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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과 인생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 -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읽고 쓰고 배우는 법
고미숙 지음 / 작은길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고전평론가 고미숙 작가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 생각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서 글을 잘 쓴다는 의미는 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뜻이다. 물론 고미숙 작가 역시 강연과 글쓰기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전업 작가인지라 아마추어 작가의 글쓰기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많은 전업 작가 중에서 고미숙 작가의 글이 단연 뛰어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많은 독자들이 그녀의 글에 열광하고, 나 역시 이따금 생각날 적마다 책을 꺼내 읽는 까닭은 그녀의 생각이 깊고 바르며, 작가의 생각이 고스란히 글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글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프로 작가와 아마추어 작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십수 년째 블로그를 유지하면서 글쓰기와 낙서를 끄적이고 있는 나로서도 고미숙 작가의 그와 같은 능력이 어찌나 부럽고 시샘이 나던지 때로는 그녀의 글에 탄성을 내뱉곤 한다. 글쓰기를 취미로 하는 대부분의 아마추어 작가라면 공감할 것이다.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시작한 글도 나중에 자신이 쓴 글을 읽어볼라치면 자신의 처음 생각과는 백팔십 도 달라진 결과물에 본인도 깜짝 놀라곤 했던 수많은 경험들. 자신의 생각을 오롯이 글로 풀어쓸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니구나, 하고 내뱉었던 좌절의 언어들.
“책을 읽는다는 건 내용과 서사, 정보와 교훈을 얻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진짜 핵심은 책의 '리듬과 강밀도'를 체득하는 일이다. 스마트폰이 퍼뜨리는 '빠름의 교리'를 거스를 수 있는, 청춘의 열정에 긴 호흡을 불어넣을 수 있는 대안으로 장편고전을 읽는 것만 한 게 없다! 아, 한 가지 더. 『임꺽정』에도 '판소리계 소설'에 못지않게 도처에서 질펀한 입말들과 가슴 뛰는 에로스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 '진맛'을 누릴 수 있다면, 스마트폰의 현란한 스펙터클 같은 건 좀 시시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p.52)
<고전과 인생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책의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작가는 이 책에서 사계절의 분류에 따라 책의 내용을 구성하고, 각각의 계절에 걸맞은 고전을 선정하여 자신의 생각과 함께 고전에 있는 자연의 이치를 설파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계절의 변화 역시 순환과 반복의 과정임을 고전을 통해 배워보자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처음에는 고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지식인으로 출발했지만, 고전평론가가 된 이래 고전을 읽고 쓰는 것이 삶의 근간이자 현장이 되었다. 그것은 고전 안에 담긴 시공의 리듬을 익히고 터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문득 알게 되었다. 일 년이 봄여름가을겨울이라면 하루도 봄여름가을겨울이고, 마침내 인생도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사실을. 때에 맞게, 때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고전의 지혜라는 것을. 고전과 인생, 그리고 사계의 삼중주!” (p.19)
서문에 이어 책의 본문에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 <임꺽정>, <걸리버 여행기>, <장자>,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구운몽>,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동의보감> 등 동서양의 고전이 고르게 등장한다. 그리고 5장에서 작가는 읽고 쓰는 것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피력한다. 고전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끝까지 읽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 작가가 불러온 책의 제목만 보아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음직한 책들이다. 그러나 그중 몇 권이나 읽어보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을 망설일 듯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벽초 홍명희가 쓴 10권짜리 <임꺽정>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대학생이었던 당시에 피곤함도 잊은 채 밤을 새워 읽었던 <임꺽정>은 아름다운 우리말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고, 한자가 아닌 순수 우리말로 이렇게 장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홍명희라는 작가에 대한 깊은 경의였다. 그리고 역사는 우리의 피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현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그래서인가, 오히려 집필기간 동안 더 건강해진다. 불필요한 일은 가능한 한 생략하고 먹고 자는 일에 충실하게 된다. 감정적으로 동요되는 일도 가급적이면 피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의 소통도 훨씬 매끄럽게 된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 평소에 감정을 참 과잉으로 쓰면서 사는구나, 감정에 휩쓸리는 건 결국 시간과 정력이 남아돌아갈 때 하는 헛짓이로구나 하는, 글쓰기가 요가나 명상, 기도 못지않은 수행이 되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p.209)
고미숙 작가는 여전히 글을 잘 쓰지 못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글을 읽고, 열광하며, 감탄한다. 작가의 웅숭깊은 생각이 고스란히 글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숨은 의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과 글이 일치한다는 것은 자연을 닮아간다는 뜻이다.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에 표리여일(表裏如一)의 아름다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