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불현듯 찾아올 때가 있다. 그것은 뭉근하게 가슴을 짓누르다가 때로는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기도 하고, 잊고 지내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도 하고, 주변 사람들을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게도 한다. 나는 다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오가는 마음길을 터주었을 뿐인데 이다지도 많은 슬픔이 밀려드는 걸 보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슬픔이 산재하고 있었던 것인가! 미처 알지 못했거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 가 닿지 못했던 슬픔을 생각할 때 나는 이따금 동시대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곤 한다.


3명의 소방대원이 화재 진압 과정에서 순직했다. 28년 차 베테랑 소방관도, 결혼을 석 달 앞둔 예비 신랑도, 8개월 차 막내 소방관도 화마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웃의 죽음에 너무도 둔감해진 까닭에 그 깊은 슬픔을 공감하지 못한다. 박수를 치고 환호하던 정치인이 표정을 바꿔 형식적인 조문을 하기도 하고, 어느 재벌 총수는 뜬금없이 중국 시진핑 주석의 사진과 함께 '멸공' 해시태그를 달아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감정도 없고, 뇌도 없는 것인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은 '사람다움'이 아닐까.


며칠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더니 여지없이 미세먼지가 찾아왔다. 탁한 하늘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마치 좀비처럼 살고 있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은 어찌할 것인가.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까. 하늘을 뒤덮은 미세먼지와 우리 이웃의 마음을 뒤덮은 슬픔이 주말의 거리를 온통 잿빛으로 물들게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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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계획이라는 게 뭐 '작심삼일'을 염두에 둔 하나의 이벤트와 같은 것이지만 이것도 사실 매년 반복하다 보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남들 다 하는데 나만 손도 까딱 않은 채 멀뚱멀뚱 시간만 보내는 것도 쑥스럽고 꽤나 머쓱한 일이어서 억지로 동참하게 됩니다. 예컨대 아침 운동을 계획한다거나 금연 혹은 금주, 다이어트 등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물론 처음부터 어길 수는 없고 적어도 삼일은 지켜야 예의인지라 작심이일은 넘기곤 하죠. 예의상 말입니다.


천성적으로 게으름이 몸에 밴 저로서는 그마저도 귀찮다 여겨질 때가 많고, 굳이 기록으로 남겨 '빼박' 증거가 되는, 그런 미련한 짓은 안 하는 게 상책이라는 지극히 이성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까닭에 신년 계획을 세우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대부분의 집단지성(?) 추종자에서 벗어난 반지성주의자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거나 부끄럽다는 어떤 감정적 견해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현실로서 존재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연초에 읽을 책을 고르는 데는 비교적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몇 날 며칠을 끙끙대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의 제목이나 내용, 저자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살피기는 합니다. 연초에 읽기에 적당한 책인지 아닌지 나름대로 판단을 하면서...


반전은 늘 있게 마련입니다. 신중하게 골랐다고 하는 책을 반도 읽지 못한 채 슬몃 책꽂이에 꽂아 넣는다거나 책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채 일 년 내내 냄비 받침대의 역할만 묵묵히 수행하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게 그런 예외에 속하는 경우이겠지요. 아무튼 내가 연초에 고르는 책은 기분을 업시키거나 뭔가 열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책보다는 삶에 대해 관조적이거나 죽음을 생각하는, 말하자면 어둡고 칙칙한 주제의 책을 고르곤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나는 반지성주의자가 분명해 보입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했던 김영민 교수의 책 제목처럼 '연초에는 죽음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는 게 저의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지금 이유진 정신과 전문의가 쓴 <죽음을 읽는 시간>을 읽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어 땅에 묻힌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은 다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쓰고 버린, 부패하지 않는 시간들이 서서히 차올라 발목을 덮고, 무릎을 덮고, 시나브로 정수리를 덮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쓰고 버린 시간에 묻혀 최후를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신이 쓰고 버린 시간에 묻혀 죽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삶은 고통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태어나는 과정도, 살아가는 과정도, 죽어가는 과정도 모두 고통이다. 그러니 매 순간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피곤한 인생도 없다. 삶이란 애초에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고통을 완화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정신분석 치료 또한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 덜 불행하기 위해서 받는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p.331 '에필로그' 중에서)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덕담을 나누고 싶다. 새해에는 덜 고통스럽기를, 그런 시간을 써버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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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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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은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은 대개 진리에 대한 탐구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접근, 혹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조차 불가능한 미지의 영역(예컨대 우주나 영혼 그리고 신과 같은)에 대한 상상이나 추측이 주가 되는 작품으로 요약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책을 읽는 재미나 지식의 습득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기준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보면 한강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좋은 책으로 선정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우리의 영혼이 슬픔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한강의 소설을 통해 어렴풋이 깨닫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의 기원, 태곳적 영혼의 원형질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도록 한다는 점에서 한강의 작품은 선택에 있어서 언제나 앞선 순위에 놓이게 된다. 우리들 각자의 몸 어딘가에 제 어미의 자궁 속 물의 무늬가 새겨지는 것처럼 우리네 영혼 어딘가엔 눈물의 흔적이 물결처럼 어려있다는 걸 생각하면 육체와 영혼이 결코 둘로 이분화될 수 없다는 걸 나는 한강의 소설을 통해 배우곤 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영혼의 기원에 대해 천착하는 듯 보이는 작가는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도 비극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강의 소설은 개인의 삶에서 건져 올린 슬픈 사건이나 역사적 비극이 주요 테마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언제나 우리 육체의 기원인 물(水)이 등장한다. 그것이 비(雨)이거나, 눈(雪이거나), 바다(海)이거나, 강(江)이거나 그 본질은 언제나 물(水)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간 영혼의 기원이 슬픔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가 흘리는 눈물 역시 육체의 기원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강 소설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단출한 구성에서 오는 인간의 절대 고독과 나약함이다. 관계의 단절에 놓인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하며 그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하는 문제는 작가가 닿고 싶은 궁극적 종착지였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주인공인 경하의 꿈으로부터 시작된다. 눈 내리는 벌판에 심겨진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가 마치 묘비처럼 서 있고, 묘지가 여기 있었나, 생각하는 순간 순식간에 물이 차오르고, 무덤들이 모두 바다에 쓸려가기 전에 뼈들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허둥대다가 어쩌지 못하는 채로 꿈에서 깬다. 경하는 그것이 자신이 지난 책에서 다룬 학살에 대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꿈과 연관된 작업을 영상을 만들 계획을 세워 함께 작업을 하려 했던 친구 인선을 떠올린다. 경하와 함께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했던 인선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제주로 내려가 목공 일을 하고 있다. 경하는 인선에게 자신의 꿈과 연관된 작업을 영상으로 만들 계획을 알렸으나 몇 해 동안 힘든 시기를 겪으며 겨우 몸을 추스르는 사이 계획은 진척되지 못했고, 경하는 마음을 접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하는 병원에 있는 인선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는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p.33)

 

통나무 작업을 하던 중 사고로 두 손가락이 절단되어 급히 통합수술을 받게 되었던 인선은 영문도 모른 채 달려온 경하에게 다짜고짜 한 가지 부탁을 떠넘긴다. 그날 안에 제주 집으로 가서 혼자 남은 자신의 새를 구해달라는 것. 경하는 인선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서둘러 제주로 향하지만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폭설과 강풍에 휩싸여 길을 잃고 헤맨다. 게다가 지병처럼 앓고 있는 두통이 찾아오는 바람에 경하는 죽음 직전의 위기에 빠진다.

 

시시각각 더 무거운 어둠에 잠기는 눈길에서 나는 그 바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적의 뒷면에 먹 자국처럼 배어 있는, 언제든 형상을 이루며 선명해질 수 있는 그림자 같은 그걸 걸음마다 느꼈다. 박명 속에 함박눈은 쉼없이 떨어져내렸고, 마침내 갈랫길이 나왔을 때에는 정말 어두워져 있었다. (p.130)

 

천신만고 끝에 인선의 집에 도착하였지만 경하는 새를 구하지는 못한다. 경하는 그곳에서 칠십 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인선의 슬픈 가족사를 듣게 된다. 가족 전체를 잃고 슬픔을 안은 채 십오 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아버지와, 부모와 동생을 한날한시에 잃고 오빠마저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채로 언니와 둘만 남아 남은 생을 살아내야 했던 어머니. 학살 이후 오빠의 행적을 찾는 일에 수십 년의 세월을 바쳤던 인선의 어머니 정심의 간절했던 마음이 무게도 없이 느리게 하강하는 눈송이처럼 독자들 마음에도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눈의 벽에 촛불이 감싸이자 사위가 더 어두워졌다. 내 눈앞에 어지고 있는 눈송이들이 거의 잿빛으로 보였다. 빛나는 것은 인선이 누운 곳으로 내리는 눈송이들뿐이었다. 코트 안에 껴입은 더플코트의 후드를 꺼내 쓰고 나도 눈 속에 누웠다. 두터운 눈의  격벽에서 스며 나온 빛이 음음하게 내 얼굴을 밝혔다. (p.319)

 

작가는 우리 삶에 스며드는 슬픔의 시간들, 과거에 존재했지만 드러나지 않은 슬픈 역사의 흔적들을 마치 눈송이처럼 독자들의 가슴에 녹아들게 한다. 인간 육체의 기원이 물이었던 것처럼 인간 영혼의 기원 역시 눈물, 그 슬픔의 역사였음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겨울밤, 길을 잃고 캄캄한 눈 속에 갇혔을지라도 우리 영혼의 발걸음이 슬픔의 강을 따라 다음 세대에 면면히 이어지는 한 우리는 결코 영원히 작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작가는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흘린 눈물이 저 눈송이처럼 나의 눈에 가볍게 내려앉아 마음속 뜨거운 사랑을 일깨우는 한 우리는 결코 나약하거나 외롭지 않다는 걸 작가는 가만가만 말하려 했을 터, 내가 작가의 슬픔을 기억하는 한, 그리고 먼 미래에 나의 자리를 누군가 대신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작별하지 않는 것이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노랫말처럼. 삶과 사랑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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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성향과 일치하는 사람들을 가려 교류를 이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헤어지곤 합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라고 하던가요. 사람들의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고, 돌아간 사람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법이라는 의미의 불교 용어이지요.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을 테고 그럴 필요도 딱히 없을 듯합니다. 우리의 삶이 한아름의 기억할 수 없는 기억과 기억하는 한 줌의 기억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더러 있게 마련이지요. 어떤 필요에 의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 역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왔습니다. 개중에는 남들에게 요만큼의 손해도 입히지 않으려 하고 반대로 자신도 남들로부터 눈곱만큼의 손해도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고집이 세고 내면화된 자신들의 신념을 불변의 진리인 양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혹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뭐 나쁜가? 하고 말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개인의 행동지침으로 이것보다 더 쿨하고 쌈박한 것들을 달리 찾아보기 어려운 듯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자신도 피해 입기 싫다는 데 그게 뭐 어떻다고?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자신 한 사람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눈곱만큼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아주 작은 일까지 세세하게 따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지난번에 내가 저녁을 샀으니까 오늘은 네가 저녁을 사라는 식이지요.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21년의 마지막 날, 그것도 아침부터 별 이상한 말을 다 꺼낸다 싶겠지만 그러한 행동지침을 내면화한 사람이 있다면 올해가 가기 전에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르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고 있으며 그와 같은 도움이 없다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저 또한 그 사실을 가끔씩 까먹곤 하지만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늘 음으로 양으로 타인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의 삶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을 한나절 피곤하게 따지는, 그런 짓은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름도 알 수 없는 누군가에 대한 고마움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겠지요.


야당의 어느 대선 후보는 말하더군요. 현 정부가 무식한 삼류 바보들을 데려다가 정치해서 경제, 외교, 안보 전부 망쳐놨다고. 그도 현 정권의 고위직 인사 중 한 명이었으니 자신도 무식한 삼류 바보라는 절절한 고백이었겠지요. 오늘은 단 하루 남은 2021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마무리 잘하시고 타인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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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쓰는 용기 - 정여울의 글쓰기 수업
정여울 지음, 이내 그림 / 김영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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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블로그란 게 사실 개인의 일상이나 특별한 기억, 혹은 기억하고 싶은 어떤 순간들에 대한 기록 혹은 끄적임의 성격이 짙은 까닭에 달리 특별한 목적이 존재할 리 없지만 지난 시절의 글을 이따금 읽다 보면 '어쩜 예나 지금이나 글쓰기 실력에 조금도 진전이 없을까. 그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면 어디 한구석이라도 나아진 게 보여야 할 텐데 '일만 시간의 법칙'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이렇게 깡그리 무시해도 되나.'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곤 하는 것입니다. 때론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이지요. 물론 다른 누구에겐가 자랑을 하거나 내보이기 위해 쓴 글도 아니니 굳이 실망할 이유도 없겠습니다만 글쓰기에는 영 '재주가 메주'인 자신에 대해 괜한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정여울의 <끝까지 쓰는 용기>를 읽게 된 것도 스스로에 대한 그러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이 컸었는데 오히려 나는 더 큰 실망감을 안은 채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글쓰기 실력이 획기적으로 상승할 것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나는 적어도 책의 제목에서처럼 그동안에 쌓인 실망감을 희석시킬 만한 커다란 '용기'는 얻을 수 있겠지 내심 기대하는 바가 컸었는데, 용기는커녕 오히려 나에 대한 실망감만 더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오호, 통재라 비통함만 쌓였지 뭡니까.


"이제 제 글쓰기의 비결을 알려드릴게요. 매일 화초에 물을 주듯이, 마음속에서 습작을 하는 거예요. 잘될 거라는 기대도 없이, 잘 안 될 거라는 비관적 생각도 걷어치우고,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무작정 신이 나서 씁니다. 물론 괴로워하면서 쓰기도 하지요. 독자들에게 칭찬을 들은 날도 여전히 습작을 합니다. 자만심이나 나태함에 빠지기 싫으니까요. 많은 책을 쓰고도 여전히 습작을 한다는 게 쑥스럽지만, 사실입니다."  (p.8 '들어가며' 중에서)


눈치채셨을까요? 나는 그동안 '무작정' 글을 써왔던 것인데 이렇다 할 성과는커녕 전보다 못한 '잡글' 수준에서 뱅뱅 맴을 돌고 있으니 실망의 쓰나미가 몰아칠 수밖에요.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사실 글쓰기에 대해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글쓰기에 있어 누구보다도 진심인 정여울 작가의 경험과 생각들이 녹아 있는 글쓰기 교본과도 같은 책입니다. 글을 써서 밥을 벌어먹고 싶은 예비 작가들에게 들려주는 창작과 퇴고 방법, 독자를 사로잡는 스토리텔링 기법, 주제를 고르는 특별한 방법 등 글 쓰는 사람들이 매번 맞닥뜨리는 고충에 대해 답하고 있는 1부 글을 쓸 때 궁금한 모든 것들, 글 쓰는 일의 희로애락을 담은 2부 매일 쓰며 배우고 느낀 것들, 한 권의 책을 만들 때 필요한 이야기를 담은 3부 한 군의 책을 만들기까지 생각해야 할 것들이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정여울 작가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A to Z'라고 해야 하겠지요.


"내 안의 오랜 꿈을 이루어주는 것.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조금 쑥스럽더라도 완전히 다른 나 자신이 되어보는 것. 그리하여 다정하게 타인에게 말 걸 수 있는 용기를 내보는 것. 그것이 글쓰기가 제게 가르쳐준 희망과 용기의 비밀입니다. 물론 글쓰기만으로 없던 집이 생기고, 잃어버린 사랑이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글을 씀으로써 여전히 살아 있는 나 자신과 만날 수 있습니다."  (p.121)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과 나와 같은 일반인 혹은 아마추어 작가의 글이 같을 수야 없겠지요. 그렇다면 전문 작가가 설 자리는 없어지고 말 테니까요. 그러나 출판이 자유로워진 작금의 출판 환경에서 그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전업 작가의 글이 아마추어 작가의 글처럼 형편없어졌다고 폄훼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프로 작가(로서의 자격이 있는)의 글은 시간이 갈수록 더 빛이 나는 게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프로 작가의 글이 점점 귀해지는 시대를 살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뼈아픈 고독 속에서 아무도 이해 못 할 환상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창조성의 뿌리가 된다고 믿습니다. 릴케는 환상의 체험, 영혼의 세계, 죽음 등과 점점 멀어지는 현대인의 세속적 삶을 걱정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만 걱정하느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삶을 보살피는 기술을 잃어가고 있으니까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마음속의 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삶의 어두운 부분들을 보살피는 일이야말로 작가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지요."  (p.296 '나오며' 중에서)


나는 비록 수많은 블로거 중 일인으로 글 다운 글 한 편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처지임을 잘 알고 있지만 정여울 작가의 <끝까지 쓰는 용기>를 읽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21년도 이제 겨우 이틀을 남겨 둔 오늘, 새해에 대한 희망보다는 가는 해에 대한 쓸쓸함만 느껴지는 것은 어떤 까닭일까요. 잠깐 풀렸던 날씨가 다시 또 추워진다는 예보. 이 겨울 나는 또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다가올 한파를 대비하듯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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