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걱정해주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불끈 힘이 날 때가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우연히 알게 된 어느 한 사람의 안부 전화로 인해 어둡고 우울하게만 보이던 세상이 불현듯 밝아진 듯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한 사람의 작은 관심이 다른 누군가의 세상을 밝히는 전등 스위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는 걸 우리는 경험칙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에 갇힌 주변의 한 사람을 위해 소소한 관심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과한 관심은 불필요한 오지랖이 될 수도 있지만...

 

엊그제 한동안 잊고 지내던 지인 한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몇 년 전 세종시로 이사를 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숙소 근처의 도서관에서 일주일에 두어 번씩 얼굴을 보곤 했었는데, 이사를 한 후에는 일 년에 한두 번 만나기도 어려운 서먹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연배로 치면 20여 세 위인 그분은 몸도 마음도 항상 젊게 사는지라 만나서 대화를 할 때면 전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면 자판기 커피를 앞에 놓고 책과 인생에 대해 두서없는 대화를 이어가곤 했었다. 두어 달 전 이곳에 사는 친구분들을 만나기 위해 왔다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잠깐 얼굴이나 봤으면 좋겠다고 해서 나갔더니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그러나 마냥 건강한 줄로만 알았던 그분도 이런저런 병으로 인해 여러 종류의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털어놓았을 때 나는 얼마나 놀랐던가. 자신의 사정을 밝히시던 그분은 문득 나의 안부를 물었었다. 나 역시 이따금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하자 깊은 숨을 내뱉으며 크게 걱정을 하셨었다.

 

그때의 일이 내내 가슴에 남으셨었나 보다. 나의 건강이 걱정되어 안부 전화를 한 것이라며 그 이후 차도가 없는지 진지하게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에 만났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자 한숨을 쉬며 어찌나 걱정을 하던지... 내가 도리어 미안할 지경이었다. 자신의 아픔에 비추어 타인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아픔이 커질수록 타인으로의 관심을 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죽음이 가까울수록 나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할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소소한 관심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마무리가 아닐까. 한껏 습도만 높아진 날씨에 밖으로 나가는 일이 점점 힘겹기만 하다. 내일 모레가 초복, 해가 갈수록 무더위를 견디는 일이 종종 힘에 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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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대하여 - 나를 살리고, 내 세계를 넓히는 지적 여정
에바 홀랜드 지음, 강순이 옮김 / 홍시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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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까닭 없이 잠이 깨었다. 장맛비가 내리는지 옥상으로 연결된 베란다의 배수구에서 '툭 툭 후드득' 하는 물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베란다의 바깥 창을 열자 그것은 흔한 빗소리라기보다 어둠 속으로 퍼지는 균질한 압력이 소리로 변한 것인 양 가슴을 짓누르며 훅 하고 끼쳐왔다. 다시 잠들기는 어렵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전등도 켜지 않은 희끄무레한 거실 공간을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까무룩 잠이 들 때의 어둠은 더없이 안온한 느낌이지만, 오늘처럼 한밤중에 잠이 깨어 맨송맨송한 눈으로 어둠을 응시할 때면 낯설고 두려운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적 유령의 집이라든가 나를 겁주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들어 있을 만한 그 무엇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재미로 하는 것이고, 비명을 이내 웃음으로 바뀌게 하는 그런 것도 싫었다. 뇌전증 진단을 받기 전에도 그런 것을 싫어했지만, 악몽과 발작을 연관시키게 되면서 그 혐오는 더욱 강해졌다. 공포 영화는 아예 보지 않았고, 무서운 책도 조심해서 읽었다."  (p.324)

 

잠에서 깬 나는 에바 홀랜드가 쓴 <두려움에 대하여>를 마저 읽었다. 논픽션 작가인 저자가 자신의 트라우마에 정면으로 맞서 극복하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이 책은 기원전 400년경 히포크라테스가 공포증의 원인으로 짚은 흑담즙부터 시작하여 중세, 근대 등 각 시대가 공포와 두려움의 근원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살펴본다. 이처럼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 탐구하게 된 것은 여행 도중 발생한 하나의 사건 때문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저자는 두려움의 뿌리를 탐구하고 일상에서의 두려움에 맞서기로 결심하였는 바,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내 인생의 주된 두려움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듯한 높은 곳에 대한 공포, 자동차 사고를 여러 번 겪고 나서 최근에 생긴 운전공포증 그리고 정도는 다르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마지막 두려움과는 당분간 일종의 화해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공포증과 나의 관계를 치유하거나, 정복 또는 극복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재조정하는 것도 가능할까? 이제 그것을 알아볼 시간이었다."  (p.103)

 

저자는 세 살 무렵 자신이 겪었던 공포스러운 경험담을 말한다.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의 꼭대기에서 계단에 한 발을 올려놓았던 저자는 감자기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고, 한 발은 에스컬레이터에 다른 한 발은 바닥에 둔 채 얼어붙었던 저자는 결국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에스컬레이터에서의 공포감은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도 재연됐다. 이후 잇단 교통사고는 운전에 대한 트라우마도 남겼다. 접지력을 잃은 찰나의 느낌은 저자에게 사고 당시의 생생한 고통을 되살리기도 했다.

 

"20대 초반에 몇 번 정도 운전할 때는, 커브를 돌거나 가파른 경사면을 오르던 중에 내가 자갈길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사고 순간의 감정과 기억이 맹렬하게 밀려온 적이 있었다. 그 둔중하고 사나운 흔들림, 바퀴를 돌렸을 때의 공포와 당혹감, 사고 후 앞유리와 교감을 나누던 차갑고도 차분한 순간들. 대학을 마칠 때쯤에는 그때의 장면이 떠오르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수년 뒤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 치유되는 트라우마의 아주 흔한 예였다."  (p.174)

 

외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어머니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았다는 걸 알았던 저자는 그런 어머니에게 상처를 줄까 봐, 그런 어머니를 잃을까 봐, 어머니를 잃게 되면 자신도 어머니처럼 살게 될까 봐 오랫동안 불안했다고 한다. 그것은 두려움에 대한 일종의 개인적인 역사이지만 저자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자신의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이야말로 두려움을 정복하는 열쇠라고 믿고 개인적인 두려움에 하나하나 맞서게 된다. 스카이다이빙을 시도하고, 암벽 등반에 도전하고, 프로프라놀롤 알약 하나로 여러 특정 공포증을 치료해 온 임상심리학자 메럴 킨트를 만나기 위해 킨트 클리닉을 방문하기도 하고, 운전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EMDR 같은 의학적으로 인정된 치료를 받기도 했다

 

"내 기억 속 무서운 경험의 서랍을 뒤지면서 나는 드 베커의 이론을 수용하고 싶었다. 그가 쓴 대로 믿고 싶었다. "당신의 직관이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제때 위험 신호가 울릴 것이다. 이 사실을 믿게 되면 더 안전할 뿐만 아니라 거의 두려움 없이 사는 삶도 가능해질 것이다." 나는 드 베커의 조언대로 할 수 없었고, 나 자신의 공포 반응을 완전히 신뢰하는 게 꺼려지는 마음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p.314)

 

누구에게나 두려움은 있다. 그러나 자신의 두려움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이 전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우리가 자신의 두려움을 직시하고 극복하고자 노력할 때,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는 걸 저자는 체험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논픽션 작가답게 '두려움'이라는 막연한 느낌을 자신의 경험과 과학적 자료를 통해 종합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이 책은 어느 심리학 서적만큼이나 치밀하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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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도가 높아진 탓인지 조금만 걸어도 덜 마른 옷을 입었을 때처럼 바지가 허벅지에 척척 감긴다. 장마철의 아침 산책은 고도의 인내심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상쾌함이나 뿌듯한 느낌에 대한 기대는 현관을 나서는 순간부터 사라지고, 빨리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고픈 마음만 간절해진다. 게다가 내가 오르는 산의 능선에 설치된 운동기구에서 몸을 풀다 보면 웬 모기가 그리도 많은지... 장마철에 반소매 차림으로 나선 초보 등산객들은 드러난 피부가 산모기의 습격으로 인해  멍게로 돌변하기 십상이다. 수년째 산을 오르고 있는 나로서는 그런 불상사에 대비하여 한여름에도 긴소매 옷을 입고 모기 퇴치용 부채를 손에 든 채 산길을 오르지만 말이다. 그 바람에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굵은 땀방울의 자취가 또렷이 느껴지곤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집 떠난 뒤 맑음>을 읽고 있다. 단문 위주의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 때문인지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스토리 위주의 빠른 전개가 장마철에 읽기에는 딱이다 싶은 소설이다. 묘사 위주의 끈적끈적한 소설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지금처럼 습하고 불쾌지수가 높은 계절에는 어쩐지 꺼려지는 것이다.

 

코로나19 확진자의 수가 천 명대로 증가했다. 뉴스를 보고 나 역시 깜놀. 그럼에도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전보다 눈에 띄게 늘었다. 겁이 없어진 건지 아니면 다들 인내심에 한계가 와서 그러려니 넘어가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도망치듯 후다닥 빠져나오는데 여전히 찝찝한 기분. 백신이라도 맞아야 조금 안심이 될 텐데 그마저도 아직 순서가 되지 않았으니 모든 게 조심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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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의료인류학자와 나눈 말들
미야노 마키코.이소노 마호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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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가 마주해야 할 필연적 현실은 '죽음'이다. 다만 우리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들 모두는 자신의 미래 역시 '죽음'과 '사라짐'으로부터 결코 예외일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암과 같은 중대한 질병에 걸린 당사자와 이를 지켜보는 주변인들 사이에는 분명한 시각차가 존재한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당사자에 대하여 '불행'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판단은 곧 닥칠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신의 사라짐에 대하여, 당신과의 영원한 별리에 대하여 애석하고 안타까운 심정이며 그러한 결말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와 같은 판단이 전적으로 죽음을 앞둔 당사자가 아닌, 그보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주변인들에 의해 내려진 판단이라는 것이다.

 

의료 현장에서 일해온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사유가 부족한 현대 사회의 맹점을 지적하면서 미야노 마키코와의 편지 교류를 시작한다. 말하자면 '이 약을 먹으면 몇 퍼센트의 확률로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라는 말에서 풍기는 공포로 인해 한 개인의 일상과 미래의 가능성이 완전히 파괴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앓았던 유방암이 다발성 전이가 되어 언제 병세가 악화될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는 이에 대한 답장으로 '환자는 위험성을 근거로 좋지 않은 길을 피해 '평범한 인생'으로 향하는 길을 신중히 나아간다'라고 말한다.

 

"어느 역학자가 만든 수식에 대입하여 계산한 '일어날지도 모를' 확률은 한 개인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서 미래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립니다. '리스크 관리'가 중요하다고 강조되는 오늘날, 개인의 사소한 인생에 일어나는 변화는 계산 결과인 숫자 앞에서 간단히 사라져버립니다. 숫자는 압도적일 정도로 분명하고 객관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도요코 씨의 일화를 떠올릴 때마다 확률의 강력한 힘을 깨닫는 동시에 확률에 얼마나 죄가 많은지를 절감합니다."  (p.21)

 

2019년 4월에 쓴 이소노 마호의 편지에서 시작된 교류는 2019년 7월에 쓴 미야노 마키코의 답장으로 끝을 맺는다. 각자가 쓴 열 통의 편지는 도합 스무 통에 불과하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과 세계를 진심으로 사랑하다 떠난 젊은 철학자의 편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숙연한 느낌과 함께 삶에 대한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한다. 말기 암이라는 현실이 그저 '불운'할 뿐, 절대 '불행'하지 않다고 강조했던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는 이 책의 서문을 쓰고 몇 시간 뒤 의식을 잃었고, 보름 뒤 그녀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무섭습니다. '지금과 다를 수 있었다'는 가능성 따위가 아니라 무無 속으로 제가 빨려들 것만 같습니다. 그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저는 생각하고 글을 씁니다. 그럼으로써 저는 간신히 삶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고통과 죽음 속에서 나를 되찾고, 계속 나로서 있기 위해 글을 씁니다. 이를 철학하는 이의 업이 아닌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p.201)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이라는 책의 제목에서 받게 되는 인상처럼 두 여성 학자가 글을 통해 주고받는 묵직하고 진지한 대화는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인문학적 사고를 열어둔 채 끝을 맺지만 우리의 삶이 어떤 과학적 근거나 확률론적 숫자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오롯이 그 자신으로 죽을 수 있는 길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운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세계를 향해 뛰어드는 것입니다. 뛰어드는 순간 우리는 이 세계가 온갖 우연이라는 만남에서 '나'를 발견해내어 새로운 '시작'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쩜 이 세계란 이토록 경이로울까, 저는 '시작'을 앞에 두고 사랑스러움을 느낍니다. 우연과 운명을 통해서 타자와 함께 하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지금 제가 도달한 결론입니다."  (p.265)

 

우연처럼 시작된 장마는 또 우연처럼 슬몃 꼬리를 감춘 느낌이다. 장맛비의 예보는 그저 확률로만 존재할 뿐이다. 우연에 우연을 더하는 일상이 마치 주어진 일과처럼 흘러가는 주말의 시간들이 조금씩 저물고 있다. 다채로운 우연의 결합들을 경험하는 대가로 우리는 하나의 필연을 묵묵히 견뎌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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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치열한 각축전이 시작되었다. 여와 야의 유력 정치인들이 속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에 돌입했다는 건 바야흐로 대한민국의 유권자 전체를 두고 내 편으로 얼마나 많은 숫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가 하는 숫자 싸움에 골몰하는 시간이 선거 막판까지 지루하게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선 출마자들이야 그 시간이 촌각을 다투는 짧은 여정으로 여겨지겠지만 이를 지켜보는 유권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는 진흙탕의 아수라장을 수개월 동안 지켜봐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암담하고 길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저절로 긴 한숨이 터져 나올 정도로 말이다.

 

장년기를 지나 노년기에 접어든 한 인간이 뒤늦게 선보이는 도리도리 까꿍도 그닥 귀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00의 아바타입니까?' 하고 물었던 어느 정치인의 유치 찬란한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자신이 쥴리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대중의 머릿속에 그녀가 쥴리일지도 모른다는 강한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것은 마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면 계속해서 코끼리를 생각하게 되는 이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남에게 10원 한 장 피해 준 적 없다던 그의 장모는 3년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기도 했다. 이것은 다만 출마 선언 직후에 터진 몇몇 예고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앞으로 얼마든지 더 터질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야당의 유력 대선 후보 중 한 명인 홍 모 의원 역시 '도리도리 윤'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대통령 직무는 날치기 공부해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거나 "도리도리 윤은 평생 검찰 사무만 한 사람이다. 대통령 직무에서 검찰 사무는 0.1%도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그의 '경험 부족'을 지적했던 것이다.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정치권에서 굴러먹은 홍 의원의 시각은 날카로웠다.

 

반면 여권에서의 출마자들 간 경쟁은 다소 싱거운 맛이 있다. 지지율에서 한참 앞서가는 이 지사와 이를 견제하는 다수의 경쟁자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는 있지만 시간적으로나 인지도 면에서나 역부족인 듯 보이는 게 사실이다. 물론 국무총리를 지낸 분이 두 명이나 있으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언론의 카메라는 도리도리 윤과 이 지사에게 집중되는 걸 보면 그놈의 인기라는 게 마냥 거품은 아닌 모양이다.

 

대선 경쟁이 시작된 것처럼 뒤늦은 장마가 시작되었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나라가 두 쪽으로 쪼개져 치유가 불가능해지는 것처럼 성질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기단이 만나면 장마의 피해는 심해지게 마련, 부디 장마도, 대선도 무난하게 넘어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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