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예찬 -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
로버트 디세이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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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할 시기가 되었다. 몇몇 친구들은 이미 명예퇴직을 했거나 준비 중에 있는 것으로 안다. 이제 다들 그럴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며 남은 삶을 살아갈지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친구는 많지 않은 듯 보인다. 많지 않은 게 아니라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함이 지금 내 나이대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인 듯하다. 일에 묻혀 살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던 과거에는 마음껏 여행을 하고 싶다거나, 골프나 등산 등 누리지 못했던 여가 생활을 원 없이 누려보고 싶다거나, 아무도 없는 산골에 터를 잡고서 유유자적 한가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거나 하는 등 하고 싶은 일도, 바라는 것도 참 많았지만 막상 내 나이가 되고 보니 원하던 삶을 살아보겠다는 생각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눈앞에 펼쳐질 무한대의 시간을 도대체 뭘 하면서 채워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귀농을 했던 몇몇 친구들은 1년도 되지 않아 도시로 복귀를 했고, 허구한 날 골프를 치던 친구도 이제는 그마저도 지겨웠는지 집 밖 출입이 뜸해졌고, 장사를 시작했던 친구들도 수월찮은 돈만 까먹고 폐업 절차에 접어들었으니 어느 것 하나 마음 놓고 선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과 여가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 채 노후를 설계하겠다는 젊어서의 꿈은 한낱 꿈으로 그칠 공산이 커진 셈이다. 무작정 일만 쫓으면서 살았던 우리는 그 세월 동안 점차 노는 법을 까먹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노는 법을 까맣게 잊은 우리가 정작 노는 시간이 눈앞에 놓이자 허둥지둥 당황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 이해하기로 여가란, 결코 물리적 이익을 바라지 않고 (설사 그것이 결국엔 우리는 물론 타인에게 실질적 도움이 된다고 해도) 순전히 그 즐거움을 위해서 자유로이 선택한 것,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단장하고, 취미 활동을 하는 등 광범위한 영역을 두루 아우를 때 쓰는 단어다. 여가를 누릴 때에는 가치보다는 기교가 훨씬 중요하다. 현명하게 선택한 여가는 아무리 짧은 삶에도 깊이를 준다."  (p.29 '들어가는 말' 중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문학가 로버트 디세이가 쓴 <게으름 예찬>은 게으름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시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우리가 자신의 삶 속에서 즐겁게 뛰노는 법을 배움으로써 한가로이 삶을 즐기는 과정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삶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쁘다는 것은 결국 일에 매몰되어 자신의 존재를 잊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타인과의 관계와 삶의 의미, 왜 사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깊은 성찰을 유도하지 못한다.


"노는 것은 당신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키케로와 세네카는 그것으로 열변을 토했고, 중국부터 유럽의 가장 끄트머리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그 통찰을 이야기했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기간 동안 특정의 규칙을 관찰하면서, 당신은 당신의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위해 어떻게 시간을 쓸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노는 것에 그 이상의 목표는 없다. 몇백 년 동안 지배계급이 성직자들과 군대와 함께, 노동은 신성하다고 주장해왔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p.274)


저자는 '일해야 할 의무가 대체 무엇이 "성스럽다"는 말이냐'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고전문학 작품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요시다 겐코의 『쓰레즈레구사』, 시트콤 <핍 쇼>와 다큐멘터리 <스시 장인: 지로의 꿈> 그리고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불러온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진정한 휴식'이 무엇인지 희미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세계를 상상할 수는 없을까? 거의 모든 사람이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 신체에 무리 없이 창의적으로 일하고, 휴가는 길어서 매년 수백, 심지어 수천 시간을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마음껏 놀며, 근사하게 비옥한 여가를 마음껏 즐기는 세계 말이다."  (p.282)


멀리 중동의 사막에서는 월드컵 열기가 뜨겁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월드컵 참가국의 국민들은 자국 선수들의 선전을 기대하며 밤잠을 잊은 채 텔레비전 중계를 시청한다. 또는 그 각본 없는 드라마에 울고 웃고 탄식하며 정신없이 빠져드는 것이다. 놀이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 이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렇게 지인들과 웃고 떠들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에 찾아오는 나른한 피로감에 까무룩 잠이 드는 것, 내일 아침 만나는 사람들과 어제 있었던 일을 주고받으며 하루의 일과를 무리 없이 해치우는 것. 우리의 삶이 죽음 직전까지 그렇게 활기찬 하루하루로 채워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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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충복들


리더 멧돼지가 되고 보니 다 좋은데 하나 아쉬운 건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점이었다. 똘마니들을 데리고 뒷골목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어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무시로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리더 멧돼지가 되자 나의 신변을 보호하는 경호 멧돼지며 비서 멧돼지 등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동행하는 멧돼지가 어찌나 많은지 매번 떼를 지어 이동하는 통에 그들의 눈을 피해 예전의 똘마니들과 호젓하게 술을 마신다는 건 꿈같은 일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나는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인데 꽐라가 된 내 모습이 소문을 타고 일반 멧돼지들에게 알려지는 바람에 아내 멧돼지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받았고, 나는 그 일이 있은 후 극도로 조심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바로 아내 멧돼지였기 때문이다. 결혼 전, 그러니까 내가 술과 여자에 빠져 살면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처럼 행동하던 시절, 종종 나의 술시중을 들었던 아내 멧돼지는 자신의 집안에 가득 쟁여 둔 곡식과 고기 등 다른 멧돼지들이 탐낼 만한 풍족한 재산을 보여주며 자신과의 결혼을 생각해보라며 넌지시 유혹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내 멧돼지의 생각은 변함이 없는 듯했다. 자신과 친인척들에게는 없는 권력, 그것이 나를 유혹했던 유일한 이유였고 지금도 아내 멧돼지는 내가 소유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떤 짓을 하든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심지어 내가 다른 여자 멧돼지와 관계를 맺든, 싸움질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관계를 맺기 전 그에 합당한 돈을 지불하여 소문만 나지 않게 해 달라는 게 유일한 조건이었다. 그런 쿨한 태도가 맘에 들었던 나는 아내 멧돼지의 천박한 품행에 대한 여러 소문을 무시한 채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의 첫 번째 충복이 된 아내 멧돼지보다 더 오랫동안 알고 지낸 멧돼지가 두 마리나 더 있다. 멧돼지계에서는 같은 배에서 출산하는 멧돼지 숫자가 워낙 많고 흔하다 보니 쌍둥이라는 개념은 없다. 대신에 하는 짓이나 생각 등이 비슷한 두 멧돼지를 일러 '동운(同韻)'이라고 하는데, 뒷골목 생활을 하던 시절 나의 똘마니 중 한 마리였던, 그러나 다른 멧돼지들보다 영민하고 나의 말을 잘 들었던, 그럼에도 이름조차 없었던 멧돼지에게 나는 '동운(同韻)'이라는 이름을 하사했고, 그는 나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결혼 후 아내 멧돼지 역시 작은 분란만 있어도 '동운' 멧돼지에게 그 사실을 알려 해결을 부탁하곤 했으며, 그럴 때마다 '동운' 멧돼지는 만사를 제쳐둔 채 전력을 다해 아내 멧돼지를 도와주곤 하였다.


'상민(常民)' 멧돼지는 '동운' 멧돼지에 비하면 성격도 하는 짓도 판이하게 달랐다. 그도 역시 나의 똘마니 멧돼지들 중 일원이었으며 이름이 없었던 건 '동운' 멧돼지와 같았다. 어느 날 여러 멧돼지들과 거나하게 취해 있을 때 '상민' 멧돼지가 헐레벌떡 술판으로 뛰어들었고, 그의 계급이 상민(常民)이었던 까닭에 "어이, 상민(常民) 왔는가?" 하고 반갑게 물었던 것이 인연이 돼서 '상민' 멧돼지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행동은 좀 굼뜨지만 나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해서 나는 사실 그가 웬만한 실수를 저질러도 모르는 척 눈감아주는 편이었다. 얼마 전에도 젊은 멧돼지들이 좁은 골목에서 서로 먼저 가겠다고 우격다짐으로 서로 밀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와 부상자가 나왔고, 이에 분개한 전국의 멧돼지들이 치안과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상민 멧돼지의 책임을 물어 경질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어깨를 두드려주며 그의 노고를 격려했었다. 멧돼지들이란 그저 잠시 동안 눈물을 보이는 척하고 아랫것들을 적당히 벌을 주는 시늉만 해도 그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 수 있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충성을 다하는 '동운' 멧돼지와 '상민' 멧돼지가 있고, 몇몇 멧핵관들이 존재하지만 나의 퇴진을 주장하는 멧돼지들의 행진이 주말마다 이어지고 있고, 소위 학자 멧돼지들도 나의 리더십에 반기를 드는 추세가 뚜렷하다.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조만간 전투 멧돼지를 동원하여 무섭게 겁을 주어야만 사그라들 듯하다. 리더 멧돼지가 되면 마음껏 술이나 퍼먹고 원하는 여자 멧돼지를 언제든 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골치 아픈 일들이 끝없이 이어질 줄이야...


*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히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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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0 19: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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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3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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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것은 한 권의 소설입니다!'라고 큰소리로 선포해야 할지도 모른다. 소설이라는 단어에 굵게 밑줄을 긋거나 소리를 높여 강조할 필요도 있을 테고 말이다. 스토리도 목차도 없는 소설이 그 자체로서 소설의 절대성이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을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것은 '배수아'라는 소설가에 대한 의구심인 동시에 의식의 흐름에 대한 자유분방한 기술 또는 가늠하기 힘든 생각의 방향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면밀한 탐구쯤으로 정의하기로 하자. 일단은.


"정신적 빈곤과 경박함은 곧 죽음과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은 M의 생각이었다. 진지한 시선이 결여된 정신은 부패하는 고기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실제로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에 앞서서 추상적인 개념으로 우리 삶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점유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말한다면,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p.69)


소설의 화자인 '나'는 독일에 체류하던 한때 M을 사랑했고, 그와 헤어진 후 다시 찾은 독일에서 요하임이라는 친구의 집을 방문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한다. 성탄절 전날에 요하임의 어머니 집을 방문하거나 연말에 대학생들이 모이는 파티에 참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일상은 소설의 어떤 사건이나 결말을 구성하기 위한 전제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스쳐갈 뿐이다. 다만 그와 같은 일상의 소일거리 속에서 문득문득 M에 대한 기억들이 개입한다. M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조금씩 확장되다가 글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작가는 M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의 줄기로 삼아 음악이나 언어 또는 죽음과 같은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풀어놓고야 만다. 결국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다루는 듯하던 이야기는 일상 속으로 용해되고 M과 '나' 혹은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예술적 주제들에 대한 견해나 관점이 글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혹은 M을 위해서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현악기 연주를 했어야만 했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  (p.144)


배수아의 소설에 빠져드는 이유는 단 하나, 의식과 의식 저편의 경계에서 소설이 펼쳐지고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냉랭한 현실의 감각을 쉽게 잊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책을 읽는 아주 잠깐의 시간만큼은 말이다. 밀란 쿤데라의 어느 작품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우리는 그런 느낌을 공유할 수 있지만 배수아는 이보다 한 발 더 깊이 들여놓아도 괜찮다고 독자들을 유혹한다. 그것은 때로 마약과 같은 중독성을 동반한다. 배수아의 소설을 접했던 독자라면 그녀의 작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결별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상 앞에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페터 한트케의 말처럼,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p.174)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는 달콤하다. 그러나 단맛은 언제나 순간적인 감각일 뿐 영원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소설에서도 언급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음악은 언어가 탐구하지 못한 인간 신체의 다름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의 서툰 연주가 가을의 햇살 속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은 언어로만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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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게 따져볼 일이 있다. 예컨대 나훈아의 무료 콘서트가 열렸고 그곳에 갔던 다수의 노인들이 압사당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에도 위패와 영정 사진도 없이 국화꽃만 가득한 분향소를 설치할 것인지... 그분들의 이름이나 사진을 공개하면 패륜이라고 강하게 비난하면서 이를 공개한 언론들을 고발할 것인지... 내 생각에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번 '10.29 참사' 희생자들은 왜 그런 식으로 대접했을까? 여기에는 정부와 여당의 분명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강력하고도 확실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에이, 이름이나 사진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정부에 유리한 게 뭐 있겠어?' 하고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음모가 음모다워지기 위한 전제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두에서 제시했던 가정으로 돌아가 보자.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정부와 지자체는 물론 모든 언론을 통하여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발표하고 약간의 위선이 섞였을지언정 진심 어린 애도 분위기를 조성하려 애쓸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발생한 '10.29 참사'와 무엇이 다른 것이기에 이런 추측이 가능한가? 단지 희생자의 나이만 다를 뿐인데...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와 지자체 또는 행안부와 경찰, 소방 등의 책임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단지 희생자의 나이가 젊고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대하는 대우가 이토록 달라진다는 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닌가. 게다가 노인들이 왜 쓸데없이 그런 곳에 가서 그런 사달을 일으켰느냐고 말한다면 그 사람을 오히려 패륜이니 망언이니 하고 나무랄 게 분명하다.


이와 같은 논지에서 젊다는 건 하나의 '죄'이자 유족들에겐 '천형'일 수밖에 없다. 사실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한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임이 분명한데 모든 잘못을 희생자 본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유족들 또한 자신의 아들, 딸들이 하필이면 그날, 쓸데없이 그곳에 가서 값싼 죽음을 당한 것일 뿐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주장할 것도, 그렇다고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 떠벌릴 일도 아니라는 의식을 갖게 한다. 말하자면 희생자의 신분이 밝혀짐으로써 인터넷상에 떠돌게 될 여러 가짜 뉴스와 악성 댓글이 두려워지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인식은 희생자의 이름이 익명으로 처리됨으로써 더욱 공고하게 유지되거나 강화된다. 희생자의 신분이 밝혀지고 여러 가짜 뉴스가 떠돌 경우 그것은 정부가 앞장서서 지켜주고 보호할 일이지 유족들이 떠안을 고통이 아님에도 현 정부의 태도로 보아하니 그럴 것 같지 않은 것이다. 유족들은 그게 두려운 것이다. 어차피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닌데 조용히 덮어두는 게 그들로서는 최상의 방책인 듯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정부와 지자체는 면죄부를 얻고 지지율 하락이나 국민들의 분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고맙게도 말이다. 물론 희생자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국민들 역시 희생자들을 쉽게 잊을 수 있을 테고.  이처럼 강력한 효과가 있는데 굳이 희생자의 신분을 노출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입장에서는 어떤 협박이나 핑계를 대서라도 막아야 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오늘은 대입 수능일. 연말이면 다시 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예비 성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테다. 우리는 그들에게 죄책감을 담아 충고할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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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2-11-18 0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길가다 이런 어이없는 죽임을 당해도 죽었다 말 할수없고 책임 지지도 않으며 알아서 살아가야하는 독재의 나라를 6개월만에 만들어내는 똥멍청한능력은 세계최고네요.
아직 1567일남았어요. 제발 이 날짜가 빨리 줄어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꼼쥐 2022-11-19 16:26   좋아요 1 | URL
그렇게 긴 시간을 견딜 수나 있을지 걱정입니다. 차라리 그 전에 뭔 수를 내지 않으면 국민들이 먼저 죽지 않을까 싶은데 말입니다.
 
위안이 된다는 것 -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
안셀름 그륀 지음, 황미하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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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그렸지만 본인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얼굴입니다. 얼굴에는 자신의 삶의 이력이 그려집니다. 자연스러움은 이처럼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를 모두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지식이 너무나 얕고 보잘것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삶에서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입니다. 온갖 부조리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를 주저앉히는 좌절과 낙담, 슬픔과 분노... 위로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정작 위로가 필요치 않은 시기에는 위로가 없었던 것처럼 위로가 넘쳐난다는 건 또 한편으로 슬픔과 분노 혹은 좌절과 낙담이 넘쳐난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위로를 가장한 거짓 위로가 세상을 장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 없는 빈 밭에는 밀알의 싹보다는 잡초만 무성한 것처럼 말이지요.


"일부 그리스도교 단체들도 상업 광고처럼 그러한 구호를 내걸면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신앙인들로 구성된 자기네 공동체 안에서 위안을 얻게 될 거라고 약속합니다. 그 단체들이 자신들의 약속을 이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놓고도 늘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큰 도움을 주는 긴밀한 관계, 결속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게 될 거라고 피상적으로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더 심오한 것입니다."  (p.40)


세계적인 영성 심리 상담의 대가인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저서 <위안이 된다는 것>을 구매했던 시점은 '10.29 참사' 직후였습니다. 최근의 일이지요.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좁은 골목길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에게도,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국민들에게도 진정한 위로를 건네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국정을 책임지는 관료들의 생각은 '시간이 가면 금세 잊힐 일인데 뭐 그리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것일 테지요. 적당히 애도하고 밑선에서 몇 명 책임자를 처벌하면 가족을 잃은 유족들도, 일시적으로 분노하는 국민들도 그 위세가 금세 잠잠해지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을 되찾게 될 것이라는 게 그들의 판단인 듯합니다. 그러나 깊은 슬픔은 가슴에,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깊은 생채기를 남길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새살이 돋고 그리운 이를 가슴에 묻을 때까지 말입니다.


"울음은 쌓이고 쌓여서 터져 나오는 감정에서 우리의 짐을 덜어 줍니다. 눈물은 고통을 완화시킵니다. 펑펑 울고 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울음은 누군가를 제압하고 그에게 과도하게 요구하는 듯한 고통을 견뎌 내게 하고 그에게 답해 주는 유일한 방법이 됩니다. 우리 인간은 울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 울면서 자기를 내려놓는 것, 그러면서 고통을 허용하고 그 방향을 돌리거나 사라지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답을 더 이상 알지 못합니다. 말로도, 몸짓으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p.218)


책의 부제인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륀 신부님의 의도는 명백합니다. 어떻게든 지금의 슬픔이나 좌절에서 벗어나 남은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어쭙잖은 말로 생색을 내거나 아는 체를 한다는 건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장 '빗나간 위로', 2장 '결속감에서 얻는 위로', 3장 '아름다움 속에 깃든 위안', 4장 '자연이 주는 위안', 5장 '몸과 영혼에 생기를 북돋아 주는 위안', 6장'내적 원천의 힘', 7장 '기도가 주는 위로'의 목차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위안을 얻습니다. 포옹이나 대화, 독서, 음악, 그림, 자연, 산책, 반려동물, 운동, 낮잠, 걷기, 목욕, 기억, 유머, 고요, 기도 등 신부님이 제시하는 위안의 방법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친밀한 사람이 당신과 대화를 나눈 뒤 위로를 받고 떠나간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도 굳세게 할 겁니다. 위로, 위안은 이 불확실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 모두에게 든든한 토대를 마련해 줍니다. 이 토대 위에서 우리는 자신을 향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서로 마주보며 똑바로 설 수 있습니다."  (p.292 '맺음말' 중에서)


우리는 종종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와 같은 꼰대질을 지금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내뱉곤 합니다. 습관화된 자기 과시와 자기 피알의 시대에 위로마저 형식적으로 흐르는 듯하여 씁쓸하기만 합니다. 결국 우리는 마음과 마음이 다가가는 방법을, 체온과 체온으로 위로하는 방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세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시 '놀다'에는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괴로움을 견디느라 괴로움과 놀고/ 슬픔을 견디느라 슬픔과 놀고/ 그러다가/ 노는 것도 싫어지면/ 싫증하고 놀고......”(「놀다」 전문) 싫증하고 놀 수 있는 날은 아마도 머나먼 미래가 될 듯합니다. '10.29 참사'를 잊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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