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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산책 - 매혹적인 밤, 홀로 책의 정원을 거닐다
리듬 지음 / 라이온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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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책의 효용을 아무리 장황하게 설명한다 한들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만약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이 책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비친 독서하는 나의 모습은 무척이나 따분하고, 단순하고, 고집불통의 그것으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깟 책에 빠져 사느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작정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맹목적인 행위에서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논리를 찾기는 어렵다. 나는 아직도 내가 왜 책을 읽는지, 왜 읽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천편일률적인 독서의 효용론 중에서 '그래, 맞아. 그러니까 책을 읽어야 해.'하면서 무릎을 쳐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책을 읽고, 시간이 날 때면 읽었던 책의 리뷰를 블로그에 올리는 것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블로그를 한다. 이 단순하고 권태로운 일을 몇 년쯤 하다 보면 '지금 뭐 하는 짓인가?'하는 의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대부분의 블로거들이 한두 번쯤은 경험했으리라. 그럼에도 오래된 습관처럼 자신의 블로그를 찾게 되고, 시큰둥해져 며칠쯤 거리를 두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또 궁금해지고... 마치 연애를 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이 책 <야밥 산책>의 저자인 '리듬'(블로그 닉네임)도 그랬을까? 네이버 파워블로거인 작가는 [달콤 쌉싸름한 일상]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블로그를 방문해 보니 지금까지 5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녀의 블로그를 방문했다. 그녀가 쓴 첫 리뷰가 궁금하여 찾아 보니 2007년 3월 1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삭제하거나 수정하지 않았다면). 책의 제목은 "비프스튜 자살클럽". 리뷰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 보이는 짧고 간단한 글이다. 어떤 블로거도 처음에는 늘 그러하듯.

 

 

"이 책에 담은 책들 역시 나의 독서 경험 그대로를 싣고자 했다. 대부분의 책 관련 책들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누구나 인정한 텍스트의 책을 담아냈지만 기본적으로 내 독서가 비체계적 중구난방으로 시작되었기에, 그리고 나와 같이 책 읽기를 막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쉽고 재미있는 책이 우선이기에 그저 장르 소설, 만확책이라도 그것이 내게 메시지를 던져준 책이라면 주저 없이 담았다. 블로그 이웃들의 반응도 고려했다. 많은 이웃이 좋아했던 책이라면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할 수 있으리라." (p.8~9 '프롤로그'중에서)

 

 

<야밤산책>은 총 4개의 '산책길'로 이루어져 있다(엄밀히 말하자면 '부록'까지 5개). '산책길 하나'에서는 주로 작가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으로 꾸며져 있는 듯하다. [아주 보통의 어느 날]이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일상의 어느 날 운명처럼 내 손에 들어왔던 그런 책들. 김중혁의 <뭐라도 되겠지>로 시작된다. '산책길 둘'에서는 달달한 사랑 얘기가 주를 이룬다. [문득 네 생각이 나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장에서 작가가 고른 책들은 초콜릿처럼 달달하고 매혹적이다. 얼마 전에 읽은 한스 에리히 노삭의 <늦어도 11월에는>도 담겨 있다. 작가의 생각과 내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산책길 셋'에서는 꿈과 현실의 문제를 다룬 책들이다. [때로는 구불구불한 꿈]이라는 부제는 작가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산책길 넷'에서는 고단한 현실과 사회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책들이다. [이왕이면 남다르게]라는 부제는 다들 그만그만하게 사는 우리의 삶에서 이왕이면 움츠러든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살아가자는 작가의 당부라고 읽혔다. 부록에는 독서에 대한 팁이 실려 있다.

 

 

내가 블로그를 한 기간은 작가만큼 길지 않다. 그러나 중구난방으로 책을 읽는다는 점은 그녀와 비슷하다. 누군가 나에게 책은 왜 읽는지, 블로그에 글은 왜 쓰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여전히 '모른다'이거나 '글쎄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블로그로 인해 책과 더 가까워졌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동안 내가 읽었던 책으로 인해 내 삶이 얼마나 변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가끔은 시골 할머니 집에 내려가 아버지가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본다. 세로 글쓰기와 많은 한문 때문에 읽기는 힘들지만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 책을 읽으며 꿈꿨을 소년 시절의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나중에 내 책들을 누군가가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끊임없이 책에 밑줄을 긋고 흔적을 남긴다." (p.353)

 

 

비록 작가는 블로거로 시작하여 한 권의 책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냈지만, 나는 같은 블로거로서 그녀의 글에 댓글을 다는 기분으로 이 글을 쓴다. 그녀가 이 책에서 선정한 53권의 책을 다 읽지는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책들 중에서 가끔 내가 읽었던 책을 만났을 때, 나의 느낌과 작가의 느낌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거니와 작가로 인해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늘어나는 것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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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서 온 편지
조규찬 글.그림 / 이른아침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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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에 대한 정의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 각자가 내린 정의를 가만히 들어보면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는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어쩌면 내가 내리는 정의를 듣고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세속적인 의미의 성공이란 타인과의 '구별짓기'이다.  외모든, 능력이든, 사상이든, 인격이든, 돈이든, 뭐든 간에 남과 다른 것이 많을수록 그 사람은 성공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 있다고 믿는 것이다.  '차별화'라고 해도 좋겠다.

 

하여,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당연히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내성을 길러야 한다고 본다.  어쩌면 '성공하고 싶다'는 말은 '고독을 감수하겠다'는 다짐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은 '공감과 연대'보다는 '다름'과 '구별짓기'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박은 이따금 과도한 것으로 보여질 때가 있다.  어떤 이유나 목적도 없이 습관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때가 그렇다.  예컨대 제복을 입은 예비군들이 엉뚱하고 기괴한 짓을 할 때도 그런 습관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러한 집단적 광기는 이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선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는 성공의 개념은 서로 비슷하지만 그 결말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성공의 결말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항상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성공과 만족이 어깨를 겯고 걷기 위해서는 고독에 대한 내성이 필수적이다.  남과 다른 점이 많다는 것, 혹은 그렇게 되고자 하는 노력은 타인과의 연대를 일정 부분 갉아 먹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 중의 다수가 공황장애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유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 성공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역으로 말하면 성공하지 않아야 할 사람이 성공한 까닭이다.

 

'나'란 사람은 남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외로움을 잘 견디지도 못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성공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 축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엄연한 사실이다.  가수 조규찬의 산문집 <달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뜬금없이 들었던 생각이다.  그도 나처럼 외로움을 잘 견디지 못하고, 그와 비슷한(또는 그보다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부류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대단한 성공을 이루어서도 안 되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사람이라는 것이다(이 말은 결코 악담이 아니다). 

 

"한때 내 하루의 시작을 지켜보는 걸인에게 나의 희망찬 걸음걸이를 보여주며, 그도 내가 속한 희망의 대열에 속하기를 바란 적도 있다.  그러나 나와 걸인은 공평한 노을에 젖어든다.  같은 희망과 같은 노을에 의지하며 같은 권태를 느끼는 시한부 존재들이다.  때로는 이와 같은 숙명이 적용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보게 된다.  무언가를 묻는 노인에게 노골적으로 짜증내며 다른 곳으로 가보라는 개찰구 옆 매표 창구의 무자비한 중년.  적어도 그만큼은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p.105)

 

나는 사실 연예인이 쓴 어떤 종류의 책도 신뢰하지 못하는 지나친 편견의 소유자이다.  그럼에도 내가 '꽤 괜찮네'하고 느꼈던 책들이 더러 있다.  배우 최강희가 쓴 <사소한 아이의 소소한 행복>도 그 중 하나다.  내가 조규찬의 노래도 변변히 아는 게 없으면서 굳이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그가 책의 서문에서 밝힌 발간 이유 때문이었다.

 

"만약 이 책의 어딘가가 아들의 삶을 지탱해 줄 여러 기억 중의 하나로 쓰여질 수만 있다면, 나는 이 책을 발표한 일을 변변치 않았던 내 삶에서 이루어 낸 몇 안 되는 의미 있는 일 가운데 하나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p.5 'prologue'중에서)

 

조규찬은 의외로 글을 잘 쓴다.  한편,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들 그렇게 느꼈겠지만 그는 정말 소심할 정도로 꼼꼼한 사람처럼 보여기도 한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쪼잔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일상과 생각들을 일기처럼 기록한 책이지만 가끔씩 만나게 되는 기발한 표현들과 건전한(?) 사고방식에 밀려오는 낮잠을 단박에 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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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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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마저 곱게 넘겨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책이 있다.  내 단단한 손톱이 작가의 여리디 여린 감성에 생채기를 낼 것 같아서 말이다.  때로는 거칠어진 내 호흡마저 신경이 쓰이는데 그럴 때면 쌔근쌔근 잠든 아기의 여린 숨결이 문득 부러워지는 것이다.  김선우 시인의 산문집은 그런 책이다.  시인의 깊은 사색이 낙엽처럼 모이고 모여 독자의 머릿속에서 햇잎처럼 되살아나는 것.  그녀의 산문집은 잔설처럼 소복히 쌓이는 달빛의 음영이다.  또는 그렇게 읽을 일이다.

 

"이토록 이윽한 몽상과 휴식과 사랑의 시간.  나는 잠깐 발길을 멈추고 저 능선들이 품고 있을 다람쥐며 오소리며 산새들과 작은 벌레들의 꼼지락거리는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문득 한 목소리를 들은 듯합니다.  목소리이되, 그것은 몸 밖으로 소리를 파열시켜 내어보이는 소리가 아니라 자기의 몸 속을 물결치며 우웅우웅 복화술로 말하듯 스며나오는 달의 목소리였습니다."    (p.43-44 '귀래에서 달을 보다'중에서)

 

작가는 스물아홉의 나이부터 통과제의처럼 이 글을 썼노라고 고백한다.  '느리게, 머뭇머뭇거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또다른 아홉 즈음에 '느리게, 머뭇머뭇거리면서 어떤 통과제의의 기록'을 남길 것을 소망한다.  꽉 찬 열을 향해 가는 가파른 고갯길의 그 아홉에 말이다.

 

"시로 풀어내기엔 너무 습습하거나 달뜬 것들, 혹은 너무 메마른 것들의 나신을 벌판 쪽으로 밀어올려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기록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 청춘이 내 의식에 남긴 빛과 그림자의 환한 구멍들에 대해.  그리고 나는 내 벗은 영혼을 심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와 우리의 자유, 나와 우리의 평화는 어떤 속삭임으로 영접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p.4 '책머리에'중에서)

 

 1996년 창작과비평에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던 시인은 2000년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을 펴내었고, 2002년 첫 산문집으로 이 책 <물 밑에 달이 열릴 때>가 출간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죽음'에 매혹되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그 기억에 의해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되었다는 시인은 자신이 향했던 곳(이를 테면 울릉도, 허난설헌 생가, 강원도 귀래면, 시인의 고향인 강릉 등)과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가령 모네,꾸르베,프리다 깔로 등)과 읽었던 책들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여행에서 독서로, 독서에서 그림 감상으로, 그림 감상에서 고요한 사색과 몽환의 세계 속으로, 제 아무리 행위가 변한다 한들 순간의 삶에서 빚어내는 진실의 무늬는 같을 것이다.  시인은 그 탐색의 순간들을 말하려 했다.

 

"일상의 속도 속에 편승되었을 때는 감지할 수 없는 영혼의 떨림, 이 미세한 꿈틀거림은 반(反)속도, 반(反)물질의 상태 속에서 섬세하게 진동합니다.  침묵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는, 속도를 버리지 않고는 만질 수 없는 시간의 결들."    (p.101)   

 

'속세라는 불구덩이 집 속에서 문학을 통해 스스로의 구원을 꿈꾸는 자'라고 말하는 시인은 자신을 시인으로 이끌었던 사람들과, 책과, 영화와, 그림들,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인연들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의 구성은 형식상으로는 총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주로 기억에 남는 장소와 시인이 되기까지의 성장과 가족사에 대하여, 2부에서는 현실에서 만난 삶의 부조리와 자신의 생각에 대하여, 3부에서는 기억에 남는 책에 대하여 쓰고 있다.  얼마나 많은 날들과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모여 이 책으로 태어났는지 생각하게 한다.

 

'오늘을 사는 일이란, 피 한 바가지를 시주받고 피 한 바가지를 시주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라고 썼던 시인의 말이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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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라 - 인문학과 영화, 그 어울림과 맞섬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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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평론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생소한 직업이다.  전 세계적으로 4만여 가지의 직업이 있다고 하니 내가 모르는 직업이야 허다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싶다.  문학 평론가도 아니고 고전 평론가라니...  아무튼 고미숙 작가는 자칭, 타칭 '고전 평론가'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우겨도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을 가리켜 '고전 평론가'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고전 평론가'라는 직업에 대해 스스로 정의를 내리기도 하였다.  '정년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정년 자율업!', '학연? 지연? 혈연? 등등과 절대 무관한 100% 노력 및 능력제', '공부+친구+밥 평생 보장'.  물론 그녀만의 주장이다.(확인한 바는 없지만)  그녀의 주장이 맞다고 인정한다면 현대 사회의 '블루 오션'임에 틀림없다.(이런 제길!  진즉 알았더라면 나도 고전 평론가나 될 것을)

 

각설하고, 어떤 주제, 어떤 장르를 들고 나와도 생소하거나 낯설지 않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작가가 있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그렇고, 고전 평론가 고미숙 작가가 그렇다.  고미숙 작가의 책을 한 번이라도 읽어 본 독자라면 그녀의 쫄깃한 문체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고미숙 작가의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아마도 이런 경험을 필수적으로 거쳤을 것이라고 믿는다.  예컨대, 고전을 다루는 작가이니만큼 우아한 자세로 앉는다.(의자는 등받이가 있는 푹신한 가죽 의자가 좋겠다.)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에 포개어 앉는다.(일명 '샤론 스톤 자세'가 되시겠다.)  왼손에는 작가의 책을 가볍게 얹는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테이크 아웃한 아이스 에스프레소가 들려 있다.  안경을 낀 독자라면 안경은 가볍게 코끝에 걸친다.  이제 그만하면 자세는 완벽하다.  그러나 작가의 이런 표현을 읽을라치면 자신이 읽던 책을 누가 볼새라 자신도 모르게 가슴 쪽으로 와락 껴안게 되고 커피는 바닥으로 나뒹굴고 만다.

 

"사태가 이런 지경인데도 한미당국자들은 하나같이 확률상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광우병에 걸린 소라도 위험물질만 제거하면, 먹어도 상관없다는 망언(!)을 한 의원도 있었다(미친!).  사스 때는 단 한 명의 의심 환자도 출현하지 않았건만, 그 생난리를 떨더니, 광우병은 저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고도 괜찮다고, 괜찮다고 한다."    (p.55)

 

그렇다.  고전을 다루는 작가이니만큼 글의 문체나 내용도 클래식(?)하고 우아할 것이라고 믿었다면 착각도 심한 착각이었음을 곧 깨닫게 된다.  '우아'는커녕 시정잡배의 말투에서 조금 정제된 정도라고나 할까?  작가는 교양과 도발의 경계를 교묘히 넘나든다.  그렇다고 책의 내용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녀의 이런 '거침없음'은 '우아함'으로 치장한 독자의 얄팍한 지식을 여지없이 깨트린다.  여성의 글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작가는 이 책에서 여섯 편의 한국영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근대성과 우리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다.

 

"이 책은 여섯 편의 한국영화를 통해 '지금 여기', 곧 근대의 풍경과 서사를 스케치한 것이다.  위생권력, 민족과 역사, 그리고 언어, 연애와 성, 한(恨)의 미학적 장치, 가족과 신(神), 이동과 접속 등.  이 항목들은 지난 100년간 한국인들의 일상과 무의식을 지배해온 핵심기제들이다.  따라서 누구든  자신이 지금 어떤 시대적 조건에 발딛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삶과 사유를 조직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여섯 편의 영화를 보라!"    (p.5 '책머리에'중에서) 

 

책의 내용은 1.'괴물'(위생권력과 스펙터클의 정치), 2.'황산벌'(거시기! 표상을 전복하다), 3.'음란 서생'(포르노그라피와 멜로, 그 어울림과 맞섬), 4. '서편제'('한'(恨)과 '예술'의 은밀한 공모), 5.'밀양'(가족, 고향, 신:출구없는 욕망의 폐쇄회로), 6.'라디오스타'('이주민'들의 접속과 변이)이다.  우리가 한번쯤은 보았을(또는 들었을) 듯 싶은 영화들이다.  작가는 이 영화들을 통해 근대화 과정에서의 가족 파괴와 인간 소외를 작가만의 시선으로 통찰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수용된 모델은 기독교 가운데서도 개신교(특히 장로교와 감리교)다.  잘 알고 있듯이, 천주교는 이미 조선사회 내부에 깊이 침투하여 수차례 '피의 순교'를 치른 바 있다.  따라서,개항기에 유입된 미국 개신교의 주류는 처음부터 천주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교육이나 의료선교를 통해 일상을 파고드는 전략을 택했다.  그와 동시에 정기적으로 부흥회나 사경회(査經會 일정 기간 동안 교인들이 성경공부를 하거나 성경강의를 듣기 위해 모이는 모임)를 열어 사람들의 신앙심을 고조시키는 한편, 청년회나 부녀회 등 각종 써클활동을 통해 일상의 리듬을 장악하는 역동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개신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구역을 장악하는 능력이 탁월한 건 그 때문이다."    (p.196)

 

모르긴 몰라도 작가의 책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녀의 '치열함'에 있을 듯하다.  고전은 읽기 어렵고,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의 배경지식 또한 필요하다.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다.  꾸준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언저리에도 이르기 어렵다는 얘기다.  작가가 자신의 책에서 맘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겉으로 드러난 그녀의 위트와 유머, 또는 도발적인(?) 문체가 아무런 바탕도 없이 지어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인간한테 고립감보다 더 두려운 것이 또 있을까?  연예인이 되고 싶은 것도, 정치가가 되고 싶은 것도,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것도, 그 모든 욕망의 근저에는 홀로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욕망이 어느 순간, 전도되어 버린다는 데 있다.  배경을 지워 버리고 오직 혼자만 빛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니, 혼자만 빛날 수 있다는 어이없는 환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고, 가족과 연애가 블랙홀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 바로 그 지점이다."    (p.241)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쓴 글을 읽을 때는 그 익숙함에 다소 나른해지고 금세 싫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누가 썼느냐에 따라 흥미는 배가되기도 하고 시들해지기도 한다.  고미숙 작가의 야생성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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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여는 곳
이형권 지음 / 고래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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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봄소풍 장소로 언제나 인근의 절을 선택하곤 했었다.  가을에는 운동회로 소풍을 대신했으니 소풍 장소는 항상 절로 한정된 셈이었다.  이것은 내가 입학했을 때부터 졸업을 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곳곳에 놀이동산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그 많은 학생들을 수용할 만한 채육관이나 강당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어쩌면 그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소풍날이면 학교에서 출발하여 30분 정도를 걸어 목적지인 절에 도착하였고, 그 때마다 솜사탕 장수며 음료수를 파는 아줌마들이 아이들보다 미리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적멸보궁 앞의 잔디밭에 전교생이 모여 노래자랑도 하고 반별로 보물찾기를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종교로서 불교를 믿는 것도 아닌데도 절에 대한 거부감이나 종교적 적대감은 전혀 없다.  지금도 지인들과 가끔 등산을 할 때면 산의 일부분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산사에 꼭 들르곤 한다.  산사의 그 고즈넉한 풍경은 숫기 없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내가 살았던 '절골'은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이었는데 그 마을의 가장 끄트머리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고,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 절집 주인의 쌍둥이 아들도 어렴풋이 떠오르곤 한다.  이형권 시인이 쓴  『산사: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여는 곳』 을 읽으면 내 어린 시절의 서늘한 바람 한줄기가 가슴 속으로 불어오는 듯하다.  구멍난 창호지 사이로 푸른 달빛이 스미는 듯도 하고.  

 

"한국인에게 절이란 이렇듯 사연이 있고 추억이 있는 공간이다.  불교의 의식과 신앙활동이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건축이 있고 음악이 있고 공예가 있으며 회화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산사는 세속의 번뇌를 씻어 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깨우침의 장소가 아니던가.  천년이 넘는 세월을 이어 오면서 한국의 불교는 우리 민족과 함께 영광과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으니, 산사에는 겨레가 이루어 놓은 정신문화의 총화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머리말'중에서) 

 

내 신앙은 이제 하느님을 향한 기독교 신앙에 자리를 잡았지만 내 마음의 자장은 성당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의 터전이 절망으로 쩍쩍 갈라지는 날이면 나의 마음은 어느새 산사로 향하게 되니 말이다.  산사는 복닥거리는 현실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도피처요, 현실세계를 벗어난 피안의 세계이자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을 두고 온 어미의 품으로 각인되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서산시 운산면의 개심사를 필두로, 내소사, 부석사, 대흥사, 송광사, 선암사, 선운사, 화암사, 미황사, 실상사, 해인사, 백련사, 월정사, 운주사, 통도사, 쌍계사, 연곡사, 화엄사, 금산사, 귀신사, 건봉사, 경주 남산까지  22곳의 산사를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산사가 갖는 자연미 뿐만 아니라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우리가 익히 알지 못하던 역사적 유래를 더듬고 있다.

 

"그런데 선운사 골짜기에서 피어나는 상사화는 마치 수많은 군중이 피를 흘리고 쓰러진 것처럼 처절할 때가 있다.  이른 새벽 나뭇잎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비출 때,  상사화는 붉은색이 아니라 선연한 핏자국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도솔암 선재스님은 상사화를 두고 좋은 세상을 기다리다가 보람도 없이 쓰러져 간 동학군들의 넋이라고 했다."    (p.109 '선운사'중에서) 

 

지루한 '반쪽장마'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즘,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자 읽기 시작했던 이 책은 눈 쌓인 겨울 산사로 나를 이끌기는커녕 청아한 풍경소리에 살풋 잠들게 했다.  더위는 이제 내 어깨를 타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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