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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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하루키에 대한 나의 팬심이 대략 30리터쯤 덜어졌었는데 그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고 다시 채워진 느낌이다. 어쩌면 그 이상이었는지도. 말하자면 이 책에서 작가는 예전의 그의 모습, 소설가로서 내가 상상하는 그의 면모를 다시 회복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단편집 <중국행 슬로보트>를 읽었을 때의 순한 감동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하루키 문학의 특징은 독자와의 일정한 '거리두기'에 있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 간의 거리두기가 되겠지만 말이다. 예컨대 작가는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듣거나 보았거나 때로는 상상해보았다"는 식으로 툭 던져놓고는 작가 자신은 왜 그것을 말하려 하는지, 어떤 목적으로 썼는지,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도통 말하지 않는 것이다. 독자가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 작가는 독자의 관심이나 애정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투다. 그런 하루키식 '거리두기'는 수필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소설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루키의 이런 방식은 그의 내면을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 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한다. 여자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것처럼.

 

세상과(또는 독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작가의 태도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타자와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게 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생각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읽어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인간의 노력으로는 닿을 수 없는 한계, 그 절망적인 한계를 인식한다면 굳이 노력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더 가까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는 관음증적 욕구는 어차피 사그라드는 게 아닐테니까. 작가는 그 한계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듯하다. 작가가 이 책의 제목으로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고 붙인 이유도 아마 그럴 것이라고 짐작된다. '여자'는 젠더(gender)적 구분이 아닌 남자가 가장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가까워질 수 있는 대상, 또는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다만 해소될 수 없는 욕구일 뿐이다.

 

이러한 거리두기의 방식은 인간의 절대적인 고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한편 인간의 선천적인 관음증적 욕구를 최대로 자극하곤 한다. 나는 모든 지적 욕구가 선천적인 관음증에서 비롯된다고 이해하고 있다. 타인의 감춰진 비밀을 엿보려는 심리나 자연이나 기타 다른 사물의 비밀을 캐내려는 욕구는 그 대상만 다를 뿐 방식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본능인 동시에 지극히 은밀하고도 사적인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관심을 갖고 무엇인가 알아내려고 하는 일련의 행위,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하는 욕구는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에 관음증적 욕구는 더더욱 강해지는 게 아닐까.

 

이 책 <여자 없는 남자들>에는 표제작인 '여자 없는 남자들'을 포함하여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물론 각각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여자가 없다. 아니, 여자는 있는데 관심을 갖고 상대방의 비밀을 속속들이 탐구하고 싶어하는 대상은 아닌 것이다. 소설을 이해하는 관점은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성욕이나 사랑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감추어진 어떤 것을 은밀히 엿보거나 탐구하려는 욕구.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이 책의 첫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아내와 사별한 가후쿠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배우인 그는 아내가 암으로 죽기 전에 몇 명의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후쿠는 그 중 한 명인 다카스키를 만난다. 가후쿠는 아내가 죽기 전 왜 그 사람과 섹스를 했는지, 왜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는지 끝내 묻지 못했다. 가후쿠는 다카스키를 통해 그것을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의문으로 남는다.

 

두 번째 작품인 '예스터데이'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까운 친구로 지내왔던 기타루와 에리카가 등장한다. 연인 관계였던 둘은 에리카가 대학에 합격하고 기타루가 재수를 하게 되면서 소원해진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끝내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지 않았던 기타루에 대해 에리카는 이해하지 못한다. 에리카는 일일 데이트 상대였던 화자에게 자신이 꾸었던 꿈 얘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단둘이 작은 선실에 있고, 밤늦은 시간이라 둥근 창 밖으로 보름달이 보여. 그런데 그 달은 투명하고 깨끗한 얼음으로 만들어졌어. 아래 절반은 바다에 잠겨 있고. '저건 달처럼 보이지만 실은 얼음으로 되어 있고, 두께는 한 이십 센티미터쯤이야.' 아키가 내게 알려줘. '그래서 아침이 와서 해가 뜨면 녹아버려.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동안 잘 봐두는 게 좋아.' 그런 꿈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꿨어." (p.97)

 

세 번째 작품인 '독립기관'에는 성형외과 의사인 도카이가 등장한다. 그는 쉰두 살의 독신남이다. 그는 지금껏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그가 원하는 것도 '매력적인 여자들과의 친밀하고 지적인 교류'일 뿐이다. 상대는 대개 유부녀거나 연인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여자들을 만나고 쿨하게 헤어질 수 있었던 그가 결국에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상대는 물론 애가 있는 유부녀다. 도카이는 그녀로부터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한 언젠가 닥쳐올 이별에 대해 염려한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젠 그녀의 마음과 내 마음이 뭔가로 단단히 묶여버린 느낌이에요.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면 내 마음도 따라서 당겨집니다. 로프로 이어진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그 어디에도 없어요. 이런 건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감정입니다. 그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요. 이대로 점점 그리움이 깊어지면 나는 대체 어떻게 될까 하고." (p.145~p.146)

 

네 번째 작품인 '셰에라자드'에는 늘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하바라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에게는 그를 대신해 일정한 주기로 장도 봐주고 그와 섹스도 하는 여자가 한 명 있다. 그녀는 성행위가 끝나면 매번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미모의 왕비처럼.

 

"그는 원래부터 혼자인 것에 익숙했다. 그의 신경은 혼자가 된다고 그리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 하바라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그렇게 되면 더이상 셰에라자드와 침대에서 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좀더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뒷부분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p.178~p.179)

 

다섯 번째 작품인 '기노'에는 스포츠용품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던 기노가 등장한다. 그가 출장을 갔다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는 자신의 직장 동료와 자신의 집에서 한 몸이 되어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후 그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을 나왔다. 이모의 가게를 임대하여 바를 개업했었는데 어느 날 이혼을 한 전처가 그의 가게로 찾아온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를 하지만 그는 다만 형식적인 용서를 할 뿐이다. 일시적으로 가게의 문을 닫고 여행을 떠났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그때 상처를 받았음을 인식한다.

 

여섯 번째 작품인 '사랑하는 잠자'는 다들 짐작하겠지만 카프카의 '변신'에 등장하는 그레고르 잠자가 주인공이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던져진 듯 느끼는 그레고르 잠자는 고장난 자물쇠를 수리하러 온 꼽추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그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을 뿐.

 

"그녀를 생각하고 그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속이 아련히 따스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물고기나 해바라기가 아니란 사실이 점점 기쁘게 다가왔다. 두 다리로 걷고 옷을 입고 나이프나 포크로 식사하는 것은 분명 몹시 성가신 일이다. 이 세계에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만일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물고기나 해바라기가 되었다면 이렇듯 신기한 마음속 온기를 느끼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p.311)

 

일곱 번째 작품은 표제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는 한밤중 한 시가 넘은 시각에 엠의 남편으로부터 그녀의 자살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는다.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아주 사소한 인연으로(단지 지우개를 빌려주었다는) 연인 관계로 발전했던 그녀는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만났었고 그렇게 헤어졌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나'의 열네 살은 세상에서 함께 사라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자신이 이미 그곳에 있음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이젠 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모퉁이를 돌면 그것이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p.327)

 

작가의 소임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에 대한 탐구(그것이 여자든 남자든, 타인이든 자기 자신이든), 그리고 흐르는 시간과 그 속에서 존재했던 사람들의 관계와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어렴풋이 짐작하는 일일 것이다. 문학이란 결국 나 스스로, 오픈된 장소가 아닌 사적인 영역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몰래 엿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합법적으로 타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타인과의 대화가 그렇고, 드라마 시청이 그렇고, SNS가 그렇고, 독서가 그렇다. 그러나 가장 은밀하고 스릴있는 방법은 역시 독서가 아닐까 싶다. 나는 왜 그때 그것에 끌렸을까? 작가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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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와 관계없이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따로 적는다.

 

"스무 살 전후의 나날, 나는 일기를 쓰려고 몇 번 노력해봤지만 영 잘되지 않았다. 당시 내 주위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쉴새없이 일어났고, 그걸 따라잡기에도 벅찼다. 도저히 날마다 멈춰 서서 그날 일어난 일들을 일일이 노투에 적어둘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건 꼭 적어둬야지' 하고 생각할 만한 사건도 아니었다. 나로서는 거센 맞바람 속에서 가까스로 눈을 뜨고, 호흡을 가다듬고,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게 고작이었다." (p.111~p.112)

 

"인생이란 묘한 거야. 한때는 엄청나게 찬란하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것이,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버려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혹은 바라보는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놀랄 만큼 빛이 바래 보이는 거야. 내 눈이 대체 뭘 보고 있었나 싶어서 어이가 없어져." (p.211~p.212)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현실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 그것이 여자들이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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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변태
이외수 지음 / 해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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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가슴이 먹먹해지고 콧마루가 시큰해지는 순간이 있다. 살다보면 누구나. 강해 보이기만 했던 엄마의 모습이 어느 날 갑자기 작고 초라하게 보였을 때, 뼈마디가 툭툭 불거지고 쪼글쪼글 주름이 잡힌 엄마의 손을 잡았을 때 한동안 말을 잃고 한쪽 귀마저 멍멍해지곤 한다. '이만큼 세월이 흘렀구나. 엄마도 이제 늙으셨구나.'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볼 때가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야 그렇다 치지만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는 사람에게서도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평소 좋아하던 작가의 글이 점차 생명력을 잃어간다고 느끼는 순간이 내게는 더할 수 없이 아픈 때이다. 그의 몸에 새겨진 주름이야 확인할 길 없지만 그의 작품에서 마음에 잡힌 주름을 절절히 느끼게 될라치면 슬몃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얼마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을 때도, 공지영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를 읽었을 때도, 그리고 오늘 이외수의 소설집 <완전변태>를 읽었을 때도 가슴을 훑는 쓸쓸함을 느껴야만 했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지나친 오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모름지기 마음에 주름이 잡히는 순간 소설가로서 그의 생명은 이미 빛을 잃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컨대 작가에게서 느껴지는 마음의 주름이란 이런 것이다. 가장 큰 것은 상상력의 부재(또는 경직된 상상력)에서 오는 화석화 된 글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세운 마음의 제약이 수도 없이 늘어나게 되는가 보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는 식의 구분으로 인해 젊은 시절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거침없이 써내려갔던 작가도 나이가 들수록 도덕이나 제도, 삶의 철학이나 자신의 위치에 지나친 신경을 쓰곤 한다. 그렇게 쓰여진 글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작가도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구나 조바심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삶에서 깨우친 모든 것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려니 오죽이나 다급했을까.

 

그러나 소설은 잠언집이나 철학책이 아니다. 어떤 깨달음을 주겠다는 생각, 이를테면 주제에 대한 집착은 그 부작용이 너무 크다. 소설은 그저 현실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 그것으로 소설은 제 임무를 다한 것일 터, 그것을 읽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 주제가 무엇이냐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작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른길로 독자를 인도하겠다는 생각이면 그는 이제 소설보다는 철학을 해야 한다. 삶의 원리와 삶의 부조리를 밝히는 철학자 말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마음의 주름이 잡힌 작가의 글은 갈수록 비약이 심해진다는 법이다. 인간의 현실을 벗어난 비약,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가을의 공기처럼 메마르다. 인간의 희노애락을 느낄 수 없는 설정은 공감하기 어렵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절정이 <1Q84>나 <상실의 시대>를 썼을 때라면 작가 이외수의 절정은 <벽오금학도>나 <들개>, <칼>을 썼던 시기가 아니였나 싶다. 누구에게나 삶의 절정이 있게 마련이다. 또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절정을 누리기도 한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마음에 주름이 잡히지 않아야 한다. 소설가가 독자에게 가르침을 주겠다는 욕심, 그것은 단지 욕심일 뿐이다. 소설가는 상황을 만들고 보여주는 사람이지 상황을 분석할 겄까지는 없는 사람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예비죄인 아니면 현역죄인 이거나 아니면 예비역 죄인이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공범에라도 해당한다. 단지 현역죄인은 감옥 안에 존재하고 예비죄인이나 예비역죄인은 감옥 밖에 존재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p.93)

 

이 책의 표제작인 <완전변태>는 205호실 감방에 수감된 작가와 애벌레를 상정하고 있다. 애벌레는 언젠가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갈 날을 꿈꾼다. 작가 자신도 그 애벌레처럼 완전변태를 꿈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화등선을 하듯. 그 외에도 시골이라면 몸서리를 치는 도시 출신 어느 여선생을 그린 <청맹과니의 삶>, 사랑하는 이로 인해 인생 최대의 유혹과 대면한 한 무명화가의 이야기를 담은 <유배자>, 보기만 하면 일만근심을 사라져버리게 만드는 돌 ‘해우석’을 찾아 전국을 누비는 탐석광의 이야기를 그린 <해우석> 등 열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작가는 어쩌면 자신이 썼던 예전 작품을 보며 조금쯤 부끄러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자는 다르다. 적어도 젊은 시절의 작가는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삶도 있다고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기술이 아닌 삶의 방법을 가르칠 수 있기나 한 걸까 하고 말이다. 인생은 그 나이가 되지 않고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도 있다.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하지만 진정한 종교 지도자들과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별로 어렵지 않다. 진정한 종교 지도자들은 대개 베풀라는 설교를 많이 하면서 몸소 그것을 실천해 보인다. 하지만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은 대개 바치라는 설교를 많이 하면서 교세를 확장하는 일에만 주력한다. 물론 욕심에 눈이 멀어버리면 어떤 부류인지 구분할 능력을 상실해 버리지만." (p.204)

 

과거에 좋아했던 작가의 쇠락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작가의 마음속 주름이 깊어지는 걸 작품에서 확인했을 때, 나는 세상의 어떤 다리미로라도 그 주름을 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주름이 잡히지 않은 그의 글을 단 한번이라도 다시 읽고 싶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박한 평을 할 수밖에 없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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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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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떨어진 보도 위로 모르는 발자국들이 끝없이 흘러간다. 짓눌린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낙엽은 이내 와삭 부서지거나 이따금 되살아난 낙엽이 찬바람에 몸을 뒤챈다. 그 헛헛한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노라면 몹시도 책이 고플 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책이 고픈 게 아니라 따뜻한 아랫목에 묻어 둔 내 유년의 추억이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디어 책을 읽던 기억. 이불 속의 퀴퀴한 냄새가 내 발에서 나는 것인지 청국장 뜨는 냄샌지... 그렇게 길디긴 겨울이 느리게만 흘러갔었다.

 

나는 그때 '셜록 홈즈'나 '괴도 뤼팽' 등 그 또래의 아이들이 즐겨 보던 추리소설에 홀딱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초저녁잠이 많으셨던 할머니는 늦게까지 잠들지 않는 당신의 어린 손자를 향해 매일 밤 잔소리를 늘어 놓으셨다. 먹을 게 귀했던 시대에 할머니는 손주들 어디 나가서 배는 곯지나 않는지, 궁색한 저녁을 먹은 어린 손자가 잠들기 전에 혹여라도 허기가 지는 건 아닌지 언제나 애면글면하셨다. 그러니 늦게까지 책을 보는 손자가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을 터, 하룻저녁에도 몇 번씩 '그만 자라' 말씀하셨다.

 

나는 어릴 적 기억을 안고 소파에 엎디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질풍론도>를 읽었다. 어깨가 아플라치면 등을 대고 눕고, 그마저도 힘들면 다시 일어나 앉으면서 밤이 늦도록 책을 읽었다. 이맘때의 밤이면 늘 들리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나는 사실 장르소설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히가시노 게이고의 열혈팬도 아닙니다. 추리소설이라면 오히려 내가 예전에 읽었던, 지금 읽으면 약간 촌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책들을 더 좋아합니다. 예컨대 '셜록 홈즈 시리즈'라거나 '괴도 뤼팽'이나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들 말입니다. <질풍론도>도 서재에서 뽀얗게 먼지만 쌓이는 게 안타까워 이제서야 읽을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소파에서 몇 번인가 몸을 뒤채면서도 결국은 다 읽게 되더군요. 추리소설이 다 그렇듯 끝까지 읽기 전에는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든 법이지요.

 

사건의 발단은 다이호 대학 연구실에서 불법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탄저균 배양 샘플을 분실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K-55'로 명명된 그 생물 병기를 훔친 범인은 스키장 인근의 설산 외진 곳에 그것을 묻고 표식으로 너도밤나무에 테디 베어를 걸어둔 사진을 찍어 연구소장에게 메일로 보냅니다. 물론 거액의 돈을 요구하지요. 그러나 범인은 교통사고로 그만 죽고 맙니다. 범인이 'K-55'를 숨겼던 장소는 미궁에 빠지게 되었고, 연구소에서 불법적으로 진행된 일이었기에 연구소장은 선뜻 경찰에 알릴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만년 선임 연구원이었던 구리바야시는 스노보드 마니아인 중학생 아들을 대동하고 설산을 뒤지기 시작합니다. 추적 과정에서 구리바야시가 다리를 다치는 등 몇 번의 위기가 있었으나 결말은 싱겁게 끝납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반전이나 기발한 추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죠. 물론 독자의 허를 찌르는 전개가 두어 번 나타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선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소설을 단숨에 써내려갔을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눈에 띄는 휴지(休止)가 보이지 않았거든요. 이를테면 작가가 더 이상의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 몇 달이고 끙끙대면 나중에 이어 붙인 뒷부분은 앞부분과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그런 게 이 책에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가의 몰입 능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요. 물론 그동안 형성된 마니아층과 작가의 인지도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세밀한 묘사도 없이 대화와 스토리 라인만으로, 그것도 광대한 스케일을 무대로 하지도 않는, 게다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소재로 독자들을 이만큼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능력이라 하겠습니다. 나는 이 소설의 전체 스토리에 주목하기보다는 오히려 구리바야시와 그의 아들 슈토에게 눈길이 갔던 게 사실입니다.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는 구리바야시, 눈에 띄는 능력이나 탁월한 처세술도 없이 만년 선임 연구원의 직책에 머물러야 했던 주인공은 우리 주변의 흔하디 흔한 아버지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게다가 일에 치여 가족 여행조차 변변히 다녀온 적 없고, 아빠로서 아들과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누어 본 적 없는, 젊은 시절에 즐겼던 취미도 이제는 먼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그럼에도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불쌍한 아버지의 모습 말입니다. 구리바야시는 'K-55'를 찾기 위해 갔던 스키장에서 아들 슈토와의 벌어진 간극을 실감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 보편성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들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특징만 잡아 빠르게 전개시키는 그의 방식은 마치 세부 묘사에 치중하지 않고대상의 중요한 성질이나 특징을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는 크로키 화가를 닮아 있는 듯합니다.

 

어제 밤늦게까지 책을 읽은 탓인지 졸음이 몰려온다. 방금 전에도 밖에 나가 시원한 바람을 쏘였음에도. 이제 계절은 겨울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젊어서는 스키를 탈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겨울이 마냥 기다려지곤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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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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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답니다.  꽤나 유명한 소설가인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이라는 말에서 오는 기대와 설렘보다는 오히려 밋밋하고 그저 그럴 것이라는 편견이 먼저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처음'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대개 약간의 두려움을 동반한 짜릿한 설렘을 느끼게 마련인데 말이죠.  '첫눈', '첫사랑', '첫키스' 등 처음으로 시작되는 이런 숱한 말들은 그 흔함과는 별개로 각별하고도 강렬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처음'이라는 말은 가장 보편적인 언어인 동시에 가장 개별적인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러한 개별성 때문인지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첫'경험은 항상 새롭고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워 듣게 됩니다. 어쩌면 '처음'은 가장 진부한 주제인 동시에 언제나 새로운 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기도 전에 느꼈던 한국 소설에 대한 편견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고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묘하게도 천명관의 소설 <고래>는 그가 쓴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는군요.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그럴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은 기존의 한국 소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지요.  뭐랄까, '신선하다'고 하면 식상하고, 이게 과연 소설이라는 장르에 제대로 속하기나 할까 의심부터 드는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파격의 연속이지요.  그는 형식 밖의 형식으로 자신만의 글(또는 소설)을 쓴 셈입니다. 

 

그의 이력이 궁금했던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국어국문학이나 문예창작과를 전공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내가 어느 시점에서 한국 소설과 멀어진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별개의 영역으로만 보였던 창작 분야에서마저 산업화의 영향은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소설이라는 특정 형식은 판에 박은 듯 일정하고 내용만 조금 달라진 수많은 소설들이 쏟아졌던 거지요.  제 눈에는 그게 그거인 듯 보였고, 심지어 일정한 생산 라인에서 자동으로 뽑아져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내가 한국 소설에서 멀어졌던 게 아마 그때부터였던가 봅니다.

 

이따금 궁금하기는 했어요.  그럴 때면 어려서부터 눈에 익은 유명 작가의 작품에만 손이 가더군요.  그마저도 없으면 일본이나 서구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되었구요.  그러다가 최근 유행하는 한국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된 것도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천명관의 <고래>였습니다.  말하자면 <고래>는 나로 하여금 한국 소설과 재회하게 한 첫 소설인 셈입니다.

 

아, 천명관의 이력이 궁금했었다는 말을 해놓고 그에 대한 설명이 없었군요.  늘 이런 식입니다.  두서가 없지요.  다들 예상하겠지만 그가 이 세상에 <고래>를 내놓기 전 그의 (작가로서의) 이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가다판을 전전하다가 영화의 세계로 뛰어들었던 것이죠.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말입니다.  그가 소설 같지 않은(그래서 더욱 놀라운) 소설 <고래>를 쓸 수 있었던 것도 틀에 박힌 교육을 받지 않았던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 <고래>는 긴 겨울 밤 시커먼 남정네들이 행랑에 모여 시답잖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을 때, 작가가 투명인간이 되어 그들 몰래 방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 그런 소설입니다.  이를테면 허풍과 현실이 한데 섞여 서로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음담패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그러면서도 한국 근대사가 교묘히 섞여들어간, 때로는 '가량맞다'와 같은 순 우리말이 불쑥 튀어나오는 그런 소설입니다.  설화나 전설, 신화가 아닐까 의심하는 순간 작가는 불쑥 '독자 여러분!'을 외치며 등장하기도 합니다.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말입니다.  그 말에 놀란 독자는 '아, 맞아.  이건 가상현실이지.'하며 안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군은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그는 자신이 다시 선출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정적들은 더욱 거세게 그를 압박해왔고 민심은 그를 떠난 지 오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영원히 집권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새로운 법률을 공포한 것이었다. 그것은 독재의 법칙이었다." (p.351)

 

이런 터무니없는 소설이 어떻게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것일까요?  그것이 비단 작가의 글솜씨나 소설로서의 파격에만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뻥과 허풍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살짝 비껴간 듯하면서도 결코 현실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그들의 말, 그들의 삶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덕과 법의 테두리 속에 존재하는 삶이 난데없는 뻥과 결합했을 때 우리가 받는 느낌은 비현실이 아니라 무한한 자유와 재미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로 합쳐 흐트러짐 없는 서사로 엮어낸 작가의 능력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은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그들만의 언어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구요.

 

아무튼 소설 <고래>는 기존의 소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것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소설의 태생이 그렇듯 뒷골목의 이야기를 일정한 형식에 담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발상은 작가 천명관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들이 뭐라 하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써내려간 까닭에 독자는 규칙에서 해방된 듯한 자유를 느끼고 그의 뻔한 허풍에 웃음을 짓게도 됩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탈 없이 이야기가 꾸려지는 게 신기하지요?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 강제로 이끌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규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우리의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듯 자유로운 소설에 무수히 많은 법칙이 등장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작가는 소설 중간중간에 말도 안 되는 법칙들을 갖다붙여 독자로 하여금 이 소설이 다큐가 아닌 예능으로 읽히도록 강제하는 듯합니다.  예컨대 '구라의 법칙', '권태의 법칙', '생식의 법칙', 아랫것들의 법칙', '구호의 법칙', '흥행업의 법칙', '논쟁의 법칙', '고용의 법칙', '사랑의 법칙' 등 법칙이란 법칙이 셀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즈음에는 청산유수로 쏟아내는 그의 말솜씨에 세 여자가 모두 넋을 잃어 국이 졸아붙는지 밥이 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것은 구라의 법칙이었다. (p.140)

 

사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별 의미도 없지만 천부적인 입담꾼 천명관의 손에서 펼쳐지는 글의 얼개는 국밥집 노파와 금복, 금복의 딸 춘희로 이어집니다.  읽는 독자에 따라 금복을 주인공으로 또는 그녀의 딸 춘희를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소설 속 무대인 평대를 중심으로 이재에 밝은 금복은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부자가 됩니다.  그야말로 벼락부자가 된 셈이지요.  그것은 순전히 한을 품고 죽은 박색 노파의 재물을 손에 넣었기 때문인데 결국 금복은 그 죽은 노파로 인해 파국을 맞게 됩니다.  산골 출신의 한 소녀가 욕심을 제어하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내달리는 모습입니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p.271)

 

금복이 지었던 고래를 닮은 영화관은 그 상징성이 남다릅니다.  영화라는 가상현실, 그 덧없음은 우리가 욕심내는 어떤 것도 스크린의 그것처럼 허망한 것임을 말하는 듯합니다.  결국 금복은 영화관과 함께 불에 타 죽게 됩니다.  방화범으로 몰린 벙어리 춘희는 자신에 대한 변명도, 결백에 대한 주장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매섭고 긴 옥살이를 선천적으로 타고난 건장한 육체 하나에 의지하여 간신히 버틸 뿐입니다.  순진하리만치 미련한 춘희, 남에게 해코지를 할 줄 모르는 춘희도 결국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을 보면 이 소설은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주제로 집약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p.301)

 

천명관의 <고래>는 내가 그동안 줄곧 생각해왔던 한국 소설에 대한 이미지를 단박에 깨트린 작품이었습니다.  나는 어쩌면 천명관이라는 작가로 인해 한국 소설에 대한 기대와 흥미를 한동안 품고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마치 첫눈에 대한 막연한 기대처럼 설레는 것일 테지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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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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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서적도 아닌데 한 자 한 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의해서 읽어야 할 책들이 있습니다.  마치 삶의 비의를 탐구하는 철학자처럼 말입니다.  고전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살아 있는 작가의 작품들 중에도 그런 소설은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내게는 예컨대 밀란 쿤데라, 미셸 트루니에, 움베르토 에코, 김훈이나 최명희가 그렇습니다.  그런 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지금은 대학로에서 연극 연출을 하고 있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곤 합니다.  대학 시절 시인으로 등단했던 친구는 그의 시가 너무 어렵다는 나의 불평에 대해, "시인이 어렵게 썼으니 독자도 당연히 어렵게 읽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시간 투자를 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웃기는 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전부 다는 아닐지라도 그의 말에도 일말의 가치가 있다고 수긍하게 됩니다.

 

밀란 쿤데라의 초기 작품인 <농담>은 독자들에게 여러 명제를 제시하는 작품입니다.  젊은 시절에 가볍게 던졌던 농담이나 치기어린 행동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었을 때,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지워지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오해했던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인지, 게다가 그것이 부당하다면 과연 우리는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인지, 세월이 한참 지난 뒤 자신을 오해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지, 그도 여의치 않다면 자신의 분노는 어찌해야 하는지, 비록 자신의 인생이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흐를지라도 역사가 저지른 농담이나 신의 계시쯤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지, 부당함에 대한 우리의 분노를 스스로 억제한 채 신의 계시쯤으로 여기는 행동이 혹시 비겁함이나 소심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그 모든 명제에 대해 우리가 아는 진실은 이렇다 딱 부러지게 답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자동 보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움직인다)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p.396)

 

소설의 무대는 940년대 후반 체코의 공산혁명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띄며 강요되어지던 시기에 주인공 루드빅은 그 모든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습니다.  그저 시대적 상황에 흡수되어 그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젊은이였을 뿐. 그러던 어느 날 연애하고 싶은 여자 마르게타는 공산당 여름캠프에만 열을 올리고 그런 그녀를 놀려줘야겠다고 생각했던 루드빅은 농담처럼 쓴 연서 한 통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 한 통의 편지로 인해 루드빅은 덜컥 재판에 회부되고 반역자로 지목되어 순식간에 인생의 항로가 뒤바뀌게 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행했던 일들이 그를 배신하고 스스로가 잔인한 농담의 대상이 되어 버린 웃지 못 할 상황. 결국 루드빅은 당에서 제명되고 다니던 대학에서도 추방되고 맙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 그리고 연기를 한다." (p.125)

 

그리고 15년후, 루드빅은 자유로워졌고 15년 전 자신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그녀와 그들에게 복수를 꿈꾸지지만 그가 계획했던 복수는 계속해서 희극적으로 어긋나게 되고, 결국 그는 자신의 인생을 통하여 우리의 삶 자체가 농담이며 그 농담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와 공존할 수 없다는 것과 우리가 현재라고 믿는 오늘도 곧 미래의 과거 일뿐이라는 필연적인 사실. 그 사실을 깨닫는데 루드빅은 15년이나 걸렸던 셈입니다.

 

"나는 그에게 책임이란 자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답했다. 자신은 공산주의자로서 행동하기에 충분히 자유롭다고 느낀다고.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증명해 보여야 하며, 그렇게 할 것이라고. 이 말을 하며 그는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오늘,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이 순간을 떠올리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잘 알 것 같다. 알렉세이는 그때 겨우 스무 살 청년, 어린아이였음을, 그의 운명은 마치 아주 작은 몸 위에 걸쳐진 거인의 옷처럼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음을." (p.149)

 

루드빅은 자신을 당에서 제명하고 곤경에 빠트렸던 파벨 제마넥에게 복수하기 위해 파벨의 부인인 헬레나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헬레나는 이미 파벨과 별거중인 상태였고, 루드빅의 행동이 그의 진심이라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루드빅은 자신의 고향인 모라비아에서 파벨과 헬레나를 함께 만나게 되는데 젊고 예쁜 여자를 대동한 파벨은 선심 쓰듯 헬레나를 양보합니다.  과거에 했던 자신의 잘못을 그것으로 용서받으려는 듯 말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 단 한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해서도 안 된다.  현대인은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중대한 순간들을 모두 교묘히 피해가려 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은 채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죽음까지 가려 한다."    (p.213)

 

루드빅이 당에서 제명되고 곧바로 군에 입대하여 탄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라바의 공장에서 일하던 루치에라는 여인이었죠.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던 생활 속에서 루치에는 루드빅의 희망이자 꿈이었습니다.  결국 루드빅은 루치에로부터 루드빅의 어떠한 요구도 수락하겠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루치에는 그와의 관계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결국 루치에는 루드빅의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게 된 셈입니다.  그런 루치에를 그는 고향 모라비아에서 우연히 맞닥뜨립니다.  그리고 과거에 루드빅이 도움을 주었던 코스트카로부터 루치에의 과거를 듣게 됩니다.  루드빅 자신을 거부했던 루치에가 코스트카에게 그녀의 몸을 허락했다는 것도.  그리고 열여섯 살의 나이에 같은 또래의 남자들로부터 유린되었다는 것도.

 

"우리는 유린된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이 세계를 불쌍히 여길 수 없었던 까닭으로 우리는 거기에 등을 돌렸고, 그리하여 이 세계의 불행과 우리 자신의 불행을 다같이 악화시키고 말았다."    (p.426)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유린된 세계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 세계에서 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운명은 자신의 의사와 일치하는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때 어느 누구에게 우리의 분노를 드러내야 할까요? 역사의 농담에?  신의 계시에?  작가가 말했듯 유린된 세상에 등을 돌린 사람은 자신이 사는 세계와 자신을 다같이 불행하게 할 뿐입니다.  그들도 나처럼 유린된 세상에 살고 있음을 불쌍히 여겨야겠지요.  과거의 부당함은, 그때 내게 해를 끼쳤던 사람은 복수의 대상이 아닌, 다만 가엾게 여겨야 할 또 다른 자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역사의 파도에 휩싸일 날만 기다리면서.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도 모두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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