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것이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의 소위 기득권이라고 하는 엘리트 집단에게도 일말의 양심이나 정의감이 조금은 남아 있겠거니 하는 생각에 전 국민이 예측하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내심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누구나 예측하던 결과를 뉴스 속보로 접했을 때 실망보다는 허탈한 심정이 먼저 들었다. 우리 사회도 이제 양심이나 도덕심 혹은 정의감 등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구나, 하는 현실 인식이 가슴 한켠을 허전하게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서울중앙지검의 출장조사, 소위 '찾아가는 서비스'를 통하여 김건희 여사의 혐의에 대하여 모두 면죄부를 주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에 더하여 어제는 이른바 외부 전문가 집단이라고 하는 검찰 수심위(수사심의위원회)에서도 불기소를 권고함으로써 막장 드라마는 그 결과마저 막장으로 끝나게 되었다. 대통령이라는 포괄적 업무를 수행하는 자의 부인이 영문도 모른 채 고가의 선물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처벌을 면키 어려울 텐데 명품백을 선물한 사람이 부정 청탁을 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음에도 이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하겠다.


어제 있었던 수심위의 불기소 권고에 대해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공무원도 아닌 외부 전문가들마저 정권의 눈밖에 날까 걱정하여 자신의 출세와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양심마저 팔아먹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돈과 권력이 좋기로서니 자신의 양심을 저버릴 만큼 매력적인 유인책이 뭐가 있었을까. 수심위에 참가했던 위원 대부분이 돈이 쪼들리거나 사회로부터 천대를 받는 사람들도 아닐 텐데 말이다. 물론 지금의 사회적 지위에 오르기까지 약간의 편법과 탈법이 있었을는지도 모르고 그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이나 기소 또한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자기보다 높은 권력자의 죄를 못 본 척 눈감아 줌으로써 자신의 죄도 사함을 받는, 그들만의 범죄 카르텔이 공고히 형성되었다는 건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이겠지만 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양심이 밥 먹여주냐? 는 조롱과 비아냥이 자본주의의 신념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다. 돈과 권력만 획득할 수 있다면 범죄 행위도 용인할 수 있다는 게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의 가치가 되었다. 나의 신념이나 양심에 반하는 사람들과의 불편한 동거. 양심이 우선시 되던 사회에서 양심은 개나 줘버려 하는 사회로의 전환. 우리는 어쩌면 그 중간쯤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어제 있었던 수심위의 결과가 괜히 찜찜하고 마음이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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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고백 - 김영민 단문집
김영민 지음 / 김영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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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러진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은 삶이 지속되는 한 계속된다. 예컨대 전에 비해 게을러졌다거나 씀씀이가 과해졌다거나 도전 정신이 약해지거나 무기력해졌다는 등 일종의 자기 검열을 거친 후 이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얘기다. 물론 하다 하다 지쳐서 이제는 숫제 손을 놓은 채 '될 대로 되라지'라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도 없지는 않을 테지만 그들이라고 자신의 삶을 마냥 방치하고 돌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듯싶다. 적어도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새해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다이어리에 기록된 자신의 계획을 수시로 점검하기도 하는 게 아닌가. 그렇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군기반장처럼 자신의 일상을 점검하고, 반성하며, 심기일전하여 으쌰으쌰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자신의 젊음이 저만치 멀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게 보편적인 우리의 삶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왠지 어깨가 처지고 기가 죽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겠다.


"시시포스는 사실 퇴행을 즐긴 것은 아닐까. 퇴행하고 싶어서 열심히 돌을 굴려 올린 것이 아닐까. 능동적 도태, 자발적 퇴행이야말로 기쁨을 준다. 퇴행하기 위해 오늘도 전진한다. 퇴행만 꿈꿀 뿐 전진하지 않는다? 그때는 늙은 것이다."  (p.77)


김영민 교수의 단문집 <가벼운 고백>은 제목처럼 혹은 제목만큼 가벼운 책이다. 저자의 이전 저서, 이를테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나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처럼 독자들이 느끼기에 다소 현학적이거나 깊이가 있는 책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가을날 머리에 문득 떠오른 단편적인 생각, 텔레비전에 출연한 어느 정치인의 연설을 들으면서 품었던 생각이나 느낌, 교수로서 학생들과의 어울림이나 그들로부터 받았던 질문에 대한 짧은 답변 등 일상에서 건져 올린 생각들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 역시 큰 기대를 안고 책을 펼쳤던 바, 기대에 못 미치는(또는 기대와 다른) 책의 내용과 구성에 조금 당황했던 게 사실이다.


"남의 글을 비판할 때 자신의 편견과 무식을 광고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남들을 근거 없이 욕하는 경우를 보면 대개 근거 없는 자기 자랑인 경우가 많다. 합창하듯 자신의 무식을 뽐낸다. 내가 이래 봬도 얼마나 무식한데!"  (p.166)


전업 작가가 아닐지라도 자신의 책을 출간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대개 다음에 출간할 책에 대한 욕심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에 대한 고민은 자신이 낸 첫 번째 책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시작된다. 게다가 우연히 낸 책이 생각지도 않았던 성과를 거둔 경우라면 자신뿐만 아니라 출판사의 과한 칭찬과 부추김에 의해 두 번째 책에 대한 욕심이 더욱 커진다는 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함량미달의 책이 세상에는 차고 넘친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김영민 교수의 <가벼운 고백>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책도 가끔은 읽을 필요가 있고 책에서 건진 한두 문장의 글귀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피가 되고 살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평론은 비평하는 작품을 매개로 해서 성립하는 글이지만, 그 자체로 독립적 작품이기도 하다. 지시하고 비평하는 작품이 무엇이든, 평론은 그 자체로 읽을 만해야 한다. 그 자체에 내장된 동력과 리듬과 통찰과 지성과 정념과 아름다움과 감수성과 '미친 맛'으로, 읽을 만해야 한다. 그리하여 글쓴이 마음의 서랍에서 벗어나 결국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두루 읽히는 하나의 작품이 되어야 한다."  (p.215)


며칠 전 옥천에 있는 정지용 시인의 생가를 다녀왔다. 인적이 드문 마을 풍경은 쓸쓸했고, 한여름의 열기만 가득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로 시작되는 '향수'의 감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삶의 허무를 딛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밝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셀 수 없이 많은 허무를 밟아본 이의 탈속한 경지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혹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이 항상 깊은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시간이 뱉어 놓는 일종의 토악질, 삶의 배설물일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걷는 길이 항상 카펫이 깔린 비단길이 아닌 것처럼 지난 시절에 읽었던 글이 모두 금과옥조가 아니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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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맞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설렘과 한 주에 쌓인 피로가 어우러져 흐림도 밝음도 아닌 묘한 표정으로 오전 내내 분주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침부터 끄물끄물하던 오늘의 날씨를 닮아  있는 듯 기시감이 들게 했던 것입니다. 일상은 그렇게 조금씩의 미세한 변주를 거듭하며 닮은 듯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요즘 피부로 겪는 의료대란으로 인해 공포에 가까운 일상을 조심조심 건너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에게 '아프지 말아야 한다.', '아프더라도 응급실은 가지 말아야 한다.', '아프려면 낮에 아파야 한다.' 등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주문처럼 되새기며 예전과 같은 일상이 하루빨리 도래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정부에서 있었던 코로나 시국을 건너면서도 지금과 같은 공포나 두려움은 갖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과 안전이 오직 자신의 손에 쥐어진 작금의 상황을 맞고 보니 우리의 현실에서 정치가 우리네 일상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정치인 하나 잘못 뽑았다고 세상이 뭐 달라지겠어?' 하던 낙관은 온데간데없고 '정치인 한 명 잘못 뽑은 대가가 이렇게 클 줄이야...' 하는 자책과 후회가 가슴을 옥죄는 요즘입니다. 국가 시스템 전반이 무너진 듯한 현실의 하루하루를 힘겹게 건너면서도 어떤 자구책을 달리 마련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항간에는 그런 소문도 있습니다. 부족한 건강보험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병에 취약한 노인을 방치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정부가 나서서 현대판 고려장을 부추김으로써 젊은 세대의 부담도 줄이고 건강보험 재정 자립도도 높이겠다는 일석이조의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료대란을 일이 년쯤 방치하면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아서 새로운 상황을 맞게 되겠지요.


며칠 있으면 추석입니다. 명절 연휴가 걱정이라는 분들이 많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뵙기 위해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부모님으로 인한 험한 꼴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일은 24절기 중 열다섯 번째 절기인 백로. 밤에 기온이 내려가 풀잎에 흰 이슬이 맺힌다는 절기이지만 한낮 기온은 여전히 한여름처럼 무덥기만 합니다. 건강한 주말 보내시길. 진심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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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 도시공간 시리즈 3
김건희.김지연 지음 / 선드리프레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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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하는 형식은 그 유례도 깊고 사례 역시 많다. 그렇다고 편지를 주고받는 두 사람이 모두 작가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에 독자들로부터 더 큰 관심을 받곤 하지만 정제된 글의 형식을 생각할 때 둘 중 한 사람은 작가일 필요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도 이와 같은 형식의 산문집을 여러 권 읽은 경험이 있다. 지난해 타계한 서경식 교수와 일본인 소설가 다와다 요코가 나눈 사색의 기록 <경계에서 춤추다>나 음악인 루시드 폴과 마종기 시인이 쓴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이 외에도 한나 아렌트와 카를 야스퍼스의 서간집도 있고,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 사이에 오고 간 아름다운 편지들도 있다. 김혼비 작가와 황선우 자가 사이에 오고 간 편지를 모은 책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역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형식으로 책이 출간되는 걸 보면 편지라는 독특한 형식이 우리에게 주는 매력이 꽤나 크다고 해야 할까.


며칠 전에도 나는 이와 같은 형식의 산문집을 한 권 읽었다. 잡지사의 직원과 잡지사의 고정 필진으로 만나 열 살이라는 나이 차이와 작가와 잡지사 직원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편지라는 사적이고 긴밀한 매체를 통해 사연을 주고받았던 데에는 남들이 알 수 없는 두 사람만의 비밀이 존재했을 터, 그와 같은 비밀이 겉도는 이야기가 아닌, 현실적이면서도 동시대의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들로 채워질 때 비로소 책으로서의 가치를 갖게 될 터였다.


"작품에 담긴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이 작품에 담은 언어, 그 언어가 닿고자 하는 곳, 그것을 발견하려고 도착한 사람들, 모두를 연결하는 일이겠죠. 어쩌면 그것을 연결하는 큐레이터나 에듀케이터의 일조차, 미싱사의 손길처럼 하나의 일상적이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방식으로 가려진 마음을 발견하는 게 예술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마음을 가린 장막을 혼자서 모두 걷어내기는 어려워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가 삶에서 신뢰할만한 것, 지켜내야 할 것들을 발견하는 게 우리가 예술에서 구해야 할 진실이라고 생각해요. 마치 샤르댕의 정물에서 본 것들처럼요."  (p.44)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통해 만난 건희와 지연은 미술과 책을 좋아하는 이십 대의 기자와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다수 매체에 현대미술과 도시문화를 비평하는 글을 기고하는 삼십 대의 작가였다. 그들 사이에 놓인 공통분모는 미술과 그림이었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넓히면 대한민국이라는 보수적인 국가에서 태어난 두 여인일 수도 있고, 미래를 걱정하는 젊은 청춘일 수도 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같이 아름다운 것들을 오래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때로는 아름다움을 등지고 어두운 그늘에 숨어버리는 일상의 곁에 서 있어 주는 일일 거예요. 어차피 다 다른 삶인데 무슨 얘길 하겠어요. 전 그저 저 같은 삶도 있다고 보여줄 뿐이에요. 이건 이정표가 아니라 그냥 당신 삶의 두께를 늘리는 재료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p.87)


어제는 아나운서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한 윤여정 배우를 보았다. 어떻게 하면 윤여정 배우처럼 유연하게 늙어갈 수 있느냐는 한 젊은 방청객의 질문에 대해 그녀의 대답은 매우 확고했던 듯하다. 자신은 많은 경험과 삶의 고비를 넘겨 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얻어진 것일 뿐이니 굳이 노력하고 애쓰지 말라는 대답이었다.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자신에게 질문을 한 젊은 방청객이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고 유연한 노인으로 늙지 않아도 좋으니 비교적 순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람이 고된 환경에 처하면 처할수록 많은 깨달음과 지식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한 줌의 깨달음이나 지식이 고된 삶에 대한 대가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깨달음을 반납할지언정 편하고 순탄한 삶을 사는 게 백 번 나을지도 모른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어떤 존재를 사랑의 마음을 갖고 예쁜 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존재에 대한 확신이 생겨요. 몇 년 간 여러 전시장에서 한 작가의 작품들을 자주 만나다 보면 그런 단단한 예감이 불쑥 솟아오르거든요. 전 제가 오랫동안 지켜본 것들을 믿어요."  (p.176)


책의 제목도 밝히지 않은 이상한 리뷰가 되고 말았다. 김건희, 김지연이 쓴 <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라는 책이다. 나는 사실 우리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최고 권력자가 쓴 책인 줄 알았다. 공사다망하실 텐데 이런 낭만적인 책을 쓸 여유가 있으셨을까 하는 의문은 있었지만 외간 남자와도 1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하는 분이니 그 정도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살짝 들었었다. 그러나 책을 펼치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그분은 아니었다. 텔레비전에서 그분을 볼 때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걸 보면 이 책의 제목이 왠지 더 가깝게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 나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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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닿았던 바람은 엉기지 않고 이내 흩어집니다. 푸슬푸슬 흩어지는 바람이 길었던 여름을 단죄하려는 듯 웃자란 풀들을 훑고 사라집니다. 한소끔 불어 드는 바람에도 속절없이 흔들리는 옥수수 대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수군대며 길었던 지난여름을 회상합니다. 삶이란 결국 여름의 땀방울처럼 엉기고 뒤섞이다가 어느 날 문득 가을바람처럼 푸슬푸슬 흩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서먹하고 슴슴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서가에 꽂힌 시집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성복의 시집 <그 여름의 끝>이라거나 한정원의 시집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나태주의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 등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눈길조차 가지 않던 책들이었습니다. 이성복 시인이 쓴 시 한 수를 옮겨봅니다.


숲속에서


숲 전체가 쓰르라미 울음밭이었습니다

날개 빼면 손톱보다 작은 덩치가 숲을 가득 메웠습니다


쓰르라미 우는 쪽으로 다가가자 울음이 뚝 그쳤습니다

몇 발짝 물러서면 나뭇잎 사이, 번쩍이는 햇빛 사이

빛나는 노래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애써 마음먹으면 잡을 수도 있었겠지요

쓰르라미 잡히면 숲이 갇혀 숨죽이고

은밀한 나의 기쁨 끝날 테지요


내가 멀어지면 쓰르라미 울음소리 눈부십디다

여름날 해거름 쓰르라미 울음소리 귀를 찢었습니다


통상 우리는 시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생활로부터, 우리의 삶으로부터 시가 멀어진 까닭은 현대인의 팍팍한 삶에 시의 낭만은 감히 끼어들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시인의 언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치인의 언어입니다.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의 언어도 아닌데 그들이 하는 말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중 단 한 사람을 콕 찍어 말한다면 심하게 체머리를 흔드는 어느 정치인이라고만 하겠습니다. 씨불인다고 다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의 언어는 어느 이방인에게 하는 토착 원주민의 그것처럼 그저 웅얼거릴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쉼 없이 지껄입니다.


가을입니다. 아니, 언뜻 가을인 듯 느껴졌습니다. 시인의 언어가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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