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 젖는다는 건 움푹 팬 시간의 분지를 하염없이 걷는 일이다. 그곳에선 가까운 과거와 먼 과거가 뒤섞이고, 내 것도 아닌, 누구의 것었는지도 모르는, 때로는 출처도 주인도 알 수 없는 낯선 경험들이 오가기도 한다. 눈물과 땀의 시내가 졸졸 소리를 내어 흐르고, 왁자한 웃음과 작게 속삭이는 사랑의 밀어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곳. 삶이란 끝없이 고도를 높여 시간의 정점을 향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것. 그렇게 조금씩 나를 잃고 종국에는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리고 시간의 분지를 정처없이 떠도는 것.


오늘처럼 흐리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엔 상념의 나락으로 끝없이 추락하게 된다.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가 쓴 <완벽한 날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밤중에 잠이 깨어 빗소리를 들었다. 당분간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기에 침대에 누워 온 마음으로 빗소리에 귀 기울였다. 왜냐하면 - 우리에게 비가 내리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닐까? 우리의 창조성으로 이루어진 극장 전체에서, 그 다섯 대륙을 통틀어서, 이 야생 세계의 장치만큼 경이로운 게 있을까?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 밀과 백합이 자라거나 자라지 못하는 건 비에 달려 있다. 그 해에 비가 넉넉히 내리면 가을에 나무들은 고운 단풍 빛깔로 우리를 눈멀게 한다. 비의 양에 따라 연못도 신선해지거나 물이 말라 늪지로, 심지어 사막으로 변하거나 한다. 나는 마음 깊이, 그러면서도 즐겁게 귀 기울였다. 비는 찾아오는 장소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p.132)


누군가 자신이 듣고 있는 빗소리를 마음에 아로새긴 하나의 문장으로, 혹은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로 내게 들려주면 좋겠다. 자동차 전조등의 점멸하는 불빛이 빗속에서 수채화처럼 번진다. 어두운 하늘, 어두운 땅, 그리고 어두운 마음... 오늘의 비는 자신의 자리를 미처 내주지 못한 태만한 가을의 조급함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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