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위의 낱말들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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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가 고기를 낚듯 작가는 단어와 문장을 낚는다. 그것은 경험을 낚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가 건져 올린 단어와 문장들은 삶의 경험을 채색하는 일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혹은 가까운 이가 들려주는 가벼운 농담 속에서 작가는 자신이 쓰고 다듬을 이야기의 경험을 추리거나 선별하고, 선택된 경험에 맞는 단어와 문장을 고르는 게 작가의 일인 셈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이 선택한 몇몇 단어와 문장들로 자신의 삶 전체를 표현할 수도 있겠다는 꿈을 꾼다. 인간의 삶은 그렇게 초라하지도 그렇다고 엄청 대단하지도 않다는 걸 알 만한 나이가 되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닫힐 때, 우리는 홀로 앉아 무언가를 써야 합니다.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혹은 나 아닌 것에 대하여, 너 아닌 것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이 아닌 것에 대하여."  (p.64)


작가 황경신의 글을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작가가 쓰는 문장의 리듬을 좋아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살아온 삶의 리듬과 작가가 살아온 삶의 리듬이 어느 정도 공명을 일으키고, 같은 파장으로 진동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도 아닌 산문에 무슨 리듬이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프로 작가의 글은 대부분 오르내림과 길고 짧음의 일정한 호흡이 존재하고, 그 호흡이 나와 맞지 않거나 나의 호흡이 작가의 호흡을 따라가지 못할 때 억지로 책을 읽는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겨울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조용조용 날려 보내고 있었다. 네가 살아 있다면, 너는 또 한 번의 봄과 재회할 것이다. 인연과 마음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 남쪽과 북쪽은 재회할 것이다. 너는 눈을 감고 천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해 여름의 소원을 다시 한 번 빌었다. 지금은 속절없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듭 되풀이되고 차곡차곡 모아져야 할, 지난하고 지극한 소원이었다."  (p.180)


황경신 작가의 신간 <달 위의 낱말들>은 '여는 글'에 이어 1. '단어의 중력', 2. '사물의 노력'의 총 2부로 구성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내리다, 찾다와 같은 동사 11개와 선택, 미래, 연민, 컴퓨터 등 27개의 명사를 건져내어, 자신이 선택한 단어와 관련된 각각의 경험과 느낌을 적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어찌 보면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는 듯한, 작가와 독자라는 이질적인 경험의 장에서 존재하는 두 부류에 있어 작가의 도구인 낱말을 매개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독자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지 않을까 싶다.


"어느 적막하고 쓸쓸한 밤, 당신이 그리워 올려다본 하늘에 희고 둥근 달이 영차 하고 떠올랐다. 달은 무슨 말을 전하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달의 표면에 달을 닮은 하얀 꽃들이 뾰족 솟아 있었다. 썩은 열매의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달로 날아가, 꼬물꼬물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잎을 뻗고 꼬잎을 여는 중이었다. 터지고 쫓고 오르는 것들, 버티고 닿고 지키는 것들이 거기 있었다. 뭔가 다른 것이 되어, 말랑하고 따뜻하고 착하고 예쁜 것이 되어."  (p.5 '여는 글' 중에서)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작가의 글이 전에 비해 무겁고 깊어졌다는 것이다. 문장의 리듬을 중시하는 작가였기에 의미와 깊이보다는 팔랑팔랑 가볍더라도 입에 착착 붙는 리듬만 살아 있다면 그저 좋아했을 듯한데, 이제는 문장의 깊이와 의미 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인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어쩌면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늘은 내내 어둡고 간간이 비가 내린다. 설령 대단치 않은 것들도 그 너스레가 너무 재미있어서 끝까지 읽게 되는 책이 있고, 가볍고 평범한 것들로부터 우리가 미처 몰랐던 깊은 의미를 던져 주는 까닭에 날이 새는 줄도 모른 채 빠져들게 되는 책이 있다. 황경신 작가의 글도 달이 차는 것처럼 봉긋 살이 오르는 듯하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기만 하고 오늘은 달을 보기는 어렵겠다. 작가가 보았던 희고 둥근 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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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든 국가든 위기에 대응하는 자세를 보면 그 국가나 개인의 미래를 알 수 있다. 또한 주변국이나 주변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지, 한마디로 신뢰할 수 있는 국가인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개인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위기에 직면한 한 국가가 지도부에서부터 지방의 촌부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대응 전략도 없고, 지휘 체계도 없이 허둥대기만 한다면 그 나라의 미래란 결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부실한 대응의 저변에는 '설마' 하는 안일한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잘못은 위기 대응 실패에 대한 이런저런 변명이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내린 기록적인 강수량도 문제였지만 그에 대응하는 대통령과 서울시장의 자세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국민 대부분이 느꼈을 무정부 상태의 혼란은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목도했던 대통령의 부재로 인한 위기 대응 중앙 컨트롤타워의 느슨함, 지도부의 미흡한 역량 등은 무고한 생명의 희생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결국 정권의 몰락을 부추기는 데 하나의 축이 되었었다.


박근혜 정권 시절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대통령이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물었던 어이없는 현장을 우리는 이번 수재로 3명이 목숨을 잃었던 신림동 침수피해주택 사고 현장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의 입에서 다시 듣게 되었다. "왜 일찍 대피하지 못했나?" 하는 공허한 질문은 마치 다른 종의 사람들에게 하는 형식적인 인사말처럼 들렸으며 과거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보는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서울시장의 공허한 메아리도 다르지 않았다. 작년 이맘때 "그동안 강남역 일대에 침수로 피해본 분들 안심하셔도 됩니다."라며 자신 있게 말하던 그는 강남역 일대의 침수 피해로 인해 자신의 말이 허구임을 증명하고야 말았다.


리더의 자질이나 역량은 끝없는 희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지금의 대통령이나 서울시장은 국민 위에서 군림하려고는 하지만 그들을 받들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은 숫제 없는 듯하다. 이러한 자세로 직을 유지하려 한다면 국민 전체가 불행할 뿐이다. 그렇게 강조하는 법으로는 직에서 물러나게 강제할 방법이 없다면 스스로 그만두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지 않은가. 대통령에 대한 부정 평가를 내리는 70% 이상의 국민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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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8-10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남은 침수가 성인 남자 목까지 차오를 정도면 하수정비를 제때 하지 않었던 거죠. 부자들이니 침수가 그들 삶에 타격을 가하지 않을 거지만.. AI를 대통령 시켜도 이 보다 더 잘 할 것 같습니다.

꼼쥐 2022-08-11 16:12   좋아요 0 | URL
AI가 아니라 허수아비를 세워 놓아도 이보다는 나을 듯합니다. 자택이 상황실이자 컨트롤타워라고 하니 앞으로는 쭈~ 욱 출근도 없이 자택에만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언론에 노출도 하지 않고.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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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대부분을 읽었다. 일부러 작정하고 전작 읽기에 나섰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우연찮게 그리 되었을 뿐인데, 그와 같은 우연도 하나의 경험 축에 드는지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 전반에 익숙하게 되었음은 물론 작가가 다루는 평범하지 않은 연인들(어쩌면 소수자에 가까운)의 삶과 사랑에도 특별한 거부감이나 저항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익숙함이란 언제나 반복에서 비롯된다는 걸 새삼 느낀다.


최근에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단편집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에는 표제작을 포함하여 총 9편의 작품이 담겨 있다. 1989년에서 2003년 사이에 쓴 작품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은 2008년 출간되었던 것을 리커버판으로 새롭게 찍어낸 것이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위해 기꺼이 엘비스 프레슬리가 되어주는 남편의 이야기를 담은 '러브 미 텐더'를 비롯하여 에쿠니 가오리의 색채가 짙게 묻어나는 '선잠'등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 우리 이웃의 이야기에서부터 작가만의 상상력이 지어낸 듯한 독특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풍성한 이야기들이 단편소설을 읽는 묘미를 더해준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량한 인간과 불량한 인간,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인간.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은 미치도록 선량을 동경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불량에 이끌리고 그리하여 결국, 선량과 불량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평생 선량을 동경하고 불량에 이끌리면서 살아간다."  (p.61 '선잠' 중에서)


나는 단편집의 리뷰를 쓰는 일에 몹시 서툴지만 책에 실린 단편소설 '선잠'을 위주로 에쿠니 가오리의 세계를 펼쳐보기로 한다. 대학생인 히나코는 아내가 있는 연인 고스케 씨와 6개월 동안 동거했다. 시인인 고스케 씨는 팔리지도 않는 시집을 두 권이나 냈다고 한다. 아내가 친정에 가 있는 사이 히나코는 고스케 씨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순애보적인 사랑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고스케 씨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고, 히나코는 이별 파티를 준비한다. 히나코는 알지도 못하던 신문배달원 토오루를 파티에 초대했고, 토오루는 여자 친구 대신 동생인 후유히코와 함께 왔다.


"나는 가 버린 여름을 떠올렸다. 토오루가 있고, 후유히코가 있고, 선잠처럼 혼돈스러웠던 여름. 자동차 운전면허를 딴 여름. 애정을 매장해 준 여름. 해 질 녘 바람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해 질 녘이라는 애매한 시간이 나는 좋다. 주부가 장 보러 가는 시간,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노는 시간, 장밋빛과 회색빛과 연푸른 빛이 한데 섞인 듯한 공기."  (p.98 '선잠' 중에서)


고스케 씨와 헤어진 후 히나코는 고등학교 3학년인 토오루와 사귀게 되지만 마음은 여전히 고스케 씨를 향해 있다. 고스케 씨의 꿈을 꾸고 고스케 씨의 반려묘가 되어 곁에 있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사랑의 열병을 호되게 앓고 난 후 히나코는 용기를 내어 고스케 씨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 완전한 이별을 결심한다.


"나는 내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한 목소리로 외쳤다. 바람이 일순 내 속을 휩쓸고 가 버린 듯한 , 온몸이 텅 비어 버린 듯한 휑뎅그렁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 7월의 달밤 아래 확연히 드러나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건 마치 내 영혼이 육체를 이탈하여 사락사락 거품이 이는 논 한복판에 떨어진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p.45 '선잠' 중에서)


우리는 어쩌면 일시적으로 소유했었지만 영원히 가질 수는 없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자신의 사랑을 통해 확인하는지도 모른다. '선잠'의 주인공인 히나코가 유부남인 고스케 씨를 자신의 연인으로 소유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영원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집착이란 다만 습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히나코의 여름처럼 우리도 역시 그런 여름을 통과하고 있을 테지만 히나코의 '선잠'처럼 혼돈스럽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에서 오는 쓸쓸함은 어쩌면 관계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진 허허로움에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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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아침 산책은 강한 의지와 인내심을 요한다. 집 근처의 높지 않은 야산을 오르는 것인데도 나는 매일 아침 결연한 의지와 함께 집을 나서곤 한다. 아침부터 느껴지는 더위도 더위지만 땀에 젖어 척척 감기는 옷소매와 불쾌감을 더하는 높은 습도는 여름 산책자의 의지를 단박에 꺾어 놓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한여름에 있을 법한 온갖 장애를 뚫고 산책에 나선 이들을 나는 무척이나 존경한다. 게다가 모기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산책자들 대부분의 옷차림은 긴소매 상의와 반바지가 아닌,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팬츠가 주를 이룬다. 이따금 아무것도 모른 채 나선 초보 산책자의 놀랄 만한 차림새(탱크톱에 핫팬츠 차림 등)에 다들 걱정과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8월의 숲은 그야말로 참매미의 세상이다. 애벌레로 4~5년을 살고 우화하여 성충으로 두어 달을 산다는 참매미의 기구한 운명 탓인지 이맘때의 수컷 참매미는 자신의 DNA를 후대에 남기기 위해 필사적이다. 조용한 숲에 한 마리의 수컷 참매미가 '맴 맴 맴 매앰~~~' 하고 암컷 참매미를 유혹하기 위한 독창을 시작하면 이에 질세라 다른 참매미도 덩달아 울기 시작한다. 독창은 중창이 되고 금세 온 산의 수컷 참매미가 한꺼번에 울기 시작하는 합창으로 변하고 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아주 조용해지는 때가 있고, 이 순간을 놓칠세라 자신만의 독창을 시작하는 수컷 참매미 그리고 경쟁하듯 노래를 따라 부르는 다른 참매미들. 이런 과정이 무한반복되는 것이다.

 

현 정부의 장관들을 보면 7, 8월의 수컷 참매미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스타 장관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대통령의 한마디에 다들 튀어보겠다고 검증도 되지 않은 정책을 마구 쏟아내는 모습이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스타 장관의 출현이란 열심히 일하는 열 명의 장관 중에 더 열심히 일하는 한 명의 장관이 돋보이는 것이지 다들 판판이 놀다가 어느 날 갑자기 검증도 되지 않은 뜬금없는 정책을 쏟아낸다고 그가 스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 정부의 장관들은 대통령에게 꾸지람을 듣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마치 온 산을 시끄럽게 하는 수컷 참매미들의 헛된 노래와 같다. 물론 참매미의 노랫소리는 찬바람이 불면 그치겠지만 말이다.

 

아침마다 산을 오르면서, 온 산에 울려 퍼지는 참매미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하나의 바람을 갖게 되었다. 참매미의 노랫소리가 그칠 때쯤 각 부처의 장관들이 내뱉는 아무 말 대잔치도 부디 잠잠해지기를... 자택에서 휴가 중에 있는 대통령에 대하여 대통령실 관계자는 "지금은 댁에서 푹 쉬고 많이 주무시고 산책도 하고 영화도 보고, 아주 오랜만에 푹 쉬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대통령이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도대체 뭘 더 쉴 필요가 있는지 국민들은 다들 의아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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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06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신의 첫 문학과지성 시인선 345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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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감정은 팽팽한 압력이 된다.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수분의 압력이 되는 것처럼 커다란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는 열기의 압력이 된다. 그러므로 감당할 수 없이 큰 기쁨이나 슬픔, 분노나 그리움 등은 오롯이 감정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차라리 질병에 가깝다. 밖으로 분출되거나 스스로 용해되지 않은 감정은 자신의 몸 곳곳으로 고스란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감정에 가장 솔직한 이는 시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몸에 오롯이 받아 한 줄 시를 통해 분출한다. 한 시인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한 줄 '시(詩)'로 읊지 못한다면 이 서러운 세상을 어찌 건널 수 있으랴. 나는 이따금 시에서 분출하는 시인의 슬픔을, 분노를, 차마 담지 못한 그리움을, 웃음기마저 지워버린 기쁨을 시인을 대신하여 갈무리한다. 이렇게 나누는 감정의 품앗이가 없었다면 뉜들 세상살이가 그저 쉽기만 할까.


감기


당신이 들여다보는 흑백 사진 속에 내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마주 보았다


당신의 사진 속은 늘 추웠다

기침나무들이 강을 따라 콜록거리며 서 있었다


눈을 뜨면 언제나 설산 오르는 길이었다


간신히 모퉁이를 돌아서도 희디흰 눈발

날카로운 절벽 아래로 툭 떨어지는 가없는 벼랑이었다


얼어붙은 하늘처럼 크게 뜬 당신의 눈을 내다보는 저녁


동네에 열병을 옮기는 귀신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고

굴뚝마다 연기들이 우왕좌왕 몸을 떨었다


당신은 내 몸에 없는 거야 내가 다 내쫓았거든


내 가슴에 눈사태가 나서 한 시간 이상 떨었다


기침나무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 뭉치를 떨구자

벌어진 계곡에서 날 선 얼음들이 튕겨져 나왔다


맨얼굴로 바람을 맞으며, 입술을 떨며

나는 얼어붙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당신이 들여다보는 여기에서 나가고 싶었다


김혜순 시인의 시집 <당신의 첫>을 읽었다. 시집을 읽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어서 폐부를 찌르는 시인의 감정이 때로는 나의 심장을 겨누기도 하고, 노을을 바라보던 시인의 시선은 줄곧 빈 허공을 맴돌기도 하였다. 김 시인에게 '시란 불행을 더 불행답게, 슬픔을 더 슬픔답게, 파괴를 더 파괴답게 하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이따금 등장하는 젊은 여자와 늙은(혹은 나이 든) 여자가 사는 이곳은, 발가벗고, 때리고, 엉키고, 뒹굴던 메아리나라. '내가 풍경을 바라보는 줄 알았는데/풍경이 날 째려보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 질겁했습니다'라고 했던 당신의 고백.


시를 읽는다는 건 허공에 걸린 자신의 조각상을 향해 칼을 겨누는 일이다. 차갑게 식은 그 몸뚱어리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칠 리는 없지만 한나절 그렇게 난자하다 보면 어느새 내 눈물이 붉은 피로 변해 흐르고, 내 이웃이 흘린 눈물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삶의 시간들이 뜨거운 숨결의 연속이어야 한다는 것을 시구 한 자 한 자를 되짚으며 깨닫게 된다.


태풍 송다가 비껴가는 일요일 오후. 옷이 비에 젖어 후줄근할지라도 마음만은 언제나 뽀송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손에 잡았던 김혜순 시인의 시집. 장마철인데 나는 마치 황폐한 사막에 다다른 듯 모래바람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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