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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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배수아의 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것은 한 권의 소설입니다!'라고 큰소리로 선포해야 할지도 모른다. 소설이라는 단어에 굵게 밑줄을 긋거나 소리를 높여 강조할 필요도 있을 테고 말이다. 스토리도 목차도 없는 소설이 그 자체로서 소설의 절대성이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을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것은 '배수아'라는 소설가에 대한 의구심인 동시에 의식의 흐름에 대한 자유분방한 기술 또는 가늠하기 힘든 생각의 방향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면밀한 탐구쯤으로 정의하기로 하자. 일단은.


"정신적 빈곤과 경박함은 곧 죽음과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은 M의 생각이었다. 진지한 시선이 결여된 정신은 부패하는 고기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실제로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에 앞서서 추상적인 개념으로 우리 삶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점유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말한다면,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p.69)


소설의 화자인 '나'는 독일에 체류하던 한때 M을 사랑했고, 그와 헤어진 후 다시 찾은 독일에서 요하임이라는 친구의 집을 방문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한다. 성탄절 전날에 요하임의 어머니 집을 방문하거나 연말에 대학생들이 모이는 파티에 참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일상은 소설의 어떤 사건이나 결말을 구성하기 위한 전제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스쳐갈 뿐이다. 다만 그와 같은 일상의 소일거리 속에서 문득문득 M에 대한 기억들이 개입한다. M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조금씩 확장되다가 글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작가는 M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의 줄기로 삼아 음악이나 언어 또는 죽음과 같은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풀어놓고야 만다. 결국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다루는 듯하던 이야기는 일상 속으로 용해되고 M과 '나' 혹은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예술적 주제들에 대한 견해나 관점이 글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혹은 M을 위해서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현악기 연주를 했어야만 했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  (p.144)


배수아의 소설에 빠져드는 이유는 단 하나, 의식과 의식 저편의 경계에서 소설이 펼쳐지고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냉랭한 현실의 감각을 쉽게 잊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책을 읽는 아주 잠깐의 시간만큼은 말이다. 밀란 쿤데라의 어느 작품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우리는 그런 느낌을 공유할 수 있지만 배수아는 이보다 한 발 더 깊이 들여놓아도 괜찮다고 독자들을 유혹한다. 그것은 때로 마약과 같은 중독성을 동반한다. 배수아의 소설을 접했던 독자라면 그녀의 작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결별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상 앞에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페터 한트케의 말처럼,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p.174)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는 달콤하다. 그러나 단맛은 언제나 순간적인 감각일 뿐 영원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소설에서도 언급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음악은 언어가 탐구하지 못한 인간 신체의 다름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의 서툰 연주가 가을의 햇살 속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은 언어로만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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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게 따져볼 일이 있다. 예컨대 나훈아의 무료 콘서트가 열렸고 그곳에 갔던 다수의 노인들이 압사당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에도 위패와 영정 사진도 없이 국화꽃만 가득한 분향소를 설치할 것인지... 그분들의 이름이나 사진을 공개하면 패륜이라고 강하게 비난하면서 이를 공개한 언론들을 고발할 것인지... 내 생각에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번 '10.29 참사' 희생자들은 왜 그런 식으로 대접했을까? 여기에는 정부와 여당의 분명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강력하고도 확실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에이, 이름이나 사진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정부에 유리한 게 뭐 있겠어?' 하고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음모가 음모다워지기 위한 전제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두에서 제시했던 가정으로 돌아가 보자.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정부와 지자체는 물론 모든 언론을 통하여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발표하고 약간의 위선이 섞였을지언정 진심 어린 애도 분위기를 조성하려 애쓸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발생한 '10.29 참사'와 무엇이 다른 것이기에 이런 추측이 가능한가? 단지 희생자의 나이만 다를 뿐인데...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와 지자체 또는 행안부와 경찰, 소방 등의 책임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단지 희생자의 나이가 젊고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대하는 대우가 이토록 달라진다는 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닌가. 게다가 노인들이 왜 쓸데없이 그런 곳에 가서 그런 사달을 일으켰느냐고 말한다면 그 사람을 오히려 패륜이니 망언이니 하고 나무랄 게 분명하다.


이와 같은 논지에서 젊다는 건 하나의 '죄'이자 유족들에겐 '천형'일 수밖에 없다. 사실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한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임이 분명한데 모든 잘못을 희생자 본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유족들 또한 자신의 아들, 딸들이 하필이면 그날, 쓸데없이 그곳에 가서 값싼 죽음을 당한 것일 뿐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주장할 것도, 그렇다고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 떠벌릴 일도 아니라는 의식을 갖게 한다. 말하자면 희생자의 신분이 밝혀짐으로써 인터넷상에 떠돌게 될 여러 가짜 뉴스와 악성 댓글이 두려워지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인식은 희생자의 이름이 익명으로 처리됨으로써 더욱 공고하게 유지되거나 강화된다. 희생자의 신분이 밝혀지고 여러 가짜 뉴스가 떠돌 경우 그것은 정부가 앞장서서 지켜주고 보호할 일이지 유족들이 떠안을 고통이 아님에도 현 정부의 태도로 보아하니 그럴 것 같지 않은 것이다. 유족들은 그게 두려운 것이다. 어차피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닌데 조용히 덮어두는 게 그들로서는 최상의 방책인 듯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정부와 지자체는 면죄부를 얻고 지지율 하락이나 국민들의 분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고맙게도 말이다. 물론 희생자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국민들 역시 희생자들을 쉽게 잊을 수 있을 테고.  이처럼 강력한 효과가 있는데 굳이 희생자의 신분을 노출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입장에서는 어떤 협박이나 핑계를 대서라도 막아야 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오늘은 대입 수능일. 연말이면 다시 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예비 성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테다. 우리는 그들에게 죄책감을 담아 충고할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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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2-11-18 0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길가다 이런 어이없는 죽임을 당해도 죽었다 말 할수없고 책임 지지도 않으며 알아서 살아가야하는 독재의 나라를 6개월만에 만들어내는 똥멍청한능력은 세계최고네요.
아직 1567일남았어요. 제발 이 날짜가 빨리 줄어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꼼쥐 2022-11-19 16:26   좋아요 1 | URL
그렇게 긴 시간을 견딜 수나 있을지 걱정입니다. 차라리 그 전에 뭔 수를 내지 않으면 국민들이 먼저 죽지 않을까 싶은데 말입니다.
 
위안이 된다는 것 -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
안셀름 그륀 지음, 황미하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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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그렸지만 본인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얼굴입니다. 얼굴에는 자신의 삶의 이력이 그려집니다. 자연스러움은 이처럼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를 모두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지식이 너무나 얕고 보잘것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삶에서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입니다. 온갖 부조리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를 주저앉히는 좌절과 낙담, 슬픔과 분노... 위로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정작 위로가 필요치 않은 시기에는 위로가 없었던 것처럼 위로가 넘쳐난다는 건 또 한편으로 슬픔과 분노 혹은 좌절과 낙담이 넘쳐난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위로를 가장한 거짓 위로가 세상을 장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 없는 빈 밭에는 밀알의 싹보다는 잡초만 무성한 것처럼 말이지요.


"일부 그리스도교 단체들도 상업 광고처럼 그러한 구호를 내걸면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신앙인들로 구성된 자기네 공동체 안에서 위안을 얻게 될 거라고 약속합니다. 그 단체들이 자신들의 약속을 이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놓고도 늘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큰 도움을 주는 긴밀한 관계, 결속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게 될 거라고 피상적으로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더 심오한 것입니다."  (p.40)


세계적인 영성 심리 상담의 대가인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저서 <위안이 된다는 것>을 구매했던 시점은 '10.29 참사' 직후였습니다. 최근의 일이지요.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좁은 골목길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에게도,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국민들에게도 진정한 위로를 건네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국정을 책임지는 관료들의 생각은 '시간이 가면 금세 잊힐 일인데 뭐 그리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것일 테지요. 적당히 애도하고 밑선에서 몇 명 책임자를 처벌하면 가족을 잃은 유족들도, 일시적으로 분노하는 국민들도 그 위세가 금세 잠잠해지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을 되찾게 될 것이라는 게 그들의 판단인 듯합니다. 그러나 깊은 슬픔은 가슴에,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깊은 생채기를 남길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새살이 돋고 그리운 이를 가슴에 묻을 때까지 말입니다.


"울음은 쌓이고 쌓여서 터져 나오는 감정에서 우리의 짐을 덜어 줍니다. 눈물은 고통을 완화시킵니다. 펑펑 울고 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울음은 누군가를 제압하고 그에게 과도하게 요구하는 듯한 고통을 견뎌 내게 하고 그에게 답해 주는 유일한 방법이 됩니다. 우리 인간은 울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 울면서 자기를 내려놓는 것, 그러면서 고통을 허용하고 그 방향을 돌리거나 사라지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답을 더 이상 알지 못합니다. 말로도, 몸짓으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p.218)


책의 부제인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륀 신부님의 의도는 명백합니다. 어떻게든 지금의 슬픔이나 좌절에서 벗어나 남은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어쭙잖은 말로 생색을 내거나 아는 체를 한다는 건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장 '빗나간 위로', 2장 '결속감에서 얻는 위로', 3장 '아름다움 속에 깃든 위안', 4장 '자연이 주는 위안', 5장 '몸과 영혼에 생기를 북돋아 주는 위안', 6장'내적 원천의 힘', 7장 '기도가 주는 위로'의 목차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위안을 얻습니다. 포옹이나 대화, 독서, 음악, 그림, 자연, 산책, 반려동물, 운동, 낮잠, 걷기, 목욕, 기억, 유머, 고요, 기도 등 신부님이 제시하는 위안의 방법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친밀한 사람이 당신과 대화를 나눈 뒤 위로를 받고 떠나간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도 굳세게 할 겁니다. 위로, 위안은 이 불확실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 모두에게 든든한 토대를 마련해 줍니다. 이 토대 위에서 우리는 자신을 향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서로 마주보며 똑바로 설 수 있습니다."  (p.292 '맺음말' 중에서)


우리는 종종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와 같은 꼰대질을 지금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내뱉곤 합니다. 습관화된 자기 과시와 자기 피알의 시대에 위로마저 형식적으로 흐르는 듯하여 씁쓸하기만 합니다. 결국 우리는 마음과 마음이 다가가는 방법을, 체온과 체온으로 위로하는 방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세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시 '놀다'에는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괴로움을 견디느라 괴로움과 놀고/ 슬픔을 견디느라 슬픔과 놀고/ 그러다가/ 노는 것도 싫어지면/ 싫증하고 놀고......”(「놀다」 전문) 싫증하고 놀 수 있는 날은 아마도 머나먼 미래가 될 듯합니다. '10.29 참사'를 잊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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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심한 멧돼지의 복수


그해 나는 리더 멧돼지가 되었다. 나를 지지하는 뒷골목 똘마니들의 단합과 응원 덕분에 어찌어찌 뒷골목을 통솔하는 총장 멧돼지에 오르기는 했었지만 나의 출세는 거기에서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스승인 천공(千空) 멧돼지의 적극적인 출마 권유가 나와 아내 멧돼지의 마음을 움직였고, '설마 되겠어?'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일단 출마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게다가 천공이 누구던가! 건강 관리를 잘하는 멧돼지의 평균 수명이 17~20년인 걸 감안할 때 평생 천 개의 구멍(空)을 판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는데 15세인 천공 멧돼지는 이미 950공(空)을 넘어 천공(千空)을 목전에 둔, 가히 멧돼지계의 전설로 불리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멧돼지의 습성상 눈만 뜨면 땅을 파는 여느 멧돼지와는 달리 그를 찾는 많은 멧돼지들을 상대하면서도 구멍을 뚫는 성과면에서는 다른 멧돼지들을 월등히 앞서가는 걸 보면서 우리와 같은 보통의 멧돼지들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많은 멧돼지들이 그를 칭하여 "가히 천공(千空)이로고!" 하는 감탄을 쏟아냈던 것이다. 그런 분이 나의 출마를 권유했을 뿐만 아니라 리더 후보들이 등장하는 토론장에 나갈 때면 친히 나의 네 발에 왕(王) 자를 써주기까지 했으니 나로서는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상대 후보를 가까스로 물리치고 리더 멧돼지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6개월이 지났다.


며칠 전에는 리더 멧돼지 관사로 이사를 했다. 남산 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곳이지만 식구라고는 아내 멧돼지와 비상식량이자 도시락 대용으로 키우고 있는 강아지 몇 마리가 전부이니 이전 리더가 살았던 북악산 밑의 관저가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리더 멧돼지를 보호하기 위해 상주하는 많은 멧돼지들의 북적거림으로 인해 그곳에서는 적어도 지금과 같은 정적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 머리를 맴돌았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아내 멧돼지의 히스테리성 발작이 점점 더 심해지는 걸 보면 이곳으로의 이사는 나에게나 아내 멧돼지에게나 결코 이롭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진작 천공 스승을 찾아뵙고 상의를 드릴 걸...'


나는 사실 겁도 많고 소심하며 누구보다도 이기적이며 속 좁은 멧돼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런 성격이 형성된 데에는 아버지 멧돼지의 영향이 컸다. 유년 시절 나는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모든 것을 아버지 멧돼지의 계획에 따라야만 했었는데 이런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멧돼지에게 대들거나 반항하지 못했다. 그것은 순전히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리더 멧돼지가 된 후 내가 했던 모든 연설에서 '자유'를 역설했다. 그것은 어쩌면 자유를 누리지 못한 어느 멧돼지의 분노이자 넋두리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약간의 분노조절장애가 있던 나는 나약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선공(先攻)이라고 믿게 되었다.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은 나는 일명 '선빵'을 통하여 나를 증명했고, 내 편에 서는 멧돼지는 누구나 진심을 다해 애정을 쏟았다. 그것이 어쩌면 적자생존의 멧돼지계에서 겁 많고 소심했던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생존전략이었는지도 모른다. 리더 멧돼지가 된 뒤에도 나는 나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멧돼지란 멧돼지는 모두 제거해버렸다. 전임 정권에서 뒷골목의 총장(총대장이라는 의미)을 지냈던 나는 당시 차기 리더로 지목되었던 한 인물을 잔인하게 도륙했고, 그 결과 그의 가족 전체가 재기불능의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에도 일부 멧돼지들은 너무 잔인하다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반대하기도 했었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철저히 응징해야 한다는 걸 나는 일찌감치 어둠의 세계에서 배워 익혔었다. 그것을 일부 소문 멧돼지들이 나의 행동을 두고 정의롭다며 추켜세웠고 나의 이미지는 그렇게 굳어졌다. 집요함은 끈질기다로, 잔인함은 정의롭다로...


겁 많고 소심한 성격인지라 만성 변비와 소화불량을 달고 사는 통에 아무데서나 방귀를 뿡뿡 뀌는 건 막을 수가 없다. 다른 멧돼지들은 내가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까닭에 어린 인간들이나 하는 도리도리를 따라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껴왔던 나로서는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하여 사방을 훑어보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졌던 것인데 남 말 하기 좋아하는 멧돼지들이 도리도리로 표현했을 뿐이다.


일기를 처음 쓰다 보니 말이 길어졌다. 다음 일기에서는 나의 영역인 용산에서의 일상을 써보기로 한다.


*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히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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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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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좋은 생각이란 여러 생각의 흐름에서 생각 하나가 어쩌다 내 의식의 갈고리에 얻어걸리는 기막힌 우연의 결과일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달아나려는 생각을 꼭 붙잡고야 말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좋은 생각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진배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좋은 생각이 내 의식의 그물에 걸려들 때는 주로 산을 걷거나, 멍하니 넋을 놓고 있거나, 음악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한마디로 자신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게 되는 그런 순간이다. 말하자면 좋은 생각이란 나조차도 내려놓은 찰나와 같은 순간에 번개가 치듯 전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아무리 새롭고 재미있는 일도 몇 번 반복되는 순간 쉽게 질리고 마는 성마른 내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아침 산행을 이어오게 된 것도 어찌 보면 걷기에서 얻을 수 있는 그와 같은 큰 혜택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람은 크든 작든 짐을 지고 있다. 단, 그 짐은 옆에서 보면 내려놓으면 될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색한다. 그것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p.346)


우리에게 <고백>을 쓴 추리소설 작가로 잘 알려진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휴식이나 쉼의 의미로 읽힐 수 있는 책이다. 가벼운 배낭을 메고 동네 뒷산의 평탄한 길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가볍게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책인 것이다. 결말에 대한 아무런 힌트도 없이 추정할 수 있는 어떤 작은 단서조차 꽁꽁 숨겨야만 하는 추리소설 작가가 이처럼 책을 이해하기 위한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작가의 의도를 너무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중 소설을 쓴다는 건 작가의 능력을 가늠케 하는 기분 좋은 반전이다.


“산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다만, 누가 다치기보다는 치유되는 이야기요.”
_미나토 가나에 (출간기념 인터뷰에서)


책은 '묘코 산', '히우치 산', '야리가타케', '리시리 산', '시로우마다케', '긴토키 산', '통가리로', 가라페스에 가자' 등 8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직장 동료이지만 다소 어색했던 두 사람(리쓰코와 유미)이 산을 오르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의 묘코 산, 우연히 참가한 단체 미팅에서 만난 커플(간자키와 미쓰코)이 등산 데이트에 나서는 내용을 다룬 히우치 산, 야리가타케 정상 도전에 번번이 실패한 '나'는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결심으로 세 번째 정상 도전에 나섰지만 우연히 만난 중년 커플로 인해 방해를 받는다는 내용의 야리가타케, 서른다섯의 독신 번역가이자 아버지의 양파 농사를 돕고 있는 미야카와 유미가 의사 남편을 둔 언니의 제안으로 동반 등산에 나선다는 내용의 리시리 산, 리시리 산에 올랐던 유미가 이번에는 언니와 그녀의 딸인 나나카까지 동행하여 등산에 나서는 시로우마다케, 남자 친구인 다이스케와 산에 오르는 마이코의 이야기가 담긴 긴토키 산, 웹사이트 '여자들의 등산일기'에 모자를 만들어 팔고 있는 유즈키가 뉴질랜드 트래킹 투어에 참가한다는 내용의 통가리로, 언니와 함께 리시리 산과 이어서 시로우마다케에 오른 후 본격적인 등산 계획을 세울 겸 등산 친구를 사귀기 위해 등산 페스티벌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가라페스에 가자' 등 시종일관 소설은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그들만의 고민과 인생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의 산문집 <걷기 예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발걸음을 앞으로 밀어내는 것은 그 무시무시한 괴로움의 씨앗이 아니라 자기 변신, 자기 버림의 요구,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길과 몸을 한 덩어리로 만드는 연금술을 발견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여기서 인간과 길은 행복하고도 까다로운 혼례를 올리며 하나가 된다."  우리는 어쩌면 그날이 그날 같았던 지난날의 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즐겁고도 가벼운 그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산에 오르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의 인생에 비슷한 장면이 몇 번이나 등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이 놀고 싶으면 끼워달라고 하면 그만이고, 다른 그룹 아이들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면 참가하면 되는데,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을 뿐. 나는 외려 누가 귀 기울여 듣느냐는 듯 관계없는 책을 펼치는 그런 아이였다."  (p.363)


반짝 추웠던 날씨가 풀리자 미세먼지가 극성이다.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지난밤 개기월식을 보면서 대학 기숙사에 있는 아들과 전화 통화를 했었다. 아들도 역시 도서관 옥상에서 개기월식을 구경하고 있다고 했다. 붉게 변하던 달이 점차 흐려지더니 마침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생도 저 달과 다르지 않겠지?' 생각했었다. 친구들과 함께 개기월식을 보고 있었다는 아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기에는 아들에게 남은 시간이 너무도 많은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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