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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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읽을 만한 책이 없거나 한 권의 책을 이제 막 다 읽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장르가 전혀 다른 책을 연달아 읽어야 할 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곤 한다. 하루키의 애독자인 나로서는 시중에 출간된 그의 책 중 읽지 않은 게 없지만 마땅히 읽을 책이 없어 빈둥거리게 되는 독서 휴지기이거나 꼭 읽어야 할 책이 있지만 이전 책과 장르가 너무 달라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이를테면 연계 독서용으로 하루키의 책 중 한 권을 골라 읽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유격수가 잡은 공이 2루수를 거쳐 1루수에게 전달되는 병살 플레이의 과정과 비슷하다. 그런 면에서 하루키의 책은 2루수의 글러브에 들어갔던 공이 길게 머물지 않고 가볍게 빠져나오는 것처럼 단순한 중계과정의 역할을 할 뿐 어떤 교훈이나 감동이 주가 되지는 않는다. '전에 읽을 때는 몰랐었는데 이 책에 이런 내용도 있었네!' 하는 정도의 감탄이 이따금 있을 뿐이다.


"나이를 먹고 나서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몹시도 치열한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도 들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모두 바보 같은 생각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이다. 오래된 일기를 읽고 있으려니 그런 분위기가 알알이 전해진다."  (p.70)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에 일 년 구 개월에 걸쳐 연재했던 칼럼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이 책은 하루키의 첫 잡문집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그의 일상과 문득 떠오른 생각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들이 순서도 없이 뒤섞여 있지만 개중에는 눈에 번쩍 띄는 글들도 더러 있어서 몇 번이나 다시 읽게 된다. 요즘에는 인터뷰나 대담에서도 잘 들을 수 없는 글쓰기에 대한 그의 견해가 이 책에 실렸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책이 처음 출간되었던 십여 년 전에도 분명 읽었을 텐데... 조금 길게 옮겨 본다.


"이미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쉬운 법이라, 재주가 있는 사람 같으면 주위에서 "와, 제법인데"라는 둥의 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당사자도 그런 기분에 젖는다. 그러나 거기서 좀 더 칭찬을 들으려다가 영 그르친 사람을 난 몇 명이나 보았다. 분명 문장이란 많이 쓰면 능숙해지기는 한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분명한 방향감각이 없는 한, 그 능숙함의 대부분은 그냥 '재주'로 끝나고 만다. 그럼 그런 방향감각은 어떻게 하면 체득할 수 있을까? 요는 문장 운운은 나중 일이고, 어찌 됐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비슷하다. 어떻게 여자를 꼬드길 것인가, 어떻게 싸움을 할 것인가, 초밥집에 가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런 것들 말입니다. 한 차례 그런 일들을 겪어보고 '쳇, 뭐야, 이 정도면 굳이 글 같은 걸 쓸 필요도 없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그게 최고의 행복이고, '그래도 아직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면 - 잘 쓰고 못 쓰고는 제쳐놓고 - 그때는 이미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문장을 쓸 수 있게 된 상태다."  (p.33~p.34)


하루키의 글이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는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하루키의 일상이 무척이나 단조로운 데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모름지기 작가란 삶의 참여자인 동시에 세밀한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모닝커피 한 잔 후 글쓰기 작업, 아침 식사 후 오전 글쓰기, 10km의 러닝이나 수영, 점심 식사 후 다른 집필 작업, 저녁 식사 후 9시 취침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루키는 마치 은둔형 외톨이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작가가 되는 지름길은 역시 자신의 일상을 최대한 단조롭게 만드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의 일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위대한 작가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오늘은 뭐 할까?' 혹은 '오늘 누구를 만나 재미있게 놀까?' 하고 매일 궁리에 궁리를 더하는 사람이라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우리라. 작가란 타인의 삶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나는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을 좋아해서 영화관에서만 네 번 정도 봤는데, 그 영화에 나오는 슬랭도 소설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상당하다. 특히 동양인에 대한 차별 언사가 엄청나다. 언어적인 면 하나만 보아도 베트남전쟁은 미국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지저분한 전쟁이었던 것 같다고 실감한다."  (p.259)


한겨울로 회귀하려던 날씨는 조금 풀려 봄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3일이라는 짧지 않은 연휴를 특별한 일정도 없이 뒹굴뒹굴 게으르게 보내고 있는 나는 게으른 일상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양념처럼 버무린 하루를 쇠똥구리의 걸음으로 힘겹게 떠밀고 있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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