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창비청소년문학 122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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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고 나면 인생은 한 편의 단편영화를 보는 시간보다 더 짧은 듯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수없이 많은 인생을 기록하고, 또다시 읽고, 기억하려 애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읽었던 한 사람의 인생만큼 나의 인생이 조금 더 길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우리를 독서의 세계로 안내하는 게 아닐까, 혹은 수없이 많은 영화의 세계로 이끄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남긴 삶의 기록들을 읽어가다 보면 나의 인생도 무한대로 늘어나지나 않을까 한껏 기대를 품게 됩니다. 철없이 말입니다.


이희영 작가의 소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역시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한 사람의 흔적을 좇는 이야기인 동시에 형이 살았던 가상의 세계에서 형에 대한 그리움을 키워가는 주인공 선우혁의 이야기를 다룬, 말하자면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입니다. 나는 여름이 뒤돌아 앉은 가을 들녘을 바라보며, 어쩌면 주인공 선우혁이 맛보았을 새콤달콤한 추억의 장면 장면들을 상상하느라 단풍이 드는 소리도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자연도 한 가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초록으로 뒤덮여도 은행나무요, 꽃이 져도 벚나무니까. 그런데 은행나무는 가을의 상징이고 벚꽃은 봄의 표상이다. 바라보는 인간들이 그냥 그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한 사람에게 서로 다른 추억과 이미지가 덧씌워지듯이."  (p.243)


주인공인 선우혁에게는 터울이 많이 지는 형이 한 명 있습니다. 아니 있었다고 하는 게 옳을 듯합니다. 그러나 십이 년 전 세상을 떠난 그의 형 선우진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그의 형에 비해 주인공 선우혁의 나이는 고작 다섯 살의 꼬마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형과 꼭 닮은 모습으로 성장한 선우혁은 이제 형이 다니던 고등학교에 입학한 새내기 고등학생입니다. 형이 다니던 학교에서, 같은 나이가 된 주인공은 그 당시의 형은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유행했다는 메타버스 게임 '가우디'를 알게 되고, 형의 계정으로 접속을 시도합니다. 형의 아바타 JIN으로 말입니다. 게임 속 가상현실에서 형은 넓은 정원이 있는 2층짜리 하얀 벽돌집을 지었고, 형이 없는 동안 그곳을 지켰던 형의 공유 친구 '곰솔'과 조우하게 됩니다.


"엄마 아빠는 알고 있었을까? 형이 가우디에 이런 세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마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난달에서 격투기 게임을 관람하고 댄스 크루를 응원하며, 낚시하는 친구를 따라 몇 시간이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나를 모르는 것처럼. 어쩌면 인간의 진짜 세상은, 핸드폰과 노트북 그리고 XR 헤드셋 너머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밀번호로 봉인된 곳. 그런 의미라면 이 정원은 형의 진짜 세계다."  (p.64)


가상세계 속 형의 정원을 둘러본 후 주인공은 형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 갑니다. 그러나 형을 기억하는 현실 세계의 사람들은 각자의 시선에 따라 '애교 많은 수다쟁이 아들', '조용하고 책임감 강한 학생', '무던한 성격' 등 제각각입니다. 소설은 형에 대한 그리움과 호기심으로 시작된, 선우혁이 발견한 형 선우진의 짧았던 삶의 조각들과 어쩌면 가상세계 속 '곰솔'이 선우진에게 보냈을 것으로 추측되는 '너'를 향한 편지가 교차되면서 전개되는 까닭에 애틋함이 더해집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너는 받지 않았어. 학교에서도 너를 볼 수 없었지. 네가 아무도 몰래 우리 집 문 앞에 두고 간 그 귤은, 얼마 못 가 파랗게 곰팡이가 피더라. 그리고 완전히 썩어 버렸어. 하지만 버리지 못했어. 정말 그럴 수 없었거든."  (p.195)


소설 속 편지는 학교에서 처음 마주했던 날부터 함께 했던 조별 활동, 둘만의 가상공간을 만들기까지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시간들이 길게 이어집니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이 살았던 현실의 삶과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재구성되는 또 다른 삶을 통해 두 번의 인생을 살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둘 중 진정한 삶은 이것이다, 그 누구도 단언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죽고 난 뒤에 재구성되는 나의 삶에 나는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삶이 소중한 것도 그런 이유일 테지요.


소설을 읽는 요 며칠, 나도 미처 모르는 새 나뭇잎의 물기가 점점 옅어지고, 하늘은 두어 뼘쯤 높아진 듯합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어떤 일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아주 미미한 성과로 귀결되었을 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까닭은 누군가의 인생을 통해 나의 인생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듯한 착각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계절을 잊은 채 책을 읽는 까닭도, 황금 같은 주말 오후를 영화를 보며 소일하는 까닭도 그런 이유가 마음 저변에 넌즈시 깔려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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