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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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서적도 아닌데 한 자 한 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의해서 읽어야 할 책들이 있습니다.  마치 삶의 비의를 탐구하는 철학자처럼 말입니다.  고전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살아 있는 작가의 작품들 중에도 그런 소설은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내게는 예컨대 밀란 쿤데라, 미셸 트루니에, 움베르토 에코, 김훈이나 최명희가 그렇습니다.  그런 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지금은 대학로에서 연극 연출을 하고 있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곤 합니다.  대학 시절 시인으로 등단했던 친구는 그의 시가 너무 어렵다는 나의 불평에 대해, "시인이 어렵게 썼으니 독자도 당연히 어렵게 읽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시간 투자를 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웃기는 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전부 다는 아닐지라도 그의 말에도 일말의 가치가 있다고 수긍하게 됩니다.

 

밀란 쿤데라의 초기 작품인 <농담>은 독자들에게 여러 명제를 제시하는 작품입니다.  젊은 시절에 가볍게 던졌던 농담이나 치기어린 행동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었을 때,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지워지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오해했던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인지, 게다가 그것이 부당하다면 과연 우리는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인지, 세월이 한참 지난 뒤 자신을 오해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지, 그도 여의치 않다면 자신의 분노는 어찌해야 하는지, 비록 자신의 인생이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흐를지라도 역사가 저지른 농담이나 신의 계시쯤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지, 부당함에 대한 우리의 분노를 스스로 억제한 채 신의 계시쯤으로 여기는 행동이 혹시 비겁함이나 소심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그 모든 명제에 대해 우리가 아는 진실은 이렇다 딱 부러지게 답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자동 보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움직인다)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p.396)

 

소설의 무대는 940년대 후반 체코의 공산혁명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띄며 강요되어지던 시기에 주인공 루드빅은 그 모든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습니다.  그저 시대적 상황에 흡수되어 그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젊은이였을 뿐. 그러던 어느 날 연애하고 싶은 여자 마르게타는 공산당 여름캠프에만 열을 올리고 그런 그녀를 놀려줘야겠다고 생각했던 루드빅은 농담처럼 쓴 연서 한 통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 한 통의 편지로 인해 루드빅은 덜컥 재판에 회부되고 반역자로 지목되어 순식간에 인생의 항로가 뒤바뀌게 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행했던 일들이 그를 배신하고 스스로가 잔인한 농담의 대상이 되어 버린 웃지 못 할 상황. 결국 루드빅은 당에서 제명되고 다니던 대학에서도 추방되고 맙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 그리고 연기를 한다." (p.125)

 

그리고 15년후, 루드빅은 자유로워졌고 15년 전 자신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그녀와 그들에게 복수를 꿈꾸지지만 그가 계획했던 복수는 계속해서 희극적으로 어긋나게 되고, 결국 그는 자신의 인생을 통하여 우리의 삶 자체가 농담이며 그 농담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와 공존할 수 없다는 것과 우리가 현재라고 믿는 오늘도 곧 미래의 과거 일뿐이라는 필연적인 사실. 그 사실을 깨닫는데 루드빅은 15년이나 걸렸던 셈입니다.

 

"나는 그에게 책임이란 자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답했다. 자신은 공산주의자로서 행동하기에 충분히 자유롭다고 느낀다고.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증명해 보여야 하며, 그렇게 할 것이라고. 이 말을 하며 그는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오늘,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이 순간을 떠올리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잘 알 것 같다. 알렉세이는 그때 겨우 스무 살 청년, 어린아이였음을, 그의 운명은 마치 아주 작은 몸 위에 걸쳐진 거인의 옷처럼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음을." (p.149)

 

루드빅은 자신을 당에서 제명하고 곤경에 빠트렸던 파벨 제마넥에게 복수하기 위해 파벨의 부인인 헬레나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헬레나는 이미 파벨과 별거중인 상태였고, 루드빅의 행동이 그의 진심이라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루드빅은 자신의 고향인 모라비아에서 파벨과 헬레나를 함께 만나게 되는데 젊고 예쁜 여자를 대동한 파벨은 선심 쓰듯 헬레나를 양보합니다.  과거에 했던 자신의 잘못을 그것으로 용서받으려는 듯 말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 단 한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해서도 안 된다.  현대인은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중대한 순간들을 모두 교묘히 피해가려 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은 채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죽음까지 가려 한다."    (p.213)

 

루드빅이 당에서 제명되고 곧바로 군에 입대하여 탄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라바의 공장에서 일하던 루치에라는 여인이었죠.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던 생활 속에서 루치에는 루드빅의 희망이자 꿈이었습니다.  결국 루드빅은 루치에로부터 루드빅의 어떠한 요구도 수락하겠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루치에는 그와의 관계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결국 루치에는 루드빅의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게 된 셈입니다.  그런 루치에를 그는 고향 모라비아에서 우연히 맞닥뜨립니다.  그리고 과거에 루드빅이 도움을 주었던 코스트카로부터 루치에의 과거를 듣게 됩니다.  루드빅 자신을 거부했던 루치에가 코스트카에게 그녀의 몸을 허락했다는 것도.  그리고 열여섯 살의 나이에 같은 또래의 남자들로부터 유린되었다는 것도.

 

"우리는 유린된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이 세계를 불쌍히 여길 수 없었던 까닭으로 우리는 거기에 등을 돌렸고, 그리하여 이 세계의 불행과 우리 자신의 불행을 다같이 악화시키고 말았다."    (p.426)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유린된 세계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 세계에서 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운명은 자신의 의사와 일치하는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때 어느 누구에게 우리의 분노를 드러내야 할까요? 역사의 농담에?  신의 계시에?  작가가 말했듯 유린된 세상에 등을 돌린 사람은 자신이 사는 세계와 자신을 다같이 불행하게 할 뿐입니다.  그들도 나처럼 유린된 세상에 살고 있음을 불쌍히 여겨야겠지요.  과거의 부당함은, 그때 내게 해를 끼쳤던 사람은 복수의 대상이 아닌, 다만 가엾게 여겨야 할 또 다른 자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역사의 파도에 휩싸일 날만 기다리면서.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도 모두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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