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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월드시리즈 1차전이 있었던 날입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익히 아시겠지만 보스턴 레드삭스가 세인트 루이스를 상대로 8대 1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제목에는 프리메라리가 소속의 유명 축구팀 써놓고 웬 야구 얘기냐구요?  아, 그렇군요. 제가 혹시 낚시글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이 드신다면 읽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제가 여기에 쓰려는 얘기는 축구나 야구 얘기는 아니니까 말이죠.  다만 요즘의 제 관심사가 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에 쏠려 있는 관계로 제목을 그렇게 정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요?  뉴스는 보면 볼수록 짜증만 나는지라 뉴스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지낸 지가 반 년 이상은 되었고, 맘에 드는 드라마도 없고, 그렇다고 특별히 보고 싶은 다큐멘터리도 없으니 관심은 주로 스프츠로 향하게 되더군요.  아무튼 따분한 시간이 지겹도록 오래 지속되는 듯하여 오늘은 낙서 삼아 소설 좀 써보려고 합니다.

 

#소설 1

 

프리메라리가 소속의 두 팀인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결승에서 맞붙었습니다.  리오넬 메시를 필두로 네이마르, 이니에스타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한 바르셀로나는 위협적인 호날두와 카시야스, 사비, 벤제마 등이 포진된 레알 마드리드와 붙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하여, 바르셀로나의 감독은 불안한 마음에 심판을 매수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매수된 심판은 경기를 바르셀로나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었고, 결국 바르셀로나는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소설 2

이번에는 바르셀로나의 감독이 불법적으로 심판을 매수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심판으로 내정된 사람들이 모두 바르셀로나 감독과 친분이 있거나 우호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심은 숫제 바로셀로나 팀과 한편이 되어 같이 뛰기까지 했습니다.  패스도 하고 태클도 하면서 말이죠.  바르셀로나 팀은 결국 열한 명이 아닌 열두 명이 뛴 셈이죠.  팽팽하게 진행되던 경기는 결국 바르셀로나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경기를 지켜보았던 관중들은 당시에 뭔가 찜찜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질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약간의 의심도 희미해지는 듯하던 어느 날 바르셀로나 감독의 심판 매수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팀의 열성 팬들은 "심판을 매수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실력으로 이겼다."고 항변하는 감독을 적극 옹호했습니다.

 

소설 2에 대하여 바르셀로나의 감독은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심판이 도와주지 않았어도 실력으로 이길 수 있었던 경기였다고만 주장하였죠.  그러므로 심판도 죄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 그들의 주장이 맞다고 박수를 칠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민주주의는 스포츠와 같이 룰이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지는 불안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정의로운 법과 제도의 구축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죠.  그러나 완벽히 정의로운 제도는 아닐지라도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 놓았던 룰이 지난 대선에서 깨졌다는 것을 스포츠 경기의 관중만도 못한 우리 국민들이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경기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법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실력으로 이겼다는 말만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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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나는 일이 때로는 한심하고 역겨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예컨대 오늘 같은 날이 그랬습니다.  잠깐 얼굴이나 보자는 전화에 '합석할 사람이 또 있느냐'고 묻지도 않은 채 '그러마'고 대답했던 것이 제 실수라면 실수였습니다.  비가 내리는 거리를 30분쯤 운전을 하여 도착한 약속 장소는 무슨무슨 가든이라는 간판이 걸린, 그닥 마음이 내키지 않는 장소였습니다.  내게 전화를 했던 사람은 도착한 지 꽤 되었는지 고기를 굽는 불판은 검게 그을러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소주병도 두어 개 놓여 있었습니다.  '이거 잘못 걸렸구나.'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그를 두고 그냥 돌아설 수도 없어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마음은 영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대작을 하던 사람이 내게 인사를 하기 전까지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었는데, 언젠가 지금과 같은 술좌석에서 몇 번 마주쳤는지 안면이 익은 듯도 하였습니다.  내가 술을 못한다는 것을 익히 아는 지인은 술을 권하지는 않았지만 앞에 앉았던 사람은 내게 한사코 술잔을 쥐어 주며 술을 따랐습니다.  받아만 놓으라면서.

 

삼겹살이 까맣게 타들어가도 두 사람은 도통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마지못해 나는 고기를 굽고 팔자에도 없는 술시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습니다.  두 사람은 거나하게 술기운이 올랐는지 말도 되지 않는 주장으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지인의 고향이 경상도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앞에서 대작하던 사람의 고향은 내 관심사도 아니었고 지역색으로 누군가를 경멸하거나 헐뜯는 사람을 인간 이하로 보는지라 그 사람이 전라도 사람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술기운이 오른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침을 튀기며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다가 급기야는 언론과 정치인들의 판에 박힌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디 사람들은 야비하기 이를 데 없다는 둥, 어디 사람은 뒤통수를 잘 친다는 둥, 어디 사람은 빨갱이라는 둥, 무식하다는 둥 그들의 주장은 하나같이 논리도, 근거도 없는 헛소리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과학적 근거나 논리를 들어 말하라고 몇 번이나 말하였지만, 그들의 뇌 어딘가에는 그들의 조상이나 어느 정치인 또는 일부 언론의 주장이 마이크로 칩으로 내장되어 있는지 앵무새처럼 같은 얘기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인간의 탈을 쓴 인조인간이나 로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결국 그들 둘만을 남겨둔 채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가겠다는 인사도 없이 말입니다.  어찌 그들을 정상적인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허깨비에 불과한 놈들이었습니다.  그런 놈들을 만나기 위해 비싼 연료를 소모한 것도, 귀한 시간을 허비한 것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인간 같지도 않은 그런 놈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허깨비들이 비싼 밥을 먹고 있습디다.  아직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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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여름 2013-10-10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완전 싫죠...그런 상황이요 ㅠㅠ
휙 뒤로 던지고 잊어버리세요^^

꼼쥐 2013-10-11 14:0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돌아와서는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지우는 것으로 화풀이를 대신했죠. 그런 인간은 더 이상 만날 가치도 없는 그런 사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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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나는 <나이듦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페이퍼를 썼었다.  자본주의가 보편화된 현대 세계에서 늙는다는 것, 또는 나이든다는 것은 잊혀지고 감추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도 세월에 따라 늙어간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려 들지 않는다.  아직은 젊다고 자신할지라도 '곧', 정말로 '곧' 나이가 들고 신체의 변화를 감지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면 된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느닷없음'에 당신도 나도 허망하게 무너질지도 모른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말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빠라고 불러본 기억이 없다.  가족 모두에게 모질게 굴었던 당신의 탓이기도 하지만 내가 성인이 된 후에도 나의 아버지와 가슴을 열고 대화할 기회는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의 아버지는 일찍 찾아온 치매로 이제는 가족들과 화해할 수 있는 기회마저 영원히 닫아버렸다.  엄정한 세월을 이길 수는 없지만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는 있다. 늦지 않았다면 말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 책을 읽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떠나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대해 조금쯤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흠모하고 그리워할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나는 그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비록 니는 그와 마주한 적도, 그의 책을 여러 번 읽은 적도 없지만 단 한 번 읽었던 그의 책은 너무도 강렬하게 내 가슴에 남았다.  어린 시절을 소로와 함께 보냈다는 저자는 분명 행복한 사람일 듯하다.

 

 

 

 

 

 

 

 

오늘처럼 바람이 좋았던 날에는 한 뼘 시인의 글이 그리워진다. 엷게 흐려지는 여름의 색깔들과 먼 시선으로 바라보던 하늘. 무엇을 배우겠다는 의무감을 턱 하니 내려 놓고 편하게 읽을 책이 필요하다. 이 가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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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종교가 필요했던 순간이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많은 분들이 "네."라고 대답하겠지요.  물론 "아니오."라고 단언하듯 말하는 분들도 있을 듯합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느 순간 '나도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닥 선량한(자신이 선택한 종교를 충실히 믿고 따른다는 의미에서) 종교인이라고 말할 처지는 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종교가 어떤 특정 종교를 염두에 두고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저는 무신론자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과연 우리의 삶에서 종교는 그 자체로서 필요한 것일까?'하는 질문과 '필요하다면 어떤 시기와 상황이 적절할까?'하는 물음에 답을 구하고자 할 뿐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종교 따위는 필요없는 것일 수도,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일 수도, 또는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짧지 않은 인생 전반에 있어 종교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종교를 선택해야 하겠다고 느꼈던 시점도 정확하고 시기 적절했던 것일까요?  종교 자체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그 시기의 적절성 말입니다.  엄마의 성화에 마지못해 선택한 것은 아닌가요?  아니면 다니던 유치원의 원장 선생님의 강요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마감 임박'이라는 멘트에 나도 모르게 전화를 거는 홈쇼핑의 충동구매와 같은 행태를 보이지는 않으셨나요?  또는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나는 가끔 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분들이 어떤 계기로 종교인이 되었는지, 그때의 순간이 자신의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는지 의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일 수도 있지만 제가 그랬으니까요.  정신적으로 황폐화되고 누군가의 위안이나 구원이 절실할 때 저는 종교라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리 오래 전의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었던 듯싶습니다.  다들 그렇게 종교를 선택한다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던 사업이 내리막길을 걷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배려심이 가득했고,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그의 모습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전의 그가 아니란 걸 확인한 사람들은 그의 곁에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결국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종교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사람뿐 아니라 신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책에서는 삶이 축제요, 소풍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삶의 일부분인 종교생활도 그런 게 아닐까요?  일종의 정신적 유희나 놀이와 같은 그런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를 선택하는 순간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신적으로 이성적 판단이 왕성할 때, 편안한 삶이 지속되어 지루하고 심심하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 종교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었다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의 예에서 신은 인간에게 어떤 혜택을 준 것도 아니지만 해를 끼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엾은 인간은 신을 원망합니다.  누구의 잘못일까요?  예컨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눈앞의 곤경을 벗어나고자 사채의 덫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채업자는 그런 사람들을 귀신같이 찾아내지요.  처음에 사채업자는 선심을 쓰듯 그들을 유혹합니다.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는 그들은 사채업자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문제만 해결했을 뿐 더 크고 어려운 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습니다.  사채업자는 이제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그들을 조롱하고 협박합니다.

 

이건 순전히 제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이런 어리석음은 종교의 선택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을 찾아 떠난 여행』의 저자 에릭 와이너는 미국 공영방송 NPR의 해외특파원으로 일하며 전 세계의 전쟁과 가난, 질병 등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고, 그 때문에 만성적인 불안증과 우울증이 더욱 악화됐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인생을 신에게 의지하지는 않았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각종 폭력들을 목격하며 종교와 더욱 거리를 두기도 하였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다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고 합니다. ‘신과 종교의 관계는 음식과 메뉴판의 관계와 같구나.’라고 말이죠.  “당신의 신을 만나지 못했나요?”는 애당초 틀린 질문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신은 잃어버린 자동차 열쇠나 뉴저지 톨게이트 출구 같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죠.  그는 이 책에서 '신은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이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나의 신을 찾아다니는 대신 신을 만들어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구축하고 조립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내가 조립의 기반으로 삼은 것은 유대교이지만, 지지대는 불교다.  심장은 수피즘으로 되어 있고, 그 밖에도 이 신은 도교의 소박함, 프란체스코회의 너그러움, 라엘교의 쾌락주의 조금을 갖고 있다."    (p.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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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부모의 가슴에서 거꾸로 나이를 먹는 듯합니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도 제 가슴 속에서는 제 키만큼 큰 가방을 메고 유치원으로 향하던 때와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말하자면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던 유아기의 그때로 퇴행을 거듭하곤 합니다.  그것은 마치 아이가 세월에 비례하여 쑥쑥 자라는 것과는 정 반대의 길에 서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추석 명절에 처갓집을 방문하였을 때 저와 동서들에게 빛 바랜 사진 한 장을 보여주시며 하셨던 장인어른의 말씀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든이 넘은 장인어른이 다섯 살 무렵에 찍었다는 가족사진이었습니다.  칠십 년도 더 지난 사진 속에서 당신은 뭔가에 잔뜩 주눅 든 모습이었습니다.  장인어른은 사진과 함께 그때의 추억 한 토막을 들려주시면서 한껏 그리움에 젖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쓸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데 지난 일들은 어제 일처럼 또렷해."라고 말이죠.

 

주말부부로 지내는 내게 아들은 각별한 그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추석에 함께 보냈던 시간이라야 고작 며칠이었지만 그 며칠도 친척들과의 어수선한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아들과 단 둘이서 호젓하게 보낸 시간은 불과 몇 시간을 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화를 통하여 매일매일의 아들의 일상을 전해 듣고는 있지만 그리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사그라들기는커녕 오히려 부풀려지는 경우가 허다하죠.  그런 까닭에 나는 아들을 만날 때마다 허락도 없이 아들의 물건들을 뒤적이곤 합니다.  아들의 손때가 묻은 레고 모형과 스케치북과 독서록 등. 그런 흔적들은 내 가슴 속에서 언젠가 아들의 지금 모습을 떠올리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석에 우연히 보았던 '고래'에 대해 쓴 아들의 영어 스피치 원고를 고치지 않고 옮겨 보았습니다. 

  

Whales are animals which live in seas. But they are not fish. They are mammals like humans. There are more than seventy- five different kinds of whales living all around the world's seas. We can divide whales into two main kinds: toothed whales and whalebone whales.  Toothed whales have teeth and hunt food by their teeth. Whalebone whales have baleens, which are like mustaches.  They use baleens to filter the food from the water by drinking and spitting water. Whales are born in water but they don't  die. It's because their tail comes out first and their mother pushes the baby to breathe. The baby knows that it shouldn't breathe until he or she reaches the surface. There are many kinds of whales. Many whales move in groups. Groups can be two or three upto hundreds of whales. The columns of water are actually their breath that is mixed with the cold air. Many people hunt whales. We should protect our giant friends living in seas. We can protect them by protesting whale hunting and telling our friends about it, too.  Thanks for listening to my speech!

 

아들은 내 가슴 속에서 여전히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지만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모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아내도, 부모님도, 형제들도 모두 내 마음 속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리움의 세계에서는 항상 시간이 거꾸로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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