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날씨를 몸이 못 따라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주일 쌓인 피로가 주말에도 풀리지 않는다. 20도를 넘나드는 기온에 봄인지 겨울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날씨. 나는 께느른한 몸을 이끌고 친구와의 점심 약속에 나갔었고, 자리를 옮겨 차를 한 잔 마셨고, 의자 아래로 가라앉을 것만 같은 무력감에 귀가를 서둘러야만 했다. 해가 갈수록 삶이 녹록지 않다고 느끼는 까닭은 기후 변화에 적응하는 일조차 점점 힘에 겹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 우리나라 국민 중 많은 이들이 뉴스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종편을 포함한 지상파 언론사에서 송출하는 뉴스의 보도 행태나 질이 어느 유튜버의 코멘트보다도 못한 실정이니 누가 굳이 시간을 내어 그 같은 저질의 뉴스를 시청할까마는 그럼에도 대한민국 정치 수준은 나날이 떨어져 80년대 군부독재 시절 이전으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을 볼 때마다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이와 같은 현상을 초래한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수면 아래에서만 존재하던 '꼴통 보수'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여 대한민국 정치판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극우'나 '정통 보수'가 아닌 '꼴통 보수'라는 용어는 세계 어느 나라의 정치 사전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특수한 언론지형에서나 가능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꼴통 보수'는 첫째 나와 사상이 다른 이는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여 대화가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둘째 나의 이익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물론 어느 정도의 불법 행위는 언제든 용인되며), 셋째 자신이 믿는 종교의 유일신도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언제든 배신할 수 있으며(이를테면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말했던 어느 목사의 발언처럼), 넷째 나와 사상이 다른 상대방에 대해서는 최고 권력자라고 할지라도 입에 담을 수 없는 갖은 욕설을 퍼부을 것이며(대통령을 향해 공산주의자 또는 간첩이라고 지칭하였지만 처벌은 받지 않음), 다섯째 자신의 모국인 대한민국보다 일본을 더 사랑하며, 여섯째 검찰이 자신을 기소하지만 않는다면 자신이 지닌 권력을 축재의 정당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좋게 말하면 '돌+아이'이고 나쁘게 말하면 '꼴통 보수'인 그들이 대한민국에서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우호적인 언론지형과 검찰을 포함한 권력의 비호와 두둔이 늘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위에서 나열한 '꼴통 보수'의 특성은 순전히 나의 판단이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혹여라도 현재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인 어떤 사람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오해라고 말하고 싶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2023 올해의 한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가 꼽혔다고 한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다'는 뜻의 견리망의는 '꼴통 보수'의 모토가 아닌가. 그와 같은 사자성어가 뽑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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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12-10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한자성어가 시사하는 바가 크네요.

꼼쥐 2023-12-16 13:03   좋아요 0 | URL
교수신문이 선정하는 올해의 한자성어가 대개는 뜬금없지만 올해는 비교적 적당하지 않았나 싶어요.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지음, 서제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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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관심은 오히려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평소에 가깝다고 느끼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나에 대한 세세한 질문을 퍼붓거나 지난달보다 살이 조금 빠졌다거나 쪘다거나 하는 식의, 나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추측성 정보를 마치 사실인 양 단언하면서 살갑게 다가서려는 모습 등은 거북하기 이를 데 없지만 악의가 없는 상대방을 야멸차게 밀어내는 것도 차마 못할 짓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마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회생활에 있어서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를 산정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닥치는 갈등 중 8할 이상은 서로 간의 거리를 잘못 책정한 탓일지도 모른다. 가깝지도,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반응의 부재는 내 삶에서 하나의 존재로 변했다. 이 존재에서는 고립의 감각이 흘러나왔고, 그 감각은 점점 더 꾸준하게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그 스며듦에서 하나의 진공 상태가 만들어졌다. 그 진공 상태 속에서 나는 외로움뿐 아니라 내가 단절되었음을, 피해야 할 인간 본연의 상태가 됐음을 느꼈다.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다는 극심한 욕구에 사로잡힌 나머지, 나는 스스로 생각해왔던 것보다 한층 더 즉각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나는 내면의 균형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그 균형의 불안정함은 나를 놀라게 했다."  (p.193~p.194)


미국의 에세이스트이자 비평가인 비비언 고닉의 저서를 처음 만났던 건 지난여름, <사나운 애착>을 통해서였다. 회고록 장르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그 책 덕분에 나는 비비언 고닉이라는 에세이스트의 매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손에 잡은 고닉의 저서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는 책에 대한 소개보다도 제목에 이끌려서 읽게 되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변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과 간섭 탓에 몇 번 마찰을 빚었던 나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나만의 공연을 펼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혼은 친밀감을 약속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유대감은 부서져 내린다. 공동체는 우정을 약속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참여는 끝이 난다. 지적인 삶은 대화를 약속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 삶의 신봉자들은 괴상해진다. 사실은 정말로 혼자 있는 게 더 쉽다.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것을 해결해주려 하지 않는 존재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p.216)


비비언 고닉이 관찰하는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지구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들이지만 그녀의 눈은 마치 현미경과 같아서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소한 것들, 그 무수히 많은 세세한 조각들을 통하여 마음에 의문으로만 남았던 여러 정황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테면 우리가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지나쳤던 여러 실마리들을 고닉은 하나하나 찾아내어 우리 앞에 펼쳐놓는 것이다. 그리고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러이러해서 슬펐으며, 저러저러해서 외로웠으며,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이러이러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 후에 내가 외로움에서 나 자신을 비틀어 떼어냈던 게 기억난다. 외로움은 나를 겁에 질리게 했다.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 균형이야말로 모든 것이었다. 나는 내 주위 잔디밭을, 건물들을, 주차장을, 직무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 조그맣고 빈틈없는 세계를 둘러보았다. 이 세계에서 내가 훌륭하게 작동하는 방법을(다시 말해 무례한 모욕을 피하고 어디까지 굴복할지 한도를 조절하는 방법을) 익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똑바로 앞을 보고, 입을 다물고, 온전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었다. 삶의 크기가 얼마나 되든,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되든, 삶은 순간이라는 좁고 똑바른 길을 걸어 나가는 데 달려 있다고 나는 단호하게 생각했다."  (p.102~p.103)


책에 실린 일곱 편의 글에서 고닉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다른 어느 것보다 소중하다고 말한다. 때로는 어려운 일에 몰두하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살아갈 동력을 얻기도 하고,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낯선 이들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으며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홀로 있는 것보다 더 외롭고 고독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감기 몸살 후유증으로 인해 최악의 컨디션으로 한 주를 보냈던 나는 비비언 고닉의 몇몇 문장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20도에 육박하는 이상 고온으로 인해 계절은 다시 가을의 어느 시점으로 회귀하는 듯하다. 급변하는 날씨 탓에 사람도 자연도 몸살을 앓는다. 기후 위기가 아니라 기후 전쟁이 시작된 듯한 느낌. 전쟁과 같은 이 삶에 전하는 비비언 고닉의 위로,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는 읽는 이의 기억에 남지 않고 가슴 밑바닥에 찰랑찰랑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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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몸살로 주말 일정을 모두 비운 채 꼬박 앓았다.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면 나의 몸은 이제 시차를 두지 않고 즉각즉각 반응을 한다. 나이가 들었음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피로를 담아두는 그릇이 바다만큼 크고 넓어서 하루이틀 밤을 새우는 정도의 무리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낼 수 있었던 시절이 내게도 물론 있었다. 나 죽겠소 할 정도로 피곤함을 느끼다가도 하루이틀 쉬고 나면 웬만큼 회복이 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로를 담는 함지박이 시나브로 조금씩 쪼그라들다가 어느 순간 그 공간이나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는 것이다. 야속한 게 흐르는 세월이지만 어쩌겠는가.


육체를 과하게 사용했다는 경고를 즉각적으로 알려주는 것처럼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과한 욕심을 제어하고 즉각즉각 알려주는 영혼의 시계가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세월에 비례하여 약해지는 체력에 비해 인간의 욕심은 줄어들 줄 모르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부끄러움도 없이  명품백을 덥석덥석 받거나 국토의 동맥인 고속도로의 건설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등 권좌에 있는 동안 부릴 수 있는 모든 욕심을 한껏 펼쳐보려는 어느 여인이 있으니 인간의 어리석음은 바로 거기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욕심을 제어하는 영혼의 시계가 누구에게도 없으니 말이다.


총선이 멀지 않았다. 정치인들의 욕심이 최대로 분출되는 시기가 지금일 터, 자신의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떠도는 이합집산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가끔 되지도 않는 명분을 언론에 발표하지만 그걸 믿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신념은 없고 오직 욕심만 남은 저급한 정치판에선 썩은 내가 진동한다. 언론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의 나이도 결코 어리지 않은 듯한데.


지금도 몸살기가 가시지 않은 듯하다.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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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12-04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2023년 서재의 달인 선정되심 축하드립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슷해서 꼼쥐님 글을 통해서 같이 공감하고 분노하고 그랬던 한 해 였던것 같습니다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꼼쥐 2023-12-09 13:0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사실 알라딘 서재에 애착이 가는 이유는 나와 같다면 님처럼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가지신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분들을 통하여 활력을 얻곤 합니다. 나와 같다면 님, 서재의 달인, 북플 마니아로 선정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서니데이 2023-12-05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

꼼쥐 2023-12-09 13:12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님의 글을 자주(매일은 아니지만) 읽고 있습니다만 그 한결같은 노고에 고맙다는 말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서니데이 님 덕분에 힘을 얻는 한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2023년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잉크냄새 2023-12-1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은 축하 인사드립니다.

꼼쥐 2023-12-16 13: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잉크냄새 님도 올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즐거운 연말연시 맞으시길~~
 

낮은 각도의 겨울 햇살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희끄무레 물때가 묻은 베란다 유리창을 통해 너울너울 퍼지는 햇살. 겨울 햇살은 마치 꼬리가 긴 저녁노을을 닮은 듯합니다. 성긴 햇살 알갱이 사이로 그리운 이름과 얼굴들이 떠다닙니다. 중학생인 듯 보이는 네 명의 아이들이 추위도 잊은 채 아파트 놀이터에서 캐치볼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입니다. 피곤에 지쳐 께느른한 오후 햇살이 아슴아슴 졸음을 몰고 옵니다.


굥교롭게도 문제가 많았던 합참의장 후보자가 오늘 임명되었습니다. 자녀의 학폭 의혹과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당일 주식 거래와 골프를 한 사실 등 합참의장은커녕 일반 사병의 경계 태세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를 군의 최고 실세(각군의 작전부대를 작전지휘·감독하고, 합동작전 수행을 위하여 설치된 합동부대를 지휘·감독) 자리에 앉힘으로써 대한민국 군대가 당나라 군대로 전락했음을 만방에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자칭 세계 최고의 디지털 정부라면서 영국 런던 내각부를 방문했던 행안부 장관은 디지털정부를 담당하는 영국의 알렉스 버가트 내각부 장관과 '한-영 디지털정부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하니 소가 웃을 일입니다. 국내의 행정 전산망 먹통 사태의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면서 말입니다.


장석주 박연준이 쓴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를 읽고 있습니다. 1월에 시작된 그들의 책 읽기 일기는 6월이 되어서야 끝이 납니다. 그들이 읽었던 많은 책에 대한 짧은 일기 형식의 글이 책의 지면을 메우고 있습니다.


"아껴 읽던 <A가 X에게>를 방금 다 읽었다. 좀 울고 싶어졌는데, 누가 코끝에 고추냉이를 쑤셔넣은 것처럼 찡해졌다. 어떤 밤은 감정을 쏟아내고 싶지 않고 쟁여놓고 싶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런 밤이 있다. 감정을 아끼게 되는 밤. 아모스 오즈의 단편을 더 읽고, 음악을 들으려 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처 나서 벌어진 틈새로 피가 고이고, 아물 때 즈음이면 결국 마음의 결이 바뀌게 되는 글. 이 책은 정치범으로 독방에 갇힌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인이 그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 한 번의 면회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리움으로 야위는 여성의 말들이 담겨 있다."


나도 어쩌면 오래전에 읽었던 존 버거의 <A가 X에게>를 다시 읽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끝에 고추냉이를 쑤셔넣은 것처럼 찡해지는' 기분을 느껴보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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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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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진적'이라는 말은 달팽이처럼 느리고 완고한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대개 스스로 형성한 제 나름의 삶의 방식을 고수한 채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운 삶의 방식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요지부동의 사람들에게 있어 '점진적'이라는 말은 가히 혁명에 가까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그와 같은 까닭에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한 발짝을 내딛는다는 건 천지가 개벽할 일이며 기적에 가까운 변화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점진적'이라는 말은 혁명이자 기적을 향한 발걸음임을 새롭게 되새겨야 한다.


"당신이 잃은 건 생명보다 더한 것이었다. 말, 투명한 말의 맛, 참된 말에 대한 사랑, 그 모두를 잃은 것이다. 말 앞에서 당신은 먹을 것을 앞에 둔 아픈 아이 같았었다. 그런데 릴케가 당신에게 먹을 것을 다시 준다. 한 편의 시, 이어지는 또 한 편의 시, 한 편의 이미지, 또 한 편의 이미지. 헐벗은 말과 함께 온전한 진실이 돌아온다. 진실과 함께 온전한 영혼이 돌아온다."  (P.26~P.27)


크리스티앙 보뱅의 산문집 <작은 파티 드레스>를 올해 두 번째 읽었다. 150쪽도 안 되는 이렇게 얇은 책을 한 해에 두 번 반복해서 읽는다는 건 전에는 없던 일이다. 가장 최근에 이 책을 읽고 블로그에 짧은 글을 남겼던 건 6월이었다. 나의 독서 편력(그렇다. 나는 정말 이런저런 책을 다양하게 읽고 있을 뿐 하나의 주제, 혹은 어느 한 명의 작가에 심취하여 전작(全作)을 읽는 일은 거의 없다.)에 비추어 볼 때 같은 책을, 그것도 네댓 달 만에 다시 읽는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작가 스스로 밝혔던 것처럼 '삶의 저변 즉 근원에 닿는 한 문장에 영혼이 물들기 위해서' 이 책을 다시 꺼내 들었는지도 모른다.


"혜성 같은 사랑은 영원에 단 한 번 우리의 심장을 스친다. 밤낮없이 지켜야 그걸 목격할 수 있다. 오랫동안, 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사랑의 본성이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이 사실이야말로 사랑이 갖춘 위엄이자, 사랑의 놀라운 특성이다. 소음과 부산함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온갖 발작으로부터도 훌쩍 떨어져,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가볍고 경쾌한 자각이자 더없이 겸허한 형상이며 각성한 얼굴인 시(詩)는, 심오한 기다림이고 달콤한 기다림이다. 부드럽고도 오묘하게 반짝이는 희망이다."  (P.35~P.36)


누구나 그렇지만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에 매료되는 첫 번째 이유는 문장의 아름다움에 있다. 그렇다고 미사여구만 나열한 허튼 문장이 아니라 현실에 숨겨진 진실을 간결하고 응축된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꾸며진 아름다움과 진실되고 투명한 아름다움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나처럼 어리석은 독자도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보뱅에게서 주목할 것은 깊은 사유와 관찰을 통해 보이지 않던 관계를 우리 앞에 드러낸다는 점이다. 사랑과 기다림, 피로와 어머니, 빛과 목소리, 기도와 침묵, 독서와 고통 등 우리가 미처 그 연결점을 찾지 못했던 수많은 관계와 이어짐을. 혹은 그 가능성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반면 여자들은 굶주린 고양이 같은 고통을 받아들인다. 되살아나려면 그들을 파괴할 필요가 있는 고양이이다. 그들은 꼼짝하지 않는다. 되는 대로 내버려 둔다. 그리고 고통으로 정지된 이 시간을 메우려고 책을, 소설을 편다. 여전히 소설이다. 거기서 그들은 각각의 나날 속에 내재된 그것을 발견한다. 희망과 영락, 근심과 은총, 살아감의 영원한 상처를."  (p.89~p.90)


휴일 한낮의 소음이 빛의 소멸과 함께 빠르게 스러지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고,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고 썼던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은 불어오는 저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힘으로 압도한다. '당신이 신문을 빠짐없이 낱낱이 읽을 수 있는 건 그 안에 본질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골목을 빠져나온 바람이 회오리처럼 가볍게 맴을 돌다 스러지듯 명멸하는 나의 기억 속에서 아주 잠깐 스쳐간다. 바람이 바람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크리스티앙 보뱅의 문장들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휴일 하루가 또 그렇게 소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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