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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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집은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간다. 그래서인지 나는 짐짓 시를 읽는 체하며 시인의 산문집을 읽곤 한다. 1990년대 이후 나로부터 차츰 멀어진 시는 좀체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데면데면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제는 숫제 내쪽에서 먼저 꽁지를 빼기도 한다. 말간 시구(詩句)들이 강물 위에 뜬 낙엽처럼 한동안 흔들리다가 끝내 초점을 잃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 편의 시는 내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 채 허망한 발길을 되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시는 해독이 어려운 외계어인 양 나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져 갔다. 휴대폰이나 인터넷이 없던 시기에 내게 있어 시집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가장 손쉽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장 편한 도구이자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는데 말이다. 이제는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며 짐짓 시를 읽는 체하는 지경에 처하고 보니 왠지 모를 아쉬움과 아련한 그리움이 함께 드는 것이다.


김소연 시인 역시 시집보다는 산문집을 통해 먼저 알게 되었다. 2008년에 출간된 양장본의 산문집을 나는 마치 리듬을 벗어난 시를 읽듯 떠듬떠듬 읽어나갔던 것이다. 시인의 정성과 아름다운 마음이 별처럼 쏟아지던 책이었다. 아, 제목마저 어쩜 그렇게 딱 들어맞는지... 시인이 쓴 <마음사전>을 읽으며 나는 비로소 예전에 잊었던 시적 감흥을 조금씩 되살려낼 수 있었다. '햇살에도 파도가 있다/소리는 없지만 철썩대고 있다/삭아갈 것들이 조용하게 삭아가고 있었다'고 노래했던 시인의 짧은 시구가 마음을 헤집고 온통 어수선한 난장을 치던 밤, 나는 차마 잠들지 못한 채 검푸른 새벽을 맞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의 주장을 듣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에 더 크게 설득되고 더 큰 경이감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도, 되도록 생각한 바와 주장하는 바를 글로 쓰지 않고, 다만 내가 직접 만났거나 직접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p.10 '책머리에' 중에서)


'겨울 이야기'에서 시작된 책의 순서는 차례로 봄, 여름, 가을을 지나 '다시 겨울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지만 가만한 계절의 응시가 시인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고 힘겨운 시간들이었겠다, 하는 생각을 문득 하면서 한 곳에 머물지 않는 하루하루가 어느 누구에게도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음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오롯이 경험으로만 채워진 삶의 조각들이 기억의 바구니에 수북수북 쌓이던 밤, 글로 채색되지 않는 수많은 반복과 재생의 일상들이 본데없는 직선과 사선의 불필요한 교차만 그려내고, 구겨진 파지 위로 드리워진 아침 햇살이 드문드문 옅은 그림자를 펼쳐놓던 어느 아침. 나는 비로소 시인의 하루를 이해한다.


"시를 쓸 때에도 자주 이런 종류의 괴로움과 만난다. 가장 오래 탐구해왔고 가장 오래 지속해왔던 일에 대해 오히려 모르겠다는 입장이 될 때마다 두려움과 고단함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나의 무지에 대하여 고단함을 느끼지 않고 달갑게 여길 때에야 간신히 새로운 모름에게로 한 걸음 걸어 들어갈 힘이 생긴다. 모른다고 느껴질 때보다 안다고 느껴질 때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모른다는 것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p.83)


별것도 아닌 나의 일상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 내가 지나쳐온 일상 속에 마법의 가루를 흩뿌려놓은 듯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걸 보게 된다.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별의별 일들로 변화하는 놀라운 마법. 나태주 시인의 시구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가 마법의 주문처럼 외워지던 순간. 시인이 기록한 계절의 순간들은 그저 별것도 아닌 것에서 이렇게 다채로운 옷을 갈아입고 마치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신고 호박마차에 올라타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경험할 필요 없는 일들만을 경험하며 살다가 인생 자체를 낭비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지라도, 커다란 후회는 안 해야겠다 생각한다. 수많은 인생 중에 시행착오뿐인 인생도 있을 테고, 하필 그게 내 인생일 뿐이었다고 여길 수 있었으면 한다. 대신, 같은 실수가 아닌 다른 실수, 같은 시행착오가 아닌 새로운 시행착오, 겪어본 적 없는 낭패감과 지루함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이미 비루함과 지루함,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하기 때문이다."  (p.252)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며 내가 보낸 하루와 시인이 경험했을 이 하루에 대해 생각해본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약속하고, 가보지 않은 식당의 문턱을 넘고, 약속했던 시간을 확인하며 스마트폰 속의 낯선 기사를 읽고, 낯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초조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하루. 때로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익숙하지 않은 공원의 보도 위를 거닐던 시간들. 그런 무감한 일상들이 시인의 손길을 거쳐 익숙함의 탈을 벗는 모습은 그저 신비롭다. 창밖에는 농익은 봄햇살이 노을 뒤편으로 숨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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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뒤덮었던 황사가 물러가자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목은 칼칼하고 연신 입안을 헹구어도 목구멍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영 가시질 않지만 그래도 시야에 들어오는 푸른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지는 것이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도 황사 먼지를 뒤집어쓴 탓인지 보닛 위가 온통 뽀얗다.

 

어제는 서울시장 후보 TV 토론회가 있었다. 그닥 재미도 없고, 밤도 늦었던 까닭에 끝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오세훈 후보도 많이 변했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단일화 경선 TV 토론회 당시만 하더라도 오세훈 후보는 “주택 지정에 관여했으면, 부당한 압력을 받은 서울시 직원이나 서울주택도시공사(SH) 직원은 양심선언을 해달라”며 “한 사람이라도 오세훈이 관심을 표했거나 직간접적으로 압력을 가했다고 기억하면 나서달라. 그러면 바로 후보직에서 사퇴한다”며 당당한 모습이었다. 말하자면 처가가 보유했던 내곡동의 그린벨트 지역은 위치나 존재조차 알지 못했으며, 관심도 없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게다가 오 후보가 서울시장으로 있던 2009년 8월 그 땅이 보금자리주택 사업지구로 지정돼 36억 5천만 원의 보상금을 챙기게 되었다는 사실도 여전히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0년 그가 국회의원으로 여의도에 입성했던 당시 그가 신고했던 재산신고 내역에는 그 땅이 버젓이 올라 있었다. 2007년 오 후보가 서울시장으로 있을 당시에도 재산신고에 올라 있었던 건 물론이다.

 

오 후보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말임을 입증하는 서류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자 그는 다시 말을 바꿔 "해당 땅이 지금 논란이 되는 땅인지 알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그러던 차에 내곡동 보금자를 추진하기 직전이었던 2005년 6월 13일 토지 측량을 하기 위해 내곡동 땅을 방문했던 오세훈 후보를 보았다는 목격자가 등장했다. 내곡 지구 개발 최초 제안은 2006년 3월 29일에 있었지, 제안에 앞서 SH가 내곡 지구 개발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조사 용역이 선행되는데 이 시기가 묘하게도 오 후보의 처가가 측량을 실시했던 날짜 9일 뒤였다. 즉 2005년 6월 22일 조사 용역이 시작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린벨트 해제와 셀프 보상에 앞서 깊숙이 개입한 셈인데 TV토론에서 그는 후보직을 사퇴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오히려 "기억 앞에 겸손하겠다"는 말로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지를 없애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우리말에 "초록은 동색이다"라는 말이 있다. '풀색과 녹색은 같은 색'이라는 뜻으로, 처지가 같은 사람들끼리 한패가 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오세훈 후보가 처지가 비슷한 안철수 후보를 공동 선대위원장으로 받아들이더니 안철수 대표를 점점 닮아가는 모양새다. 근묵자흑이라고 했던가. 안철수 대표가 거짓말로 명성을 떨치자 그게 부러웠던지 오세훈 후보 역시 눈만 뜨면 새로운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 조금 더 지나면 거짓말로는 안철수 대표를 능가할 태세인 것이다. 그야말로 청출어람.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게 마련이고,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져 과거에 자신이 했던 거짓말로 인해 더욱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게 사람 사는 이치이다. 그러느니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히고 후보직을 물러나는 게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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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 - 50인의 증언으로 새롭게 밝히는 박원순 사건의 진상
손병관 지음 / 왕의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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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중기부터 근세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유럽, 아메리카,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행해지던 마녀나 마법 행위에 대한 추궁과 재판서부터 형벌에 이르는 일련의 행위'를 우리는 '마녀사냥(witch-hunt)'이라 부른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에 따르면 당시에 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마녀 혹은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고 하니 종교를 빙자한 인류의 야만성은 정말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마저 마녀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고 하니 말 다했지 뭔가.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 중에 다수가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와 같은 마녀 사냥의 배후에는 가톨릭교회가 가장 약했던 시기에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를 질타하기 위해 예수와 대립되는 존재로 마녀를 만들어냈던 도미니코 수도회의 영향이 컸다는 게 정설이다. 말하자면 '마녀사냥'이란 본질적으로 절대적으로 믿는 어떤 대상을 지키기 위해 가상의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행위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 있어 '마녀사냥'은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내 생각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예수'라는 하나의 절대자가 분화하여 지켜야 할 대상만 교묘하게 넓혀졌을 뿐 예나 지금이나 '마녀사냥'은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예컨대 중세인들이 믿던 예수는 이제 다양한 이념 체계, 각자가 지켜야 할 다양한 욕망 체계 혹은 권리 체계에 투영되어 과거에 하나였던 예수가 작금에 이르러 수백. 수천의 예수로 부활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 바람에 시도 때도 없는 마녀재판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게 되었고 말이다.

 

서론이 길었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마녀사냥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만들었던 사건은 고인이 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었다. 신문에 무차별적으로 보도되는 기사는 모두 피해자 측의 주장뿐이었고,  박 전 서울시장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이나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억울한 사정을 보도하는 기사는 일체 없었다. 말하자면 편파적인 언론 보도로 인해 피해자의 입장에 서면 정의로운 것이요, 가해자(라고 말해지는)인 박 전 시장의 편에 서면 불의이자 악의 편인 양 극단적으로 갈리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신이 아닌 인간이 하는 일에 100% 정의라는 게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그러나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언론이 이렇게 끌고 가는 바람에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그 어떤 의심도 제기하지 못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이것이 과연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국가에서 가능한 일이었던가. '내 주장만 옳고 너희는 틀렸으니 그 입을 모두 닫으라'는 주장은 독재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그러나 그러한 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여론을 선도하는 언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고 싶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했던 데카르트의 명제는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같은 팩트를 놓고도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게 민주주의이다. 전체주의와 달리 민주주의는 선택이 중요하지, 옳고 그름이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유교의 영향으로 늘 옳고 그름에 집착한다. 사고의 여백 없이 정답을 찾는 교육도 이런 성향을 부추긴다고 생각된다. 전체주의는 '인민의 의지'라는 절대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전체주의가 위험한 건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가운데 독재자의 의지가 인민의 의지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p.340 '추천사' 중에서)

 

이 책 <비극의 탄생>을 쓴 손병관 기자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박 전 서울시장을 잘 아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생전에 일면식도 없었던, 남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비극의 탄생>을 주저 없이 구매하여 읽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어느 한쪽의 주장만 일관된 보도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5대 5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10대 1, 혹은 100대 1이라도 되어야 옳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언론은 그런 면에서 모두 비겁했다. 비겁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기에 영합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겠다는 생각은 이를 보도했던 기자들 중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박 시장과 잔디(조사 편의를 위해 경찰이 피해자에게 부여한 별명)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들만이 안다. 그러나 당시 잔디가 시장이 자신에게 한 행동이 안희정의 그것과는 다르다, 손녀딸처럼 생각한다고 인식했다는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p.121)

 

나는 책을 받은 날부터 낱글자 하나까지 꼼꼼하게 읽었다. 다행히도 저자는 기사를 쓰는 기자답게 자신이 취재한 바를 육하원칙에 의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김재련 변호사를 비롯한 피해자 측의 주장 역시 가감 없이 싣고 있었다. 우리가 실체적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박 전 시장의 입장을 대변할 만한 증거나 지인들의 인터뷰, 혹은 저자가 취재한 새로운 사실들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던 기울어진 세월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업 언론과 정치 모사꾼들에 의해 만들어진 여론 지형의 현주소는 가해자 박원순에 대한 마녀사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리인은 박 전 시장 핸드폰의 포렌식을 중단하도록 한 법원의 결정에 격렬히 항의했다. 상대의 핸드폰에 있는 성추행 증거라면 피해자의 핸드폰에도 있어야 한다. 신속한 진상규명을 원한다면 피해자의 핸드폰을 수사기관에서 포렌식해 증거를 찾도록 하면 된다. 지름길은 놔두고 법원 결정이나 비난하며 힘든 길을 가야 할 이유가 없다."  (p.226 '서울신문 곽병찬 논설고문의 칼럼' 중에서)

 

박 전 시장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도 벌써 해를 넘겨 아홉 달이 흘렀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박 전 시장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와 공격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누군가의 앞에서 큰소리로 비난하는 자여야만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부여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박 전 시장과의 일면식도 없고, 그의 처신에 대해 항변하고자 <비극의 탄생>을 읽었던 게 아니다. 피해자를 매도하려는 의도 또한 눈곱만큼도 없다. 다만 어떤 사실에 대해 우리가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 자체가, 혹은 진실을 향한 우리의 자세가 무척이나 잘못되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 역시 그러했으리라.

 

기자를 멸칭하는 단어 '기레기'(기자+쓰레기)는 2009년~2010년경부터 스포츠 커뮤니티 등에서 운동선수에 대한 별칭 혹은 비하하는 표현 혹은 기자에 대한 멸칭으로 혼용돼 쓰이다가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기자에 대한 일반적인 멸칭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요즘에는 이보다 더한 멸칭인 '기더기'(기자+구더기)도 쓰인다고 하니 씁쓸하기만 하다. 조중동으로 칭해지는 보수 언론은 수십 년 동안 편파보도 혹은 왜곡보도를 일삼았지만 지금까지도 시정되지 않은 채 꿋꿋이 유지되고 있다. 모든 사실을 해석함에 있어 개인의 이념이나 사상이 투영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기자라면 적어도 양측이 제시하는 증거나 주장을 듣고 판단함이 옳지 여론이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해서 기자들마저 부화뇌동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기레기' 소리를 듣는 것이다. '기레기'의 탄생은 어쩌면 기자 스스로가 자초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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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부산의 지자체장을 뽑는 보궐선거가 1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사실 보궐선거라고 하면 사람들의 관심에서 한참이나 멀어지게 마련, 가뜩이나 활동하기에 적당한 날씨에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치러지는 보궐선거는 누가 당선되든 관심조차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대통령 선거를 1년남짓 남긴 시점에서 치러진다는 특이성에 더하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도시, 서울과 부산의 지자체장을 동시에 뽑는다는 점에서 지역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사람들조차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수혜자는 누구이며,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일까? 다들 동의하겠지만 가장 큰 수혜자는 오세훈 후보일 테고, 가장 큰 피해자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아닐까 싶다. 오세훈 후보는 야권의 최종 후보가 되지 못했더라면 하마터면 잊혀진 계절, 아니 잊혀진 정치인이 될 뻔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건 물론 LH 부동산 투기와 맞물려 여권의 지지세가 주춤해지자 유력한 차기 서울시장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람의 앞날은 정말 모를 일이다. 찌질하게만 보였던 그가 이렇게까지 급부상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다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어떠한가. 야당 단일후보 경선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지율 1위를 구가하던 그는 오세훈 후보에게 밀려 서울시장 후보직에서도 사퇴하고, 김종인 대표의 눈총과 냉대를 감수하면서 구차한 정치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표면상으로는 오세훈 후보를 돕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라도 국민들에게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완전히 잊힐 판인지라 오세훈 후보에게 견마지로를 다하는 듯 행세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작지만 일개 정당의 대표가 다른 정당의 후보를 위해 할 짓은 아닌 듯 보이는데 말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이 1914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제목이 '너 참 불쌍타'라고 했던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안철수 대표를 만난다면 '레미제라블'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사에서 안철수 대표는 왜 유독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었을까? 나는 그 원인을 안철수 대표의 거짓말에서 찾고 싶다. 실제로 2013년에 출간된 '안철수의 거짓말'이라는 책도 존재한다.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일삼았으면 책으로까지 나왔을까 싶겠지만 저자인 김구현에 따르면 안철수의 거짓말은 너무나 쉬운 소재였던 까닭에 책을 집필하는 데 걸린 시간도 1달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책이 출간된 후에 안철수 대표는 자신의 언행을 삼가고 조심했을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2016년 12월 6일 기사에 따르면 "새누리당과 연대는 없다. 저는 부패세력과 연대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강조했었는데 그마저도 어긴 채 오세훈 후보의 조력자를 하고 있다.

 

정치인의 거짓말이야 자주 있는, 흔하디 흔한 일인지라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지만 안철수의 거짓말은 뭔가 특별하다. 그리고 짠하다. 그나저나 라이어(Liar) 안철수를 자신의 선거 조력자로 쓰고 있는 오세훈 후보는 과연 그것이 득일지, 실일지... 혹시나 선거 이후에 안철수 대표뿐만 아니라 오세훈 후보에게도 '레미제라블'을 외치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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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1-03-27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절히 하고 싶은 말..

꼼쥐 2021-03-28 17:14   좋아요 0 | URL
저도 테레사 님이 그 말을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앞으로 올 사랑 - 디스토피아 시대의 열 가지 사랑 이야기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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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PD의 책을 읽을 때면 번번이 '어렵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얕은 탓이라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혹시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건 그 이유를 남들에게 드러냄으로써 내 얄팍한 지식이 탄로날까 봐 몹시 저어하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나는 정혜윤 PD의 책이 새로 출간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읽는 것이다. 하나는 정혜윤 PD의 지적 소양이 깊은 것에 대한 부러움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정혜윤 PD의 문체에 익숙해진 데서 오는 편안함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후자의 이유 때문에 잘 이해도 하지 못하는 책을 꾸역꾸역 읽게 되는지도 모른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썼던 흑사병 시대를 포함해 어느 시대든 최고의 글에는 글 속의 누군가가 가치 있는 변화를 원한다.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사실은 나쁘기도 하지만 좋기도 하다. 상상해본 적 없는 거대한 단절의 시기인 지금, 이 균열 속에서 좋은 무엇인가가 나와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리석음은 꽃피고 나쁜 일은 벌어진다."  (p.23 '서문' 중에서)

 

그렇다. 코로나 정국이 길게 이어지면서 작가가 떠올렸던 건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이었고, 그 암울했던 시기에 쓰인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었다. 작가는 서문에서 '나는 이 디스토피아 시대에 유토피아적 열정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고 쓰고 있다. 2020년의 우리는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에서 국경은 폐쇄되어 자국을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빠졌으며, 작게는 각자의 집에 갇힌 채 고립된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 사이에 우리는 57일간의 유례없는 긴 장마를 겪었고, 지구 곳곳에서 초대형 산불과 폭염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러한 '변화'에 앞서 작가는 우리가 잃은 것, 슬픔과 고통, 죽음 등에 대해 알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럴 때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 단절을 뚫고 창조적인 사랑의 단어들, 새로운 사랑의 이야기들이 나와야 한다. 슬픔에서 행복이 발효되도록 해야 한다. 비극을 겪은 후에는 비극적이지 않은 결말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토비와 젭의 사랑 이야기다."  (p.163)

 

책은 서문에 이어 첫째 날, '미래인지 감수성', 둘째 날, '무엇을 할 힘과 무엇을 하지 않을 힘', 셋째 날, '그녀는 그녀 삶의 예언자가 되었다', 넷째 날, '당신을 하나의 이야기로 파악해보라고 제안한다', 다섯째 날, '왜 상처의 말을 들어야 하나요?', 여섯째 날, '거울 깨기', 일곱째 날, '다른 누구도 더는 건드리지 말라', 여덟째 날, '이봐, 주위를 좀 보라니까!', 아홉째 날, '사랑하는 00과 함께 살기', 열째 날, '오늘의 가장 좋은 시도와 내일의 가장 좋은 시도 사이에서'로 끝을 맺는다. 작가는 이 많은 이야기들 속에 우리가 몰랐던 코로나 시대의 여러 모습들과 그럼에도 우리가 이 단절의 시대를 이겨내기 위해 읽어야 할 책들을 제시한다.

 

"종자를 지킨 바빌로프와 동료들은 굶어 죽었지만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 종자들에서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먹는 많은 음식이 나왔다. 이들의 이야기는 꼭 크리스마스 때 듣는 성인들의 이야기 같다. 성 바빌로프의 날. 자신의 생존 말고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나를 매료시킨다."  (p.277)

 

마거릿 애트우드의 미친 아담 3부작,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 미셸 우엘벡의 <세로토닌>, 찰스 부코스키의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작은 우주들>, 슬라보예 지젝의 <팬데믹 패닉>, 게리 폴 나브한의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등의 책을 관심도서 목록에 추가하면서 언제 읽을지도 모르는 내일을 허술하게 약속한다.

 

코로나로 인한 분열과 격리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는 한 뼘쯤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 자신과의 관계는 두 배, 아니 어쩌면 수십 배 더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늦은 밤 깊게 우려낸 차 한 잔을 손에 들고, 빈 거리를 비추는 하릴없는 가로등 불빛을 응시하면서, 저 공간을 채웠던 수많은 발길과 식지 않는 체온들을 생각하며 부질없는 욕심들을 덜어냈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꾸역꾸역 욱여넣었던 마음속 허섭스레기들을 걷어내면 그 밑바닥에선 새살처럼 사랑이 돋아날까. 꼬마전구를 환하게 밝힌 듯 벚꽃이 만개한 계절. 나는 여전히 정혜윤 PD를 부러워하며 그녀가 쓴 책 한 권을 또 어렵게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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