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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시간 ㅣ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오픈하우스 / 2012년 5월
평점 :
하늘이 어둡다. 어두운 하늘을 향해 을씨년스럽게 솟은 아파트의 흰색 외벽이 자연에 순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외고집을 대변하는 듯하다. 자연에 저항하는 게 삶이라면 죽음은 그 반대일 것이라는 손쉬운 가정이 주말 오후의 하늘에 화두처럼 매달린다. 매번 반복하는 상실과 그리움의 일기 면면에 나는 '실수'라고 불리는 어떤 사건들을 간식 메뉴처럼 기록한다. 나에게 활력을 주고,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건 어쩌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흘러가는 틀에 박힌 일상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실수'의 기록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성당의 잡무를 담당하는 사무장님과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입맛이 없었던 나는 여러 가지 채소에 양념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빈 공깃밥에 된장찌개를 곁들여 먹는 된장찌개백반을 시켜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두어 젓가락 깨작거리다 반나마 남기겠거니 생각했는데 담백하게 끓인 된장찌개가 없던 입맛을 살아나게 했던 것이다. 다행이었다. 점심을 먹고 성당에 다시 들러 후식 삼아 믹스 커피까지 한 잔 하고서야 헤어졌다. 집으로 향하던 길, 차 안에서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데 앞차의 주변을 맴도는 노란 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신비스러운 풍경이었다.
리 차일드의 소설 <61시간>을 마저 읽었다. 잭 리처 시리즈 중 한 권인 이 책은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서 61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시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퇴역 군인으로 딱히 할 일도 없이 미국 전역을 떠돌아다니는 주인공 잭 리처는 교회의 단체관광객이 탄 버스에 몸을 싣는다. 승객 대부분이 노인이었던 그 버스는 사우스다코타의 볼턴 인근에서 사고로 발이 묶인다. 리처와 승객들은 경찰의 도움으로 마을에 묵게 되지만 마약 밀매업자들이 날뛰는 마을에는 오래전에 폐기된 석조 건물을 둘러싸고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게다가 마약 거래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재닛 숄터 여사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살고 있는 노부인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잭 리처는 그 지역의 경찰들과 함께 사건에 휘말린다.
“난 댁이 왜 우리 집에 와 있는지 알아요. 왜 집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는지도 알고. 교도소에서 사이렌이 울릴 경우에 날 보호해주려는 거겠지요. 그래서 이 집 구조를 알아두려는 거고요. 난 그런 리처 씨에게 감사해하고 있답니다. 비록 그쪽의 심리적 강박증 때문에 충분할 정도로 오래 머무르진 않을 것 같지만 말이에요. 재판은 한 달 후에나 열린답니다.” (p.186~p.187)
마약 거래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증인인 재닛 숄터 여사를 보호하는 한편 잭 리처는 마을 인근에 있는 공군 폐기 건물의 용도와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자신이 근무했던 헌병대 수사팀으로부터 군 기록물을 검토하여 알려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폭주족들이 점거하고 있는 석조 건물을 위험을 무릅쓴 채 단신으로 탐사를 감행하기도 한다. 석조 건물의 지하에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쓰고 남은 항공유와 참전 병사들에게 제공했던 다량의 마약 그리고 약간의 보석류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비밀을 알게 된 마약 밀매업자 플라토는 마약을 자신의 수중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데...
“네브래스카 주, 12킬로미터 상공. 플라토의 세 번째 줄 뒤 좌석 4A에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전화기 한 대가 단단한 허벅지 근육에 조용하면서도 격렬하게 요동쳤다. 여섯 명의 ‘일회용’ 멕시코인 가운데 다섯 번째 사내가 전화기를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그는 옆자리 4B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여섯 번째 사나이는 오늘 다섯 번째 사나이와 같은 트럭에 동행했었다. 두 남자는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지는 않았다.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긴장해 있었다. 문자메시지의 내용은 단 한마디였다. 해치워.” (p.465)
어제부터 흐렸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 푸른 하늘에 대비되는 하얀 아파트 외벽은 인간 의지의 표상인 양 높고 굳건해 보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요.’라고 말했던 재닛 숄터. ‘중요한 건 어떻게 가느냐지요.’라고 응수했던 잭 리처. 인간은 자신의 욕심을 에너지 삼아 한평생을 살고, 그 에너지가 소진될 때 비로소 자신도 역시 자연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된다. 리 차일드의 소설 <61시간>의 결말은 끝나지 않았다. 인간의 욕망이 대를 이어 계속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