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 50인의 증언으로 새롭게 밝히는 박원순 사건의 진상
손병관 지음 / 왕의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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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중기부터 근세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유럽, 아메리카,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행해지던 마녀나 마법 행위에 대한 추궁과 재판서부터 형벌에 이르는 일련의 행위'를 우리는 '마녀사냥(witch-hunt)'이라 부른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에 따르면 당시에 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마녀 혹은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고 하니 종교를 빙자한 인류의 야만성은 정말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마저 마녀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고 하니 말 다했지 뭔가.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 중에 다수가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와 같은 마녀 사냥의 배후에는 가톨릭교회가 가장 약했던 시기에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를 질타하기 위해 예수와 대립되는 존재로 마녀를 만들어냈던 도미니코 수도회의 영향이 컸다는 게 정설이다. 말하자면 '마녀사냥'이란 본질적으로 절대적으로 믿는 어떤 대상을 지키기 위해 가상의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행위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 있어 '마녀사냥'은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내 생각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예수'라는 하나의 절대자가 분화하여 지켜야 할 대상만 교묘하게 넓혀졌을 뿐 예나 지금이나 '마녀사냥'은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예컨대 중세인들이 믿던 예수는 이제 다양한 이념 체계, 각자가 지켜야 할 다양한 욕망 체계 혹은 권리 체계에 투영되어 과거에 하나였던 예수가 작금에 이르러 수백. 수천의 예수로 부활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 바람에 시도 때도 없는 마녀재판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게 되었고 말이다.

 

서론이 길었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마녀사냥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만들었던 사건은 고인이 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었다. 신문에 무차별적으로 보도되는 기사는 모두 피해자 측의 주장뿐이었고,  박 전 서울시장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이나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억울한 사정을 보도하는 기사는 일체 없었다. 말하자면 편파적인 언론 보도로 인해 피해자의 입장에 서면 정의로운 것이요, 가해자(라고 말해지는)인 박 전 시장의 편에 서면 불의이자 악의 편인 양 극단적으로 갈리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신이 아닌 인간이 하는 일에 100% 정의라는 게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그러나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언론이 이렇게 끌고 가는 바람에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그 어떤 의심도 제기하지 못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이것이 과연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국가에서 가능한 일이었던가. '내 주장만 옳고 너희는 틀렸으니 그 입을 모두 닫으라'는 주장은 독재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그러나 그러한 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여론을 선도하는 언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고 싶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했던 데카르트의 명제는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같은 팩트를 놓고도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게 민주주의이다. 전체주의와 달리 민주주의는 선택이 중요하지, 옳고 그름이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유교의 영향으로 늘 옳고 그름에 집착한다. 사고의 여백 없이 정답을 찾는 교육도 이런 성향을 부추긴다고 생각된다. 전체주의는 '인민의 의지'라는 절대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전체주의가 위험한 건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가운데 독재자의 의지가 인민의 의지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p.340 '추천사' 중에서)

 

이 책 <비극의 탄생>을 쓴 손병관 기자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박 전 서울시장을 잘 아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생전에 일면식도 없었던, 남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비극의 탄생>을 주저 없이 구매하여 읽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어느 한쪽의 주장만 일관된 보도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5대 5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10대 1, 혹은 100대 1이라도 되어야 옳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언론은 그런 면에서 모두 비겁했다. 비겁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기에 영합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겠다는 생각은 이를 보도했던 기자들 중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박 시장과 잔디(조사 편의를 위해 경찰이 피해자에게 부여한 별명)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들만이 안다. 그러나 당시 잔디가 시장이 자신에게 한 행동이 안희정의 그것과는 다르다, 손녀딸처럼 생각한다고 인식했다는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p.121)

 

나는 책을 받은 날부터 낱글자 하나까지 꼼꼼하게 읽었다. 다행히도 저자는 기사를 쓰는 기자답게 자신이 취재한 바를 육하원칙에 의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김재련 변호사를 비롯한 피해자 측의 주장 역시 가감 없이 싣고 있었다. 우리가 실체적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박 전 시장의 입장을 대변할 만한 증거나 지인들의 인터뷰, 혹은 저자가 취재한 새로운 사실들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던 기울어진 세월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업 언론과 정치 모사꾼들에 의해 만들어진 여론 지형의 현주소는 가해자 박원순에 대한 마녀사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리인은 박 전 시장 핸드폰의 포렌식을 중단하도록 한 법원의 결정에 격렬히 항의했다. 상대의 핸드폰에 있는 성추행 증거라면 피해자의 핸드폰에도 있어야 한다. 신속한 진상규명을 원한다면 피해자의 핸드폰을 수사기관에서 포렌식해 증거를 찾도록 하면 된다. 지름길은 놔두고 법원 결정이나 비난하며 힘든 길을 가야 할 이유가 없다."  (p.226 '서울신문 곽병찬 논설고문의 칼럼' 중에서)

 

박 전 시장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도 벌써 해를 넘겨 아홉 달이 흘렀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박 전 시장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와 공격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누군가의 앞에서 큰소리로 비난하는 자여야만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부여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박 전 시장과의 일면식도 없고, 그의 처신에 대해 항변하고자 <비극의 탄생>을 읽었던 게 아니다. 피해자를 매도하려는 의도 또한 눈곱만큼도 없다. 다만 어떤 사실에 대해 우리가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 자체가, 혹은 진실을 향한 우리의 자세가 무척이나 잘못되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 역시 그러했으리라.

 

기자를 멸칭하는 단어 '기레기'(기자+쓰레기)는 2009년~2010년경부터 스포츠 커뮤니티 등에서 운동선수에 대한 별칭 혹은 비하하는 표현 혹은 기자에 대한 멸칭으로 혼용돼 쓰이다가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기자에 대한 일반적인 멸칭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요즘에는 이보다 더한 멸칭인 '기더기'(기자+구더기)도 쓰인다고 하니 씁쓸하기만 하다. 조중동으로 칭해지는 보수 언론은 수십 년 동안 편파보도 혹은 왜곡보도를 일삼았지만 지금까지도 시정되지 않은 채 꿋꿋이 유지되고 있다. 모든 사실을 해석함에 있어 개인의 이념이나 사상이 투영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기자라면 적어도 양측이 제시하는 증거나 주장을 듣고 판단함이 옳지 여론이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해서 기자들마저 부화뇌동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기레기' 소리를 듣는 것이다. '기레기'의 탄생은 어쩌면 기자 스스로가 자초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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