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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의료인류학자와 나눈 말들
미야노 마키코.이소노 마호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1년 3월
평점 :
결국 우리가 마주해야 할 필연적 현실은 '죽음'이다. 다만 우리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들 모두는 자신의 미래 역시 '죽음'과 '사라짐'으로부터 결코 예외일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암과 같은 중대한 질병에 걸린 당사자와 이를 지켜보는 주변인들 사이에는 분명한 시각차가 존재한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당사자에 대하여 '불행'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판단은 곧 닥칠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신의 사라짐에 대하여, 당신과의 영원한 별리에 대하여 애석하고 안타까운 심정이며 그러한 결말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와 같은 판단이 전적으로 죽음을 앞둔 당사자가 아닌, 그보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주변인들에 의해 내려진 판단이라는 것이다.
의료 현장에서 일해온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사유가 부족한 현대 사회의 맹점을 지적하면서 미야노 마키코와의 편지 교류를 시작한다. 말하자면 '이 약을 먹으면 몇 퍼센트의 확률로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라는 말에서 풍기는 공포로 인해 한 개인의 일상과 미래의 가능성이 완전히 파괴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앓았던 유방암이 다발성 전이가 되어 언제 병세가 악화될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는 이에 대한 답장으로 '환자는 위험성을 근거로 좋지 않은 길을 피해 '평범한 인생'으로 향하는 길을 신중히 나아간다'라고 말한다.
"어느 역학자가 만든 수식에 대입하여 계산한 '일어날지도 모를' 확률은 한 개인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서 미래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립니다. '리스크 관리'가 중요하다고 강조되는 오늘날, 개인의 사소한 인생에 일어나는 변화는 계산 결과인 숫자 앞에서 간단히 사라져버립니다. 숫자는 압도적일 정도로 분명하고 객관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도요코 씨의 일화를 떠올릴 때마다 확률의 강력한 힘을 깨닫는 동시에 확률에 얼마나 죄가 많은지를 절감합니다." (p.21)
2019년 4월에 쓴 이소노 마호의 편지에서 시작된 교류는 2019년 7월에 쓴 미야노 마키코의 답장으로 끝을 맺는다. 각자가 쓴 열 통의 편지는 도합 스무 통에 불과하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과 세계를 진심으로 사랑하다 떠난 젊은 철학자의 편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숙연한 느낌과 함께 삶에 대한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한다. 말기 암이라는 현실이 그저 '불운'할 뿐, 절대 '불행'하지 않다고 강조했던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는 이 책의 서문을 쓰고 몇 시간 뒤 의식을 잃었고, 보름 뒤 그녀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무섭습니다. '지금과 다를 수 있었다'는 가능성 따위가 아니라 무無 속으로 제가 빨려들 것만 같습니다. 그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저는 생각하고 글을 씁니다. 그럼으로써 저는 간신히 삶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고통과 죽음 속에서 나를 되찾고, 계속 나로서 있기 위해 글을 씁니다. 이를 철학하는 이의 업이 아닌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p.201)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이라는 책의 제목에서 받게 되는 인상처럼 두 여성 학자가 글을 통해 주고받는 묵직하고 진지한 대화는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인문학적 사고를 열어둔 채 끝을 맺지만 우리의 삶이 어떤 과학적 근거나 확률론적 숫자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오롯이 그 자신으로 죽을 수 있는 길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운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세계를 향해 뛰어드는 것입니다. 뛰어드는 순간 우리는 이 세계가 온갖 우연이라는 만남에서 '나'를 발견해내어 새로운 '시작'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쩜 이 세계란 이토록 경이로울까, 저는 '시작'을 앞에 두고 사랑스러움을 느낍니다. 우연과 운명을 통해서 타자와 함께 하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지금 제가 도달한 결론입니다." (p.265)
우연처럼 시작된 장마는 또 우연처럼 슬몃 꼬리를 감춘 느낌이다. 장맛비의 예보는 그저 확률로만 존재할 뿐이다. 우연에 우연을 더하는 일상이 마치 주어진 일과처럼 흘러가는 주말의 시간들이 조금씩 저물고 있다. 다채로운 우연의 결합들을 경험하는 대가로 우리는 하나의 필연을 묵묵히 견뎌야만 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