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기 전에 쓰는 글들 - 허수경 유고집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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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나는 이따금 답도 알 수 없는 이 질문을 붙잡고 하염없는 상념에 빠져들곤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글을 줄기차게 읽어왔다.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를 썼던 위지안 교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썼던 신경외과 의사 폴 칼라니티,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주인공이었던 모리 교수 등 여러 책을 전전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답은 찾지 못했다. 아니,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이승과 저승의 법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승의 이 편에 있는 내가 저승으로 향하는 저 사람들의 메아리를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 진의를 어찌 해석할 수 있을까.


"불안은 자꾸 잠을 잘라둔다.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어느날 긴 밧줄 같은 잠에 묶여 불안이 나오지 못할 만큼 자야겠다."  (p.275)


무위의 질문에 사로잡힌 나는 또 허수경 시인의 유고 산문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을 읽었다. 바람을 움키듯 나는 결국 헛힘만 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내가 마주하는 질문은 언제나 진한 향기로 유혹한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엄연한 사실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생명 연장에 대한 유혹을 내려놓은 자만이 들을 수 있는 간절함의 시간일 테니까. 나는 삶의 이쪽 편에 서서 웅웅 바람결에 메아리로 들리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허사로 귀결되는 무용의 독서를 이어간다.


"나는 귤을 쪼갰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 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p.307~p.308)


생의 마지막 항암치료를 앞두고 김민정 시인에게 썼다는 허 시인의 편지. 쓰고 있는 작은 시집이 있는데 내달라는 내용과 함께 원고는 메일로 보낼 테니 오지 말라는 당부. "너를 보면 겨우 참았던 미련들이 다시 무장무장 일어날 것 같아. 시인이니 시로 이 세계를 가름하는 걸 내 업으로 여기며 살아왔으니 마지막에도 그러려고 한다."는 허 시인의 편지. 책을 읽는 우리는 그저 먹먹한 슬픔만 한 줌 손에 쥘 뿐 정작 찾고자 하는 질문의 답은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삶과 죽음 사이의 넓은 행간은 내가 레테의 강을 건널 쪽배를 타는 순간에나 읽을 수 있으려나.


"글을 참 맛깔나게 쓰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옆에서 조곤조곤 말하듯 쓰는 사람들이다. 옆에서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담스럽지 않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부럽다는 생각. 허세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자신이 다치지도 타인을 다치게 하지도 않는 글. 그런데...... 글은 그것뿐인가?"  (p.230~p.231)


'글을 참 맛깔나게 쓰던' 허수경 시인. 다정함은 인간의 체온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더이상 우리는 시인이 보내는 다정한 인사를 기대할 수 없다. 나는 다만 내가 기억하는 시인을 향해 내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최선을 다한 다정함의 끝에는 울컥울컥 무른 슬픔이 묻어나겠지만 봄바람이 부는 소슬한 오후를 내 다정함의 온기로 덥혀 보려 한다. 주말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조금 더 다정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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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간만의 독서


마음에 난 상처는 부둥켜안을 수 없습니다. 펄펄 뛰는 상처가 또 다른 상처로 이어져 지난 상처를 자꾸 덧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날아드는 보이지 않는 칼날을 막거나 피할 재주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상처가 깊지 않도록 서로를 보살필 뿐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깊은 아내 멧돼지는 며칠째 두문불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욕심의 칼날을 향해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던 아내 멧돼지는 난도질도 모자라 죽음 직전까지 자신을 몰아붙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칼날에 처참하리만치 상처를 입은 아내 멧돼지를 향해 한 마디 위로의 말을 전한다는 건 되려 상처만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쭈뼛쭈뼛 아내 멧돼지의 눈치만 살필 뿐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아내 멧돼지의 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아내 멧돼지와 내가 사지가 묶인 채, 활활 타는 장작더미 위에서 통구이가 될 준비를 하고 있더랍니다. 주변에는 일반 멧돼지들이 겹겹으로 우리를 감싼 채 성난 표정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구호를 외치는가 하면 개중에는 우리를 향해 돌을 던지는 멧돼지도 있더랍니다. 장작불 위의 등허리는 곧 타들어갈 듯 뜨겁고 멧돼지들의 성난 구호와 우리를 향해 던져지는 무수한 돌멩이들로 인해 곧 죽을 것만 같았다고 했습니다. 살려달라고 아무리 외쳐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멧돼지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선거가 끝난 후 우리 부부가 처할 운명을 미리 보여주는 예지몽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리더 멧돼지인 나와 나의 똘마니들을 지지하는 멧돼지들은 그 부류가 일정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려는 멧돼지, 너무 무지하거나 먹고 사는 게 팍팍해서 우리의 잘잘못을 따질 능력이 되지 않는 멧돼지,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우리를 공포스럽게 여기는 멧돼지 외에는 우리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자식이 없는 우리 부부는 우리 나라의 미래나 다음 세대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부 멧돼지가 사는 동안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뭐든지 다 이루면서 행복하게 살면 그뿐, 다른 건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멧돼지들이 뭐라 하건 우리는 못할 게 없습니다.


나는 요즘 전국을 돌며 일반 멧돼지들에게 뻥과 구라를 치고 있습니다. 한 달을 넘지 못하는 멧돼지들의 기억력을 감안할 때 내가 아무리 뻥을 쳐도 그들은 선거 전에 했던 나의 말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기억하는 멧돼지가 있다 할지라도 입을 틀어막으면 그뿐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나의 충복인 동운 멧돼지는 요즘 자뻑에 취해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제2의 리더 멧돼지라도 되는 양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자신을 연호하는 일반 멧돼지들에게 머리를 흔드는 모습은 가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거만 끝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합니다. 우리 부부나 동운 멧돼지는 같은 운명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모든 걸 잊고 책이나 읽어야겠습니다. 제목은 '레미제라블(너 참 불쌍타)'입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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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짧고도 사소한 인생 잠언 - 마흔,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처방
정신과 의사 토미 지음, 이선미 옮김 / 리텍콘텐츠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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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그런 생각이 든다. 책에서 읽거나 누군가로부터 듣게 되는 말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처럼 나와의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이를테면 평상시에 듣는다면 대수롭지 않거나 귀 기울여 듣지 않았을 어떤 말도 적절한 시점이나 상황에 따라서는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 걸 보면 우리네 말도 다 궁합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말들이 다 의미가 거창하거나 말하는 이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시기에 가장 적당한 말로 작용했을 뿐이다. 말과 나 사이의 특별한 인연이 비로소 맺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을 들려줄 귀인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고 귀인과 내가 만날 가능성을 점치기 위해 토정비결을 볼 필요도 없다. 어느 날 우연히 펼친 책의 한 페이지에서 힐끗 보았던 어느 문장이, 운전 중에 들었던 어느 디제이의 한 마디 인사말이 지금까지 있었던 우울한 감정이나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단박에 날려버리는 기폭제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찮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가 읽었던 대부분의 에세이는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거나 '잘 될 거야'와 같은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주였고,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와 같은 쇼펜하우어 방식의 따끔한 훈계는 많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 까닭에 언제부턴가 쇼펜하우어의 책들이 베스트셀러 상단에 랭크되기 시작했다. 개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와 응원이 영혼의 성장이나 삶의 태도에 있어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삶을 직시하고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 삶의 파고를 넘는 데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 128 인생의 목적: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은 사실 없는 것이죠. 모두 자신의 비행기를 조종하듯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바람을 타고 즐겁게요. 착륙하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에 어디로 향해도 괜찮아요."  (p.158)


정신과 의사 토미가 쓴 <지극히 짧고도 사소한 인생 잠언>은 얼마 전에 읽었던 그의 저서 <1초 만에 고민이 사라지는 말>에 이어 두 번째 읽게 된 책이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상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저자가 선택한 하나의 키워드에 대한 짧고 굵은 한 마디를 덧붙인 이 책은 자신의 생각을 구구절절 늘어놓은 여느 에세이와 다르게 저자가 생각하는 핵심 포인트를 한두 문장으로 정리하여 기록했을 뿐 길고 잡다한 설명이 없다.


"157 사유: 우리는 사유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질문하고, 무언가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분투하죠. 이렇게 우리는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려고 합니다. 즉, 사유하며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거예요."  (p.189)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Chapter 1 '다른 사람을 실망시켜도 괜찮아요', Chapter 2 '인간관계는 사실 개선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Chapter 3 '사실 진짜 고민해야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아요', Chapter 4 '강해지는 방법은 집착을 줄이는 거예요'라는 소제목으로 분류되며 각각의 챕터에 저자가 선정한 40~50개의 키워드와 덧붙이는 말이 들어 있다. 챕터의 중간에는 'TOMY의 상담실'이라는 코너가 있어 실제 상담 내용을 짧게 실었다.


"이 책은 그동안 환자들을 상담하면서 경험한 정서적 치료방법과 트위터 글에서 엄선한 "지극히 짧고도 사소한 인생 잠언"들을 모았습니다. 어떤 팔로워로부터는 "잠들기 전에 토미 선생님의 글을 여러 번 읽고 싶어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제 글을 책이라는 형태로 출간한 거죠. 잠들기 전이나 잠에서 깬 아침, 일이 힘들 때마다 언제든지 여러 번 읽어보세요. 조금이라도 당신의 기분이 나아진다면, 저는 정말로 기쁠 거예요."  (p.13 '시작하며' 중에서)


나의 신념 중 하나는 누구에게도 조언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간절히 원하지 않는 한 나는 어떤 조언도 하지 않는다. 예컨대 '내가 아끼는 후배라서 하는 얘긴데...'라는 식으로 시작되는 말 치고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상대방의 기분만 상하게 하여 좋았던 관계마저 서먹한 관계로 멀어지게 할 뿐이다. 그와 같은 사례는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칭찬만 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무척이나 짧은 인생을 살다 가는지도 모른다. 대기 중에 떠도는 미세먼지가 하루 종일 걷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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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지 않은 순한 시간의 궤적 위에 추억이라 할 만한(혹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될지도 모를) 목록 몇 개를 별다른 목적도 없이 툭툭 던져보는 날 하늘은 조금 우중충했고, 따사로운 대기엔 탁한 미세먼지가 고였다. 아파트 주변의 너른 공원을 마스크도 없이 걸었고, 아침에 읽다 만 어느 소설의 스토리를 잠깐 생각했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원의 낯선 풍경. 사람들과의 대화나 공감보다는 동물에게 내리는 일방적인 명령이 더 편하고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도시인의 정서가 오늘의 미세먼지보다 더 탁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


몇몇 동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치는 비례하여 줄어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 식용 금지법'을 통과시켰던 우리 국회는 가자 주민들에 대한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의 잔인한 학살을 그저 남의 일인 양 외면하고 있다. 먹을 게 없어서 구호품을 향해 달려드는 가자 주민들을 향해 총을 겨눴던 이스라엘 병사들과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린 이스라엘 정치인들의 잔인성이 이스라엘 전체 국민을 대변하는 이스라엘 국민성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리도 없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나치의 잔인성을 닮아가고 있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잔인한 학살에 대해 국제사회는 마땅히 분노해야 한다. 적어도 인권을 존중하는 자주 국가라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 정부는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한 이후 이렇다 할 논평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와 다르지 않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은 바로 이런 것을 지적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2022년 11월 15일 기준의 세계 인구는 이미 80억 명을 넘었다. 1900년경에 20억 명이었던 세계 인구는 불과 100여 년만에 4배가 증가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마구잡이로 학살해도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올해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이 0.6명대로 진입할 것이라며 국가 소멸 운운하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걸 기억한다. 사실 출산율을 늘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젊은 사람들에게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주택을 보급하고 양질의 일자리만 제공하면 된다. 그와 같은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정책을 시행하는 순간 젊은 사람들에게 비싼 가격으로 자신의 주택을 팔려고 했던 중장년층이나 건설업체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려면 정년이 가까운 장년층의 희생이 필수적이다. 현시점에서 기득권층인 그들이 자발적으로 희생을 감내할 리가 없다. 여당의 공천 결과만 보더라도 그와 같은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디올백을 받았던 어느 여인은 관종 욕망을 억누른 채 잠행을 계속하고 있다. 디올백 수수 이후 세계적인 셀럽 반열에 올랐는데도 말이다.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이다. 학살의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을 대상으로 학살의 가해자로 돌변했고, 관종 욕망이 강했던 어느 여인은 세계적인 셀럽이 되자 모습을 감춰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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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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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읽을 만한 책이 없거나 한 권의 책을 이제 막 다 읽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장르가 전혀 다른 책을 연달아 읽어야 할 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곤 한다. 하루키의 애독자인 나로서는 시중에 출간된 그의 책 중 읽지 않은 게 없지만 마땅히 읽을 책이 없어 빈둥거리게 되는 독서 휴지기이거나 꼭 읽어야 할 책이 있지만 이전 책과 장르가 너무 달라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이를테면 연계 독서용으로 하루키의 책 중 한 권을 골라 읽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유격수가 잡은 공이 2루수를 거쳐 1루수에게 전달되는 병살 플레이의 과정과 비슷하다. 그런 면에서 하루키의 책은 2루수의 글러브에 들어갔던 공이 길게 머물지 않고 가볍게 빠져나오는 것처럼 단순한 중계과정의 역할을 할 뿐 어떤 교훈이나 감동이 주가 되지는 않는다. '전에 읽을 때는 몰랐었는데 이 책에 이런 내용도 있었네!' 하는 정도의 감탄이 이따금 있을 뿐이다.


"나이를 먹고 나서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몹시도 치열한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도 들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모두 바보 같은 생각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이다. 오래된 일기를 읽고 있으려니 그런 분위기가 알알이 전해진다."  (p.70)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에 일 년 구 개월에 걸쳐 연재했던 칼럼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이 책은 하루키의 첫 잡문집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그의 일상과 문득 떠오른 생각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들이 순서도 없이 뒤섞여 있지만 개중에는 눈에 번쩍 띄는 글들도 더러 있어서 몇 번이나 다시 읽게 된다. 요즘에는 인터뷰나 대담에서도 잘 들을 수 없는 글쓰기에 대한 그의 견해가 이 책에 실렸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책이 처음 출간되었던 십여 년 전에도 분명 읽었을 텐데... 조금 길게 옮겨 본다.


"이미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쉬운 법이라, 재주가 있는 사람 같으면 주위에서 "와, 제법인데"라는 둥의 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당사자도 그런 기분에 젖는다. 그러나 거기서 좀 더 칭찬을 들으려다가 영 그르친 사람을 난 몇 명이나 보았다. 분명 문장이란 많이 쓰면 능숙해지기는 한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분명한 방향감각이 없는 한, 그 능숙함의 대부분은 그냥 '재주'로 끝나고 만다. 그럼 그런 방향감각은 어떻게 하면 체득할 수 있을까? 요는 문장 운운은 나중 일이고, 어찌 됐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비슷하다. 어떻게 여자를 꼬드길 것인가, 어떻게 싸움을 할 것인가, 초밥집에 가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런 것들 말입니다. 한 차례 그런 일들을 겪어보고 '쳇, 뭐야, 이 정도면 굳이 글 같은 걸 쓸 필요도 없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그게 최고의 행복이고, '그래도 아직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면 - 잘 쓰고 못 쓰고는 제쳐놓고 - 그때는 이미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문장을 쓸 수 있게 된 상태다."  (p.33~p.34)


하루키의 글이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는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하루키의 일상이 무척이나 단조로운 데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모름지기 작가란 삶의 참여자인 동시에 세밀한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모닝커피 한 잔 후 글쓰기 작업, 아침 식사 후 오전 글쓰기, 10km의 러닝이나 수영, 점심 식사 후 다른 집필 작업, 저녁 식사 후 9시 취침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루키는 마치 은둔형 외톨이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작가가 되는 지름길은 역시 자신의 일상을 최대한 단조롭게 만드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의 일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위대한 작가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오늘은 뭐 할까?' 혹은 '오늘 누구를 만나 재미있게 놀까?' 하고 매일 궁리에 궁리를 더하는 사람이라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우리라. 작가란 타인의 삶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나는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을 좋아해서 영화관에서만 네 번 정도 봤는데, 그 영화에 나오는 슬랭도 소설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상당하다. 특히 동양인에 대한 차별 언사가 엄청나다. 언어적인 면 하나만 보아도 베트남전쟁은 미국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지저분한 전쟁이었던 것 같다고 실감한다."  (p.259)


한겨울로 회귀하려던 날씨는 조금 풀려 봄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3일이라는 짧지 않은 연휴를 특별한 일정도 없이 뒹굴뒹굴 게으르게 보내고 있는 나는 게으른 일상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양념처럼 버무린 하루를 쇠똥구리의 걸음으로 힘겹게 떠밀고 있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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