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후문을 통과하여 편도 1차선의 작은 도로를 건넙니다. 오른쪽에 있는 초등학교 건물을 등지고 나는 매일 아침 오르는 산의 입구, 그 낡은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딛습니다. 하늘엔 손을 길게 뻗으면 닿을 듯한 먹구름이 둥둥 떠다닙니다. 오늘은 개천절. 휴일의 나는 평일에는 가지 않던 더 먼 곳까지 가곤 합니다. 참나무와 아카시아 나무가 빽빽한 군락을 이루는 산의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먹이를 찾는 청설모도 만나고 마른 낙엽을 뒤지는 참새떼와 마주하기도 합니다. 산의 정상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깔딱고개를 힘겹게 통과하면 완만한 구릉을 만납니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입니다. 구릉의 중심부엔 수십 년 된 소나무 군락이 있고, 주변에는 굴참나무와 산벚나무도 보입니다. 나는 소나무 둥치를 등지고 앉아 건너편 능선을 바라봅니다. 부쩍 낮아진 기온과 숲을 통과하여 불어오는 바람에 나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이른 아침의 풍경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깨닫게 합니다. 나는 그렇게 소나무 둥치에 기대어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나의 등산 일기와는 다르게 정치권의 뉴스는 하루가 다르게 터져 나옵니다. 그것은 대개 대통령실에서 비롯된 뉴스입니다. 어처구니없고 실소가 터지는 일은, 정치인도 아니고 특별한 관련도 없어 보이는 영부인의 행보가 정치권을 들었다 놨다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가 조작의 방조범 혹은 공범으로 의심되어 조사를 받았던 것은 물론 고가의 화장품 세트와 양주, 디올백 등을 받아 청탁금지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는 등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일을 그렇게나 많이 하고도 모자랐는지 마포대교 위에서 경찰을 향해 일장 훈시를 하는, 이른바 대통령 놀이에 심취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공천개입과 당무개입 논란에 의심되는 녹취록과 증거가 속속 등장함으로써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보에 다들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불법과 탈법을 넘나들고 갈수록 점입가경인 그녀의 행보에 대해 법적으로 덮어주기 위한 검찰의 눈물겨운 충성 경쟁 또한 이 정권의 특색 중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당당하다면 특검을 수용하고 구속이 된다면 대통령의 특권인 사면권을 행사하면 될 터인데 대통령은 오직 거부권만 생각하고 다른 대안은 안중에도 없는 듯합니다. 그런 대통령을 믿고 어느 여인은 미친년 달밤에 널뛰듯 막무가내 행보를 하고 말입니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도 없고,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미개한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을 요즘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게 나라냐?'는 말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요즘입니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배추 한 포기의 가격이 만 원을 넘나들고, 깻잎 한 장 가격이 100원 안팎인 미친 물가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느 여인의 막무가내 행보가 대한민국 국민의 화를 돋웁니다. 긴 여름을 빠져나왔건만 여전히 여름에 머무는 듯 열이 납니다. 머리에서 치솟는 열기는 바깥 기온이 떨어져도 좀처럼 식지 않습니다. 불현듯 가을을 맞은 우리는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라는 말로 이 가을을 영문도 모른 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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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과학 탐사기
민태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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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자신이 속한 국가나 민족에 대한 역사적 지식은 있게 마련이다. 많고 적음의 정도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특정 역사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오롯이 당사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것은 어쩌면 다른 어떤 사람도 침해할 수 없는 사적 자유의 영역으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평가를 밖으로 표출하는 문제는 또 다른 영역에 속한다. 나의 생각이 너와 다른 것처럼 나의 생각이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생각하는, 이른바 주류의 생각인지 일부 소수의 구성원인 비주류의 그것인지에 따라 비판과 지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역사는 방대하지만 작금의 시점에서 드러나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고, 그와 같은 일부분의 역사마저도 역사학자와 같은 전문가가 다수의 일반인에게 보여주고, 해석하고, 설명을 곁들이는 건 선별을 거친 것임을 감안할 때 우리가 접하는 역사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던져진 뉴라이트 사관 역시 일제 식민지 치하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 기인하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가 강제로 병합되고 3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의 통치 과정에서 자행된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인권 유린의 사료와 증거들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볼 것이며 이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어느 선까지 용인하고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해방 후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과학은 민족의 미래를 여는 열쇠이자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는 도구였지만, 이념은 우리를 분열시켰고,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며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대립의 역사가 우리 과학에 남긴 상처는 컸다. 무엇보다 거침없이 세계를 누비던 그 생생한 기록을 잊게 했다."  (p.294 '에필로그' 중에서)


<조선인 만난 아인슈타인>은 제목만큼이나 생소한 내용의 책이다. 책의 저자인 민태기 박사 역시 공학도임을 감안할 때, 책은 단순히 과학 관련 사료와 증거의 나열이 아닐까 지레짐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가 발굴하여 정리하고 상황에 맞게 맥락을 설명하는 과정은 어느 역사가의 기술 못지않게 매끄러울 뿐만 아니라 흥미롭게 전개된다. 가뜩이나 역사의 암흑기라고 불렸던 일제 식민지 시기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 전쟁 시기에 우리 선조들이 추구했던 과학 발전의 원대한 꿈은 일반인들이 알지 못했던 생경한 분야이기도 했다. 1895년 서재필의 귀국에서부터 우리 민족에게 처음으로 아인슈타인을 소개했던 황진남이 1970년 오키나와에서 사망했던 쓸쓸한 기록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암흑기에 있었던 우리 선조들의 과학 대국의 꿈을 사료와 함께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이념에 의해 도외시되고 찢겼던 우리의 과학사를 되살렸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처럼 당시 과학자들은 동시대의 최신 과학 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최규남은 1936년 5월, 4회에 걸쳐 아직 생소했던 '로켓' 과학과 달 탐사 전망을 소개하고, 6월에 일어난 개기일식을 6회에 걸쳐 설명하며 태양의 흑점과 코로나에 대한 연구를 알린다. 또한 1935년 처음 발견된 델린저현상에 대해 5회에 걸쳐 소개하며 전자기파와 태양 활동을 연결시켰다. 이 모두가 일간지에 실린 과학 칼럼이다."  (p.170)


책은 단순히 사료나 당시의 잡지나 신문에 실린 기사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당시 세계의 과학 이슈와 새로운 이론을 소개함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들이 우리 선조들이 민족의 역량과 과학 발전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애를 썼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함은 물론 열악한 환경에 놓였던 당시의 우리 선조들이 세계 과학의 흐름에 동참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게다가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과학계의 유명 인사들과 그들의 업적을 새로 알게 되는데 그 재미 또한 쏠쏠하다.


"이처럼 태평양전쟁은 합성섬유 전쟁이기도 했고, 그 중심에 교토국제대학의 조선인 과학자 리승기와 고분자화학 이론을 만들던 이태규 그리고 고무를 연구하던 박철재가 있었다. 리승기는 전쟁 중에 일본 군부에 불만을 표하다 투옥된 채로 1945년 해방을 맞게 된다. 교토 국제대학의 강사로 근무하던 박철재 역시 이 무렵 헌병에 잡혀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재일조선인 과학자들은 광복 후에 더욱 큰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p.187~p.188)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고, 인류가 화성으로의 이주를 꿈꾸는 21세기 첨단 과학의 시대에 케케묵은 역사를 알아서 도대체 뭐에 쓰겠는가?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화 선진국 대한민국을 이룬 기반도, 과학 발전을 선도하는 대한민국의 기초 체력도 모두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 우리 선조들의 땀과 눈물이 모여 현재에 이르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이웃 나라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우리들의 조상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잊는다는 건, 나아가 잘못된 역사를 가르친다는 건 어쩌면 세계사의 무대에서 우리 후손이 설 자리를 빼앗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이 세운 역사를 타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해석할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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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오는 것들 세트 - 전2권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개정판)
공지영.츠지 히토나리 지음, 김훈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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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유일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랑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비록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모자식 간의 사랑처럼 서로 그 형태를 달리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까닭인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이 끝나는 순간 본인의 삶도 함께 내려놓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목도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결말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간에 사랑했던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전에 비해 훨씬 풍요로워졌다는 사실을 누구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어쩌면 비슷한 스토리의 사랑 이야기를 수많은 변주의 소설이나 시로, 혹은 음악이나 그림으로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하여 감상하였음에도 지금도 여전히 또 다른 사랑 이야기를 갈구하는 까닭 역시 우리 삶의 주제가 사랑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삶이 지속되는 한, 가슴의 심장이 뛰는 한 사랑을 향한 영혼의 심장도 쉼 없이 뛰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걸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노카시라 공원 호수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같기도 하고, 사슴 떼가 야트막한 언덕을 빠르게 질주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나는 잠시 내 환청을 믿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이 소리는 그와 아침마다 듣던 피아노 소리, 그의 어머니가 연주회에서 치던 피아노 소리였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었다. 언제나 부드럽던 그의 손이 그렇게 억세게 느껴졌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p.20 '공지영 편')


오지 않는 가을을 기다리며 이제나저제나 하릴없이 목을 빼고 기다리던 늦여름의 어느 시기에 내가 읽었던 사랑 이야기는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 원작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었습니다. 2005년 '한일 우호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기획된 이 소설은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두 작가,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에 의해 여자와 남자의 시각에서 쓰인 로맨스 소설이지만 한 방송사에 의해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원작 소설로 재출간되었습니다. 나는 사실 공지영 작가의 소설보다는 산문집을 더 좋아했던 까닭에 그녀가 쓴 소설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더구나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쓴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이미 읽어본 나로서는 그와 같은 기획 형태에 조금 구태의연한 느낌마저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루룩 내처 읽고 말았습니다.


1권은 여주인공 최홍의 시선으로 써 내려간 공지영 작가의 작품입니다. 윤동주의 시집을 끼고 젊은 시절의 윤동주처럼 일본에 닿았던 홍은 우연히 만났던 아오키 준고와의 우연이 겹치면서 사랑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가족도 없는 낯선 땅에서 문득문득 외로움이 밀려들었고, 그것을 잊기 위해 매일 뛰었습니다. 서툴렀던 동거를 끝내고 홍은 결국 귀국을 결심합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 준고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은 떠나는 순간에도 강하게 남았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긴 이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봐. 감히 영원 같은 걸 갖고 싶었나 봐. 변하지 않는 거 말이야. 단단하고 중심이 잡혀 있고, 반짝반짝 빛나고 한참 있다 돌아와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두 팔을 벌려 주는 그런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같은 거. 꿈꾸지 말아야 할 것을 꿈꾸고 말았나 봐."  (p.230 '공지영 편')


2권은 남자 주인공 아오키 준고의 시선으로 쓴 츠지 히토나리의 작품입니다. 아오키 준고와 최홍 사이에는 각자가 따로 살았던 칠 년이라는 긴 세월이 놓여 있습니다. 준고는 사사에 히카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가 되어 한국에 나타났습니다. 최홍은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내일출판사의 편집자와 함께 준고를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일본어 통역을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우연은 다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꽃다발을 받아 들었지만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재회에 동요한 나머지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백합 꽃다발을 가슴에 안았다. 칠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얀 옷을 즐겨 입던 홍이는 지금 어른스러운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하고 내 앞에 서 있다."  (p.14 '츠지 히토나리 편')


홍이와 헤어졌던 시간 동안 홍이를 생각하며 썼던 소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절절했고, 바다 건너 그녀에게 닿고 싶었던 준고의 간절한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준고에게도 홍이에게도 그들을 사랑하는 연인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그와 같은 위기를 넘기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할 수 있을까요?


나이가 들수록 비극적인 결말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얼마 후에 있을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별을 피할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동화와 같은 행복한 결말을 꿈꾸곤 합니다. 작가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극적인 결말이라고 해서 모든 소설이 다 신파로 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수록 작가의 상상력은 언제나 행복한 쪽으로 귀결되곤 합니다. 현실과는 크게 다르게 말입니다.


"홍이와 헤어진 후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나 자신을 매어 둘 수 있었다. 직업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였다. 친구들의 호출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때까지의 모든 관계를 끊고 오직 홍이와 나 자신의 이야기를 써 갔다."  (p.237 '츠지 히토나리 편')


한낮 햇살이 계절을 희롱하고 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완연한 가을입니다. 우리는 이미 한 스푼의 가을을 떠먹고 그 황홀한 맛에 취한 터라 계절을 거슬러 여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한 편의 로맨스 소설에도 이리 설레는 걸 보면 나의 영혼에도 이미 가을이 도래한 듯합니다. 벚나무의 바짝 마른 이파리들이 도로에 흩날립니다. 주말을 맞은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만 향하는데 가을을 굳이 '독서의 계절'이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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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산
낸 셰퍼드 지음, 신소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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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유년 시절의 나를 떠올릴라치면 자연과 동떨어졌던 기억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숫제 없는 것인지, 아니면 몇몇 가지가 있었지만 기억에서 모두 지워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현재의 내 머릿속에는 남아 있는 게 없다. 그러다 보니 어느 가을날 억새밭에 누워 바라보았던 푸른 하늘이나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날 짚으로 만든 김치광 안에서 느꼈던 안온한 풍경, 뽀얗게 비질을 마친 마당으로 어미닭과 함께 걸어 나오던 노란 병아리 떼 등 선명한 기억 속에는 언제나 사람보다는 먼저 그날의 풍광이 선연한 기억으로 떠오르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의 5남매 중 막내(뒤늦게 태어난 여동생 덕분에 막내 자리는 물려주게 되었지만)로 성장했던 나는 누릴 수 있는 문명의 혜택은 거의 받아본 적이 없다. 텔레비전은 물론 전화도 없었던 까닭에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려야 했던 공중전화도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용 방법을 익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내가 조선시대에서 환생한 '별에서 온 그대'쯤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나는 엄연히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동시대인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혜택을 남들보다 비교적 늦게 받았을 뿐 드라마에서나 나올 만한 그런 구시대적 인물은 아니라는 말씀 되시겠다. 나의 성장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았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 작가이자 시인인 낸 셰퍼드의 산문집 <살아 있는 산>을 읽는 동안 '나는 왜 여전히 산과 자연을 좋아할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의 가장 섬뜩한 특징은 그것이 지닌 힘이다. 나는 물의 반짝이는 광채가 좋다. 음악적인 소리, 유연하고 우아한 움직임, 내 몸을 때리는 감촉도 좋다. 하지만 그 완력만큼은 두렵다. 자연의 힘을 두려워했기에 숭배했던 조상들처럼 나 역시 자연이 두렵다."  (p.52)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는 나는 매일 아침 산책 삼아 집 근처의 산을 오른다. 아주 오래된 습관이다.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습관으로 인해 다른 조건이 엇비슷하다면 집 근처에 산이나 공원이 존재하는 것이 집의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거닐며 잠시나마 도시 생활의 번잡함과 여러 고민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시골에서의 성장 배경을 지녔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시골에서 도시로 퇴출된 나와 같은 도시 난민들에겐 인근의 야산이나 공원처럼 일시적으로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공간이 무엇보다 필요할지도 모른다. <걷기 예찬>을 쓴 다비드 르 브르통의 글이나 낸 셰퍼드의 산문집 <살아 있는 산>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리는 까닭도 그와 같은 배경 때문일 테다.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는 방법을 터득했다면 이제는 몸과 마음을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할 차례다. 다양한 감각을 사용해야 한다. 귀로 말하자면, 산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이다. 침묵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침묵이 얼마나 드문 존재인지 깨닫는다. 항상 무언가가 움직인다. 공기가 완벽하게 정지해 있을 때도 물은 흐르게 마련이니까. 산에서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고원의 물줄기는 대부분 돌 아래를 지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이따금 사방이 너무 적막하게 느껴질 때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된다."  (p.152)


<살아 있는 산>은 스코틀랜드 케언곰 산맥 지도를 시작으로 머리말을 지나 1장 '고원', 2장 '계곡', 3장 '산봉우리들', 4장 '물', 5장 '서리와 눈', 6장 '공기와 빛', 7장 '생명체:식물', 8장 '생명체:새와 동물과 곤충', 9장 '생명체:인간', 10장 '잠', 11장 '감각', 12장 '존재'로 구성되었으며 뒤에는 영국의 산악인이자 문학가인 로버트 맥팔레인의 해설이 실려 있다는 게 특이하다. 1년 내내 산을 찾는 산 애호가로서 낸 셰퍼드의 글은 케언곰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생생하다. 산을 좋아하지 않는 도시내기가 읽는다 할지라도 대리만족을 느낄 정도의 감각적인 묘사는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될지도 모르겠다.


"『살아 있는 산』이 현대에도 의미 있는 책인 것은 신체적 사고에 대한 셰퍼드의 믿음 때문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 점점 더 심하게 분리되어 살아간다. 우리의 마음이 물려받은 유전 특성과 습득하는 관념뿐만 아니라 공간, 질감, 소리, 냄새나 습관처럼 신체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은 점점 더 잊혀간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접촉을 잃고 있으며 과거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더 몸과 단절되는 중이다."  (p.204 '로버트 맥팔레인의 해설' 중에서)


영영 끝나지 않을 듯하던 여름도 이제 그 막바지에 이른 듯하다.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가 펼쳐지는 것이다. 하루라도 더 자연을 만끽하고자 욕심을 부리는 일은 100년도 살지 못하는 우리네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각박하고 단조로운 삶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나의 유년기의 기억에서 먼저 그날의 풍광이 떠오르는 것도 그런 까닭일지 모른다. 힘겹게 건너온 시간이었지만 자연이라는 뒷배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나의 영혼이 내 몸과 단절되는 것을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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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실 관계자의 전언을 기사화한 내용이었는데 말인 즉, 대통령이 미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의 전투 식량을 직접 인터넷에서 구매해 먹어보았으며 이를 통하여 우리 군의 전투식량과 비교해 보고, 개선점을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읽고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런 잡무를 처리하는 데 굳이 대한민국의 대통령까지 나서야 하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란 자리가 그토록 한가한가? 하는 점이었다. 사실 그와 같은 업무는 국방부의 하급 관리가 처리하고도 남을 일이며, 개선점을 보고 받고 최종 결정을 하는 단계에서도 국방부의 중간 관리급에서 전결 처리할 일이지 국방부 장관에게까지 보고할 일도 아닐지도 모른다. 하물며 대통령에게 그와 같은 업무가 전가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휴가기간에 정 할 일이 없어서, 혹은 몸이 뒤틀릴 정도로 심심해서 한다면 모를까 그런 일을 대통령이 한다는 건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더군다나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한과 의무는 과도한 측면이 있는데 그와 같은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말이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매일 밀려드는 산적한 국정 현안을 대통령 일인이 감당하기에는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텐데. 사정이 이러한 까닭에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자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많지 않다.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숫제 손을 놓아버리거나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공부하고, 토론하며, 국정 운영에 매진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전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국정 현안에 손을 놓는다고 해도 국가의 녹을 먹고 있는 공무원 신분인 자신이 그저 잠이나 자고 좋은 술과 음식만 탐하기에는 국민들 보기에 민망한 노릇이니 뭔가 하고 있다는 태는 내야 하겠고... 그래서 찾은 일이 전투식량이 아니었을까.


대통령 부부가 체코 순방을 마치고 오늘 귀국했다. 체코의 원전 수주를 목표로 방문했다고는 하지만 당사국인 체코 언론은 그렇게 보지 않는 듯했다. 2024년 9월 21일자 체코 일간지 블레스크는 김 여사에 대해 과거 세금 회피, 표절, 학력 위조 등 다양한 혐의를 제기하며,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이 한국 대통령 옆에 설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대통령 부부에게 엿을 먹인 기사였다. 그럼에도 대통령실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정 현안에 손을 놓은 바지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거기까지인 셈이다.


오늘은 24절기 중 열여섯 번째 절기인 추분. '추분이 지나면 우렛소리 멈추고 벌레가 숨는다'는데 과연 그럴지 지켜볼 일이다. 때 아닌 가을장마로 전국이 난리이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낮 무더위가 조금 누그러졌다는 것이다. 냉방장치를 가동하지 않은 실내에서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었던 게 과연 얼마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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