고 낮은지를 따지는 일은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p.266)


명나라의 문인 홍자성에 의해 쓰인 <채근담>은 동양의 탈무드로 불리면서 예나 지금이나 삶의 지침서 역할을 하는 뛰어난 잠언서이다. <채근담> 속 마음에 드는 한 구절을 붙잡고 사색에 젖다 보면 우리가 겪는 삶의 고통도 조금씩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한 고비를 넘고 해를 넘기다 보면 어느덧 자신이 지나온 인생을 반추하는 시기에 이르고 만다. 어쩌면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책은 그렇게 많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단 한 권의 책만 있어도 자신이 정한 방향으로, 결코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채근담>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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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게 살아가는 단단한 품격

삶이란 무엇을 좇느냐에 따라 그 깊이와 향기가 달라집니다. 겉으로 보기엔 가난하고 투박한 삶일지라도, 그 안에 고요함과 진실한 본성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삶입니다."  (p.380)


책상 위에 널브러진 종이쪽들을 간추리듯 어수선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채근담>만 한 책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성인이 되기 전에는 그 의미를 깨닫기 어렵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말이다. 요즘에는 이 책처럼 <채근담>의 의미를 풀어서 해석해 놓은, 일종의 해설서이거나 저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 에세이와 같은 책들이 많이 출판되는지라 어린 나이에도 <채근담>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는 얼마든지 있는 듯하다. 비가 내린 후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낮에는 여전히 덥고 끈끈한 습기가 몸에 들러붙지만 가을의 조짐은 곳곳에서 보이는 듯하다. 삶의 의미를 곰곰 되짚어보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고요하고 단단하게, 채근담>은 다소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던 <채근담>을 우리 곁으로 한 발짝 다가서게 하는 책이다. 지금 누군가 이 책을 펼쳐 읽는다면 책을 덮는 그즈음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통하여 우리네 가슴에 삶의 의미가 아름답게 단풍 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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