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그동안 읽었던 책을 선별하여 다시 읽고 있다. 
나의 선택을 기다리며 다소곳이 꽂혀있는 책들을 바라볼 때면 뭐랄까?  무소불휘의 권력을 지닌 어느 임금이 자신의 맘에 드는 후궁을 간택하는 기분이랄까?  그럴 때마다 나는 괜스레 달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구입한 책을 처음 펼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일면식이 있는 지인을 만나는 듯한 편안한 기분.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새로운 느낌.  책의 중간중간에 꽂힌 익숙한 필체의 메모지와 가지런히 그어진 밑줄들.  잘 갈무리된 추억들이 내 품에 달려와 안긴다.
어쩌면 영영 잊혀진 채 세월따라 켜켜이 먼지만 쌓일뻔한 책들이 내 손길이 닿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는 듯하다.  처음에 미쳐 몰랐던 새로운 의미를 새록새록 느끼는 재미도 쏠쏠하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고 했던가.
공자가 주역을 즐겨 읽어 책의 가죽 끈이 3번이나 끊어졌다는데, 나는 그동안 가죽 끈은 커녕 세 번을 반복하여 읽은 책도 손에 꼽을 정도이니 부끄러운 일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몇 년 더 나이를 먹어, 쉰 살까지 주역을 습득하게 된다면 가히 큰 허물은 없으리라. (子曰, 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고 했다하니 그 학구열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그동안 헛된 것에 눈이 멀어 그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새책만 사려고 했지 감동을 주었던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책을 읽을 때는 눈으로 보고(眼到), 입으로 읽고(口到), 마음으로 깨우쳐야한다(心到)는데 나의 독서는 기껏 눈으로만 읽고 말았으니 헛되고 부질없는 짓으로 소일했음이다.

오늘은 말복.
귀뚜라미 우는 가을도 멀지 않았으니 올해가 다 가기 전에 공자가 주역을 두고 아꼈듯 내게도 곁에 두고 아낄 책 한 권을 고를 수 있다면 좋겠다.
경쟁하듯 책의 권수로만 허세를 부렸던 내 독서 습관을 반성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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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숲에서 길을 잃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매년 이맘때쯤 신록이 우거진 숲에 들어서면 대낮에도 어두컴컴하게 마련이고, 오르는 산이 초행길이라면 사방을 구분한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한참을 길을 잃고 헤매었는데 자신이 서있던 그 위치를 맴돌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두려움.  그 서늘한 기운을 아마도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강원도의 산골에서 길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놀거리가 많지 않았던 그 시절에 산은 아이들의 놀이터요, 자연 학습장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비밀 아지트였다.  또한 마땅한 찬거리가 없었던 시골에서 산은 계절의 풍미를 더해주는 보물창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봄이면 갖가지 산나물을, 가을에는 각종 버섯과 더덕이며 도라지로 또 한 계절을 살아갈 힘을 얻었으니 말이다.
어느 해 가을.  나는 친구 한 명을 대동하고 버섯을 딸 목적으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제법 높은 산으로 향했다.  그곳은 비 온 다음날이면 글쿠버섯이며 싸리버섯이 떨어진 솔잎을 뚫고 소복히 올라오는 곳이었다.  갈색 솔잎과 버섯의 색깔이 비슷하여 시선을 땅에 두고 집중하여 살피지 않으면 여간해선 찾기 어려웠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버섯을 따고 해가 지기 전에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버섯을 찾아 없는 길을 헤치며 돌아다녔더니 속도 헛헛하고 금세 해도 질 듯하여 친구를 여러번 반복해서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더럭 겁이 났다.  울창한 참나무 숲에선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사 나는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을 헤매던 나는 나를 찾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간신히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버섯 따는 재미에 나는 시간이 가는 줄도, 길을 잃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산자락이나 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면 그렇게 쉽게 찾을 듯한 길도 산의 중턱에 이르면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다.

국가경제는 좋아지고 있다는데 체감하는 서민경제는 어렵기만 하다.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뉴스를 자주 듣는다.  이럴 때마다 내게 드는 생각은 다들 중산층이라고 말하는데 중산층의 정확한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개인마다 생각하는 기준이 다르고 그 차이도 천차만별이다.  
 경제협력개개발기구(OECD)는 전체 근로자를 소득 순으로 줄을 세웠을 때 정중앙에 있는 사람의 소득인 중위(中位)소득을 기준으로 50% 미만을 빈곤층, 50~150%는 중산층, 150% 이상을 상류층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기준을 사람들은 납득이나 할까?
나는 다분히 문학적인 기준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산의 정상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류층, 산의 중턱에 있는 사람은 중산층, 산자락에 있는 사람은 빈곤층이라고 분류한다면 조금 쉽지 않을까?
산의 정상이나 산자락에 있는 사람들은 길을 묻지 않는다.  아니 물어 볼 필요도 없다.  훤히 잘도 보이니 굳이 묻지 않아도 길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중턱에 있는 사람들은 길을 끝없이 물어야 한다.  
우리네 인생도 그와 같지 않을까?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명 중산층이다.   그 기준은 명확하다.  책을 통해서든,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든, 내가 가야할 길을 묻고 있다면 나는 지금 중산층인 것이다.  산자락으로 내려가게 될지, 정상으로 오르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올처럼 무덥고 습한 날씨가 지속된다면 통통한 버섯이 많이도 올라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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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어제는 네가 처음으로 기차여행을 했다지?
점심을 서둘러 먹고 이모부와 사촌 여동생 이렇게 셋이 떠났던 깜짝 여행.
너는 내게 설명할 것이 참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왜 그렇지 않았겠니.
네 흥분된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들뜨게 되더구나.  하지만 조금은 늦은 시각이라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어야만 했단다.
비록 하루 동안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네가 들려준 평택 마린센터 14층 전망대의 모습은 동행하지 못한 나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겠더구나.


아들아

요즘 나는 '삶이 깜짝파티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순간순간 기쁜 일들만 이어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니란다.
때로는 시시하고 따분한 일도, 때로는 슬프거나 화나는 일도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이 내 앞에 처음으로 펼쳐진 깜짝 파티가 아니겠니?
"에이, 그게 뭐 깜짝파티예요?  그렇다면 나는 보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다시 한번 바라보렴.
세상을 살면서 똑같은 경험은 두번 다시 하지 못하는 법이란다.  네가 자주 듣는 엄마의 잔소리도 그때그때마다 모두 다를뿐 아니라 그 순간의 하늘과, 그 순간의 바람과, 그 순간의 태양도 모두 새로운 것이란다.


아들아

우리가 다음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상하거나 이러이러하게 되리라 기대한다면 아무리 기쁜 일도 그 기쁨은 반감되거나 시큰둥한 일이 돼 버린단다.
그리고 네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너를 위해 최상의 깜짝파티를 준비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단다.  네가 화내거나 짜증낸다면 너는 상대방의 행동을 미리 예상했거나 네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기를 은근히 기대했기 때문이란다.  상대방이 너의 예상이나 기대에 못 미치면 너는 너의 기대감 때문에 실망하게 되는 것이지 상대방이 잘못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단다.
이렇게 생각하면 네가 만나는 상대방이 비록 화를 낼지라도 너는 담담히 또는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상대방이 네게 준비한 깜짝파티를 즐길 수 있는 것이란다.
언젠가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을 맞는다 해도 너는 다음 순간에 다가올 깜짝파티에 대한 설레임으로 큰 슬픔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아들아

네가 조금 더 자라 나의 말을 이해할 나이가 되면 너와 와인을 같이 나누며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건배사를 들려주고 싶구나.
레치얌!
히브리어로 '삶을 위하여!'라는 뜻이라는구나. 
나이 든 할아버지가 어린 손녀와 잔을 부딪히며 외쳤던 말이라는데 근사하지 않니?
나는 그날을 위해 좋은 와인 한병을 준비하마.  내 아들의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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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시(詩)란 잘 배열된 문장이나 화려한 수사(修辭) 또는 문학적 기교가 아닌 살아 있는 실재 또는 영혼의 유체이탈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시는 단순히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암흑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생동하는 그 무엇이며, 하늘에 둥둥 떠다니다 어느 시인의 눈에 띄인 실재적 대상이나 그 분위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쓴다'기보다 '낚는다'거나 '건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곤한다.  
대체로 좋은 시인이란 마음에 매의 눈을 지닌 사람이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낚아채야만 시는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시적 기교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다.  시적 기교는 시의 생명력에 가치를 더하는 부차적인 것이기에 생명력이 없이 오직 기교에만 의지하여 시를 쓴다면 그야말로 죽은 시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뿐이다.
마음에 매의 눈을 지니고 더하여 장인의 세공술까지 겸비한 시인은 그리 흔치 않다.
그래서일까 시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는 '시는 어렵다'와 '시는 유치하다'는 입장으로 양분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시를 기피하는 합당한 이유는 아니라고 본다.  인성교육이 사라진 우리네 교육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입과 코와 마음이 열려있어야 한다.  이들을 통하여 음식과 공기와 인성(人性)이 끝없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지난 주말에 분당의 한 대형서점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분당의 중심지에 위치한 탓에 젊은이들의 발길이 잦은 곳인데 그들의 차림새는 남녀를 구분할 것 없이 알몸이거나 겨우 가린 정도로 비춰졌다.  한여름의 오후 시간대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계단을 오르는 여자친구의 뒤를 책으로 가리며 뒤쫓는 남자를 '매너가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가관이다'라고 해야 할지...
다소 보수적인 내 성향을 감안하여 지나친 감이 없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곳에서 인성이 사라진 인간의 실체를 보았다.  인성이 사라지면 아주 작은 심리적 충격도 견디지 못할뿐만아니라 그들에게는 동물적 잔인함과 성적 쾌락의 탐닉만 남게 된다.
갈수록 잔인하고 흉포화 되는 범죄와 높은 비율의 성범죄는 결코 법으로만 제어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오명에 더하여 성범죄율 세계 1위라는 오명을 더할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내 마음의 주파수를 온 우주와 자연에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성을 마음껏 호흡하는 일이다.  
수없이 되내어 읽어도 늘 새롭게 느껴지는 시 한편을 곁에 둔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무더위 속에서도 한편의 시에 심취한 젊은이의 모습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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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윤후명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영어를 공부하면서 외워도 외워도 늘 어렵기만 했던 단어들은 동식물의 이름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어려서부터 늘 곁에 두고 익혀도 세월이 가면 잊혀지는 것이 그들의 이름이거늘 제 나라 말이 아닌 외국어로 어찌 그들의 이름을 세세히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매일 아침 산을 오르며 만나는 풀과 나무의 이름을 우리말로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의 산문집에는 식물학자가 되기를 소망하였던 작가의 이력 탓에 많은 식물의 이름이 등장한다.  유별난 식물 사랑이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거리던 어느 봄날.  내가 알지 못하던 식물의 이름을 익히고자 화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필기도구를 챙겨 들고 방문한 화원에서 그 생감새를 눈과 머리로 기억하고 이름을 하나하나 빼곡히 적어가던 중 나는 그날 해가 지기도 전에 두손을 들고 항복을 선언했었다.  종류의 많음도 그랬지만 이름을 적고 지나쳤던 식물을 다시 대하면 번번이 다른 이름과 뒤섞여 가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매일 아침이면 산을 찾는다.  이름도 모르는 나무와 풀과 꽃.  그 속에서 나는 온전한 평화를 누리곤 한다.
세상에 나고(生) 사라질(滅) 때 모든 동물은 본의 아니게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다.  인간은 어미라 불리우는 한 여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남는 자에게 잊혀지지 않는 슬픔을 남겨둔 채로 죽는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 죄를 보상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다.  그것도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 원죄에 대한 작은 죄씻음이다.
살아 있는 것 중에 스스로 나고 자라 고통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식물 말고 또 있을까.
그 선(善)함과 드러내지 않는 겸손이 작가를 그토록 매료시키지 않았을까?
  자신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글, 수사(修辭)만을 앞세운 글, 뭔가 보여주겠다는 글만의 글이 내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늘 '자연을 교재로, 역사를 부교재로'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짐하기를 잊지 않는다.  그 마음이 들꽃 한 송이로 내 안에 피어나기를 비는 마음이다.  한 송이 하늘하늘 피어난 너도바람꽃이 이 지구를, 우주를 대변하는 모습임을 내 글이 당당하게 읊을 때, 내 문학도 비로소 우주를 유영(遊泳)할 수 있으리니.(P.105) 
그렇게 꽃과 함께 한 그의 인생에 꽃처럼 아름다운 지인들과 문우들에 대한 추억 그리고 전쟁통에 재혼한 어머니와 그의 계부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문학에 대한 소신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 등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와 삶의 진지한 성찰이 묻어나는 글은 꽃처럼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듯하다.  때로는 젓갈처럼 곰삭은 맛이 난다.
세월을 건너뛰는 돌다리처럼 이어지지 않는 추억의 편린이 애잔하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잘 살게나'하고 말하는 그의 덕담이 들리는 듯하다.
내 등을 토닥이는 투박한 손길의 촉감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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