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풀리자 운동을 하겠다고 아침에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개중에는 겨우내 보이지 않던 낯익은 사람도 있고, 숫제 처음 보는 얼굴도 더러 보인다. 도시 근처에 산이 존재한다는 건 얼마나 큰 복인가. 그러나 어느 도시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산의 크기는 매년 쪼그라들어 급기야 산이라고 명명하기에도 민망한 작은 언덕으로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매일 아침 오르는 산도 주변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산은 거대한 콘크리트 바다에 둘러싸인 작은 섬처럼 변해버렸다. 이 또한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고 없겠지만 말이다.

 

주택가 근처에서 숲과 자연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잃었다. 비단 '아름다움'만 잃은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감정들, 예컨대 연민이나 공감, 배려, 여유, 기쁨 등을 함께 잃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콘크리트 인공 구조물로부터 새로운 감정들을 학습한다. 이기심, 욕심, 시기, 질투, 배척... 시나브로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고 '괴물'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최근 보도된 뉴스에서 나는 '괴물'의 전형을 목도했다. 검사장 출신의 국민의힘 국회의원인 유모 씨가 당사자였다. 그는 파주의 한 병원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범인에게 범죄 은닉을 교사하고 자신이 제시한 방법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며 자신했다. 살인을 저지른 자를 경찰서로 끌고 가야 마땅할 텐데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리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더구나 그는 공정과 정의를 내세우던 검사 출신이 아니었던가. 돈과 빽이 있으면 살인도 감출 수 있다는 발상이 그가 내세우던 공정과 정의였던가. 의사 면허도 없는 무자격자 원장과 의료 기구를 파는 영업사원이 한 명도 아닌 두 명씩이나 잇따라 살해했는데... 가해자가 아닌 유가족의 입장에서 그는 단 한 번이라도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 뉴스에서는 그것마저 살인이 아닌 수술이라고 했다. 그러나 의사면허도 없는 일반인인 내가 우리집이 아닌 병원에서 사람을 죽이면 수술이고, 집이나 야외에서 저지르면 살인이라는 논리는 과연 합당한가.

 

보도가 나간 후에도 국민의힘이나 해당 국회의원은 이렇다 할 의견 표명이나 사과 한마디 하는 걸 보지 못했다. 살인범에게 범죄 은닉을 교사하고 국회의원입네 폼을 잡는 그가 뻔뻔스럽기 그지없음에도 우리 사회는 크게 분노하지 않는다. 먼 나라에 사는 아시아인이 희생된 것에 크게 분노하였던 것처럼 돈과 권력으로 살인도 감출 수 있다고 자신하는 그들을 향해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힘없는 사람들의 목숨도 중요하다!"라고.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우리는 '아름다움'을 잃고 급기야 유모 의원과 같은 괴물만 길러내고 있다. 이것이 공정과 정의라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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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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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쓰는 글의 문체에 스미게 하는 직업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연인 신경숙을 사랑했던 게 아니라 신경숙이라는 문체를 사랑해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신경숙이라는 문체는 등단 이전부터, 내가 비로소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접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존재했지만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또 다른 문체였는지도 모른다. 하여 나는 <겨울 우화>로부터 비롯된 신경숙 읽기에 빠져들었고, <외딴방>이나 <리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아름다운 그늘>, <자거라 네 슬픔아>, <모르는 여인들> 등 시간의 순서를 도외시한 채 신경숙이라는 문체에 탐닉했었다. 그리고 <엄마를 부탁해>로 이어지던 신경숙 읽기는 그해 불거진 표절 의혹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긴 휴지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없는 단 하나의 문체인 신경숙은 재생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신경숙 읽기를 멈추었던 수많은 독자 중 한 명인 나로서는 작가의 삶이 지속되는 한 이른 복귀를 고대할 수밖에 없었고, 2015년 세상으로부터 불현듯 사라졌던 작가는 6년이라는 긴 침묵을 깨고 2021년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통해 세상에 복귀했다. 신경숙 읽기에 목말랐던 나는 작가의 복귀가 무척이나 반가웠고 <아버지에게 갔었어> 역시 단숨에 읽어버렸다. 기꺼운 마음으로.

 

"어떤 사실들은 때로 믿기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이라 시간이 흘러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끝내 사실일까? 싶은 의문과 회의가 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싶어서 사실이 우연이나 조작에 의한 것처럼 보이고 어떤 형식에 맞추기 위해 도식을 끌어온 것처럼 여겨지며 상상에 의한 허구가 오히려 사실처럼 느껴진다."  (p.103)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여동생을 따라나서자 J시의 오래된 집에는 아버지 홀로 남게 되었다.'로 시작되는 길고 긴 서사는 신경숙이라는 문체로 인해 진한 슬픔을 동반한 채 아프게 이어진다. 몇 년 전 딸을 잃은 '나'는 엄마가 없는 고향집에 돌아온 후 비로소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대면한다. 전염병으로 두 명의 형을 잃고 얼떨결에 종손이자 장남이 된 아버지, 혹시나 마지막으로 남은 아들마저 전염병으로 잃게 될까 노심초사했던 조부모의 걱정으로 인해 학교마저 다닐 수 없었던 아버지, 이른 나이에 부모를 잃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 그리고 온몸으로 겪어냈던 70년의 한국현대사가 주름살처럼 깊게 파여 수면장애로 드러나고 있는 안타까운 삶.

 

"아버지를 전혀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자 등을 기대고 있는 현관문이 차갑게 느껴지고 생각지도 못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나는 날이 밝자마자 어젯밤 아버지가 편지를 태우던 헛간으로 가보았다. 검은 재가 수북했다. 무슨 편지를 태운 것인지. 나는 발로 잿더미를 헤집어보다가 주저앉았다."  (p.238)

 

시조창처럼 유장한 가락의 신경숙이라는 문체는 소설 읽기가 못내 힘에 겨웠던 내게 와서 매 문장 마침표를 지나칠 때마다 툭툭 끊겨 뒤뚱거렸다. 한국전쟁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작품 속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나의 아버지에게 오버랩되어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희미해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아버지는 국군과 인민군의 혼재 속에 한국전쟁을 겪었고, 돈을 벌기 위해 갔던 서울에서 4·19 혁명의 현장을 목격했으며, 여섯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키웠던 소의 값이 폭락하자 소를 타고 소몰이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버지로부터 풀려나온 한 올 한 올의 한국 근현대사는 자식들과 주변 인물들의 증언 혹은 편지를 통해 리얼리티를 더한다. 이에 더하여 중동 건설 노동자로 이주했던 '큰오빠'의 삶과 이를 기억하는 조카 등 아버지를 둘러싼 다른 가족들의 삶을 통해 아버지의 다양한 모습이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아버지 말을 받아적다가 움찔했다. 내가 어떤 일에 마음이 옹졸해져서 쓰기를 주저했던 말들이 메마른 아버지 입에서 풍부하게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내게는 황송한 내 자식들, 이라고도 했으나 나는 차마 그말은 적지 못했다. 무릎 위의 노트북이 자꾸 미끄러지려고 해 나는 노트북을 아버지 침대에 올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자판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아버지는 무슨 말인가 더 하고 싶은지 방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p.415)

 

소설 속에서 '나'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글쓰기를 아버지를 통해 이어간다. 그것은 아버지를 통해 깨닫게 된 시간의 흐름과 나이 듦에 대한 통찰이며, 약하디 약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며, 뻗대고 저항한다고 해도 끝내 순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다. 아버지는 단지 자식들을 키우고 보듬어주던, 언제까지고 '나'의 보호자로만 살아가는 관계 속의 존재만은 아니고, 그 모든 관계 속에서도 고통과 슬픔을 감내하는 개별적인 한 인간이었음을 소설 속의 '나'는 말하고 있다. 아버지에게도 누군가의 따뜻한 체온이, 삶을 지탱하는 절절한 위로가 순간순간 필요했음을 소설 속의 '나'를 통해 문득 깨닫게 된다. 끊김 없이 유장하게 이어지는 신경숙이라는 문체가 내게 와서 돌부리에 걸린 듯 휘청거리며 툭툭 끊겼던 까닭은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가 가슴 한켠에 옹색한 모습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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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분야에 친구가 존재한다는 건 우산장수와 짚신장수 아들을 둔 엄마의 심정처럼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편들어 줄 수 없는 어정쩡한 상태에 놓인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친구를 퇴근길에 만나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이 친구의 사정이 여간 딱한 게 아니었다. 코로나 정국에 사정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위례 신도시에서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에 LH 투기 사건이 터지면서 개점휴업 상태를 이어오고 있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푸석하고 핼쑥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좁은 국토에 비해 인구밀도가 높은 대한민국의 사정상 부동산 가격의 상승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석영의 소설 <강남몽>에도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부동산 투기는 그 뿌리가 깊다. 그렇다면 이전 정부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많은 재산을 축적한 대부분의 부호들이 개발지에 대한 고급 정보와 투기에 가까운 공격적인 부동산 매입을 통해 재산을 형성해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부동산 투기에 대한 지금과 같은 전국 규모의 대대적인 단속을 단 한 번도 실행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전 국민이 재산의 90% 이상을 부동산으로 보유하고 있는 마당에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면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GDP에서 건설업의 비중이 15~20%로 OECD 국가의 평균에 비해 매우 높은 우리나라의 사정상 GDP를 끌어올리기 위한 가장 손쉬운 수단이 공적자금을 통한 SOC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빚내서 집 사라'고 한 데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이해충돌방지법'의 통과를 미적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국회의원인 자신들조차 그 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어느 하나가 좋아지면 좋았던 다른 하나가 나빠지는 건 피할 수 없다. 예컨대 '김영란법'이 그러했고, 증권거래법이 그러했다. '김영란법'이 통과될 때만 하더라도 얼마나 말이 많았던가. 오죽하면 누더기법이라고 했겠나. 주가를 조작하는 소위 '작전 세력'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증권거래법만 해도 그렇다. 아무리 단속을 해도 작전 세력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대대적인 단속의 칼을 빼들지 않는 까닭은 단순한 엄포나 소문만으로도 주가가 크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주식투자자들이 마치 이익단체처럼 정부의 정책에 저항할 수 있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 기반한다. 사회가 투명해지고 공정해지는 건 좋은데 그로 인해 손해를 본 사람들이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하는 꼴은 정부로서도 달갑지 않은 것이다. 차라리 어지간한 부패는 눈감아주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다.

 

지금은 크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합동수사본부의 가시적인 성과가 발표되고 투기자에 대한 처벌이 시작되면 부동산 가격의 하락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번 겪고 나면 그와 같은 단속이 언제 또 재개될지 모르는 까닭에 부동산에 대한 투자를 전에 비해 꺼려하거나 매우 조심스러워할 것임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부로서는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대적인 부동산 투기 단속을 통해 일반 국민의 재산가치를 떨어뜨릴 것이냐, 아니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질끈 눈을 감을 것이냐. 현 정부는 어느 정부도 시도하지 않았던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그 바람에 공인중개사인 친구는 개점휴업 상태의 어려운 시절을 감내하고 있고...

 

오늘은 금요일. 친구가 어렵다는데 개발지구에 땅이라도 한 필지 사주면 좋겠지만 그럴 주제가 못되니... 위로 전화라도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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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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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추억을 한 권의 책으로 읽는다는 건 푸근한 안개 속에서 온종일 헤매는 일이다. 길은 있으되 보이지 않으며, 시간은 안개 속에 뒤엉켜 뒤죽박죽 흩어지지만, 왔던 길을 고샅고샅 되짚어 볼 필요도, 또는 시간의 순서에 맞춰 읽었던 추억들을 가지런히 나열할 필요도 없이 나는 그저 께느른한 오후를 적당히 즐기며 안개처럼 몽롱해질 뿐이다. 그렇게 한나절 즐기기에는 스가 아쓰코의 산문집 <밀라노, 안개의 풍경>이 제격이다. 1929년생인 작가가 해외여행조차 원활하지 않았던 1960년대 패전국 일본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올라 십삼 년간 이탈리아 밀라노에 거주했던 경험을 담담히 풀어낸 이 책은 이방인의 눈에 비친 오래전 이탈리아의 풍경을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놓는다.


"저녁 무렵 창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안개가 자욱이 깔리곤 한다. 창에서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플라타너스의 가지 끝이 눈 깜짝할 사이 자취를 감추고, 끝내 굵은 줄기까지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가로등 밑을 생물처럼 달려가는 안개를 본 적도 있다. 그런 날에는 몇 번이고 창으로 달려가 짙은 안개 너머를 내다본다."  (p.10)


예순이 넘은 나이에 첫 작품을 발표하고 팔 년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단 다섯 권의 에세이를 출간했다는 스가 아쓰코의 첫 에세이인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그녀가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십삼 년간의 시간 동안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을 동양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문학도로서 보고, 만나고, 겪었던 모든 것들이 단아한 문체에 실려 독자들의 가슴에 안개처럼 스민다.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모인 코르시아 서점의 일원으로 청춘의 한 자락을 보내며, 낯선 땅에서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과 교류했던 스가 아쓰코. 교회 당국의 탄압과 내부 분열로 코르시아 서점이 문을 닫고, 서점 동료이자 남편이었던 페피노와의 결혼생활도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으로 오 년 만에 막을 내렸지만, 십삼 년간의 밀라노 생활은 귀국 후의 작가에게 풍성한 문학적 자양분을 제공한 듯하다.


"무스타키 대신 레너드 코언을 건네주던 가티, 남편을 잃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던 나에게 수면제를 먹을 게 아니라 상실의 시간을 인간답고 성실하게 슬퍼하며 살아야 한다고 엄하게 꾸짖던 가티는 이제 거기 없었다. 그의 한없는 밝음에, 더는 나를 짜증나게 하지 않는 가티의 모습에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p.111)


절제되고 과하지 않은 감정으로 자신의 청춘 시절을 밀도 있게 그려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글로 쓰이지 않았던 긴 시간의 침묵이 작가의 내부에서 이미 완성된 어떤 것으로 서서히 재현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침묵으로 완성한 옛 기억의 엘레지. 전통과 구습에 얽매인 고국에서의 생활에 갑갑함을 느끼고 1960년대의 이른 시절에 유학과 국제결혼이라는 파격적인 선택을 감행했던 작가의 이야기는 21세기를 사는 작금의 젊은이들에게도 공감과 동경의 마음을 품게 한다.


"그러나 환상의 시간은 언젠가 어쩔 수 없이 현실로 회귀한다. 터무니없는 꿈을 현실과 맞바꾸며 살아온 베네치아는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멸망이라는 운명의 무게를 느끼고 문득 진심 어린 한숨을 토해낸다. 언젠가 호텔방 머리맡에서 들었던 은밀한 물소리도 그런 순간에 나온 베네치아의 혼잣말이었는지 모른다."  (p.207)


슬몃 다가온 봄이 어느새 온 마을을 감싸는 농무처럼 흐드러진 봄을 예고하고 있다. 산수유꽃이, 도로변의 개나리가, 봄햇살을 받은 목련이 온통 봄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소설 '무진기행'을 읽으면 때로 골짜기마다 수액처럼 피어오르는 는개의 축축한 감촉이 살아나는 것처럼 <밀라노, 안개의 풍경>을 읽으면 남편을 잃고 밀라노의 안개 속에서 절망과 슬픔의 시간을 보냈을 스가 아쓰코의 청춘 시절이 그리움처럼 밀려올 것만 같다. 우리는 다만 누군가에게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남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봄이 추억과 그리움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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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할 때가 더러 있다. 미국 시민도 아닌 내가 남의 나라 소식에 뭐 그리 놀랄 일이 있을까마는 오래전에 이민을 간 여동생이 뉴욕에 살고 있는 까닭에 여동생 부부를 비롯한 어린 조카들의 안부가 몹시 걱정이 되고 말할 수 없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작년 이맘때의 코로나19 팬데믹 초창기에도 그러했고, 동양인 혐오 범죄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최근에도 걱정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여동생 가족의 신변이 불안한 것은 어쩌면 미국 사회에서 소수민족이라는 비주류에 속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이 미국의 우방이자 동맹국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유럽계 백인종이 다수인 미국에서 아시아 인종은 소수민족으로서의 차별과 냉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차별금지법이 존재하는 국가에서 차별로 인한 폭력의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만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어긋나는 법, 차별금지법도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비주류에 속한 그들에게 공포,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국방부로부터 부당한 전역 통보를 받고 복직 투쟁을 하던 변희수 하사가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를 언론 매체를 통해 들었다.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는 이유로 강제 전역을 통보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인권위의 결정도 소용없었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비주류의 삶을 선택한다는 건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거는 일이다. 그것이 일시적인 기분에 의해 즉흥적으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비주류를 선택할 수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 차별과 냉대를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비주류의 길을 간다는 건 차마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민자는 다시 돌아올 수라도 있지만 난민이나 성소수자는 되돌릴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주변에는 성소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언론에서 접할 때마다 우리 사회의 미개함에 분노를 금치 못한다.

 

고인이 된 변희수 하사의 기사는 영국의 BBC나 가디언에도 소개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차별금지법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낯부끄러운 설명도 있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꼴통 짓거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사회가 바뀌고, 국민들의 인식이 바뀌면 언젠가 그들이 성소수자를 향해 겨누었던 그들의 칼날이 오히려 자신들의 목을 겨눌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입법을 미루고 미루었던 이해충돌방지법이 결국 지금의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의 목을 겨누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속담에 '당장 먹기엔 곶감이 달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자신들에게 이익인 듯 보이지만 대가를 치를 날이 곧 닥친다는 뜻일 게다. 어렵고 힘든 비주류의 길을 스스로가 원해서 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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