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오따쓰 -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앨런 와이즈먼 지음, 황대권 옮김 / 월간말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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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천안함 희생자들의 합동영결식이 있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  냉전이 살아 숨쉬는 역사적 유적지에서 우리는 오늘도 살고, 또 그렇게 한동안 살아갈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원인도 모른 채 숨져갈 때 켸켸묵은 이념의 선전문구만 그들의 죽음을 감싸고 있었다.  아주 낡은 꼬리표처럼.
나는 그 46명의 젊은이들을 보내며 이 세상에서 이념의 제물이 된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희생을 담보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을까 생각할 때, 이데올로기의 환상은 세대를 두고 끝없이 재생산되어 누군가의 배를 불리워 주리라는 끔찍한 상상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라 비올렌씨아!(폭력의 시대)하면 어느 팝송의 제목 쯤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콜롬비아 자유당과 보수당의 내전으로 2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이것을 일컬어 폭력의 시대(라 비올렌씨아)라고 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콜롬비아는 콜롬비아 무장 혁명군(FARC)과 정부군 또는 우익 민병대와 부호들의 개인 사병에 이르기까지 자국내 무장 세력들간의 끝도 없는 충돌과 약탈, 납치 등으로 가족을 잃고 재산과 땅을 잃은 사람들이 희망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은 이와 같은 내전으로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심신까지 파괴된 콜롬비아의 열악한 환경을 딛고 그들만의 마음의 안식처를 마련한 가비오따쓰 생태공동체의 이야기이다.
미국의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는 베테랑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에게 세계적인 환경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기록하는 일을 맡겼다. 그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나라의 무질서 속에서 외딴 섬처럼 존재하는 <가비오따쓰> 생태공동체를 듣게 되었다.  지구의 환경파괴 대가로 발전을 거듭한 세계적 도시와 인간의 욕심이 빚어낸 살육의 현장에서 그는희망과 승리의 상징을 발견한 것이다. <가비오따쓰>라는 마을은 <야노쓰>라는 거대한 열대 사바나의 젖은 사막, 표토의 깊이가 2센티미터 밖에 안 되고 그마저도 산성화되고 알루미늄 독성에 오염된, 콜롬비아에서 가장 척박한 땅 <야노쓰>에서 유토피아가 되었다.  저자는 이런 척박한 곳에서의 성공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사람이 살아 갈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사막이란 상상력이 고갈된 상태일 뿐, <가비오따쓰>는 상상력이 만발한 오아시스였다. 앨런 와이즈먼은 계속 그곳을 방문하며 <가비오따쓰>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였고, 이것을 바탕으로 소설 형식을 빌려 다큐멘터리와 같은 생생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해 준다.
1971년 이탈리아 이민 2세대인 파올로 루가리는 일단의 콜롬비아의 이상주의자들과 기술자들을 이끌고 야노쓰로 향했다.  그는 야노쓰야말로 열대지역을 대신하여 이상적인 문명을 펼치는 데 가장 완벽한 환경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자연을 닮았고 가장 환경 친화적인 도구들을 개발하였다. 
진창과 말라리아 모기가 들끓는 개울로 이뤄진 땅에서 깨끗한 물을 찾기 위해 수동펌프를 발명하고 식수의 세균을 제거하기 위해 태양열 주전자를 개발하였다.
또 열대바람을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풍차, 비가 올 때도 작동되는 태양열 온수기, 식용 및 약용작물 재배를 위한 수경재배법 등도 고안했다,  1990년대에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사라져 가는 열대우림을 되살려 또 하나의 기적을 이뤄냈다.  이처럼 30여년 동안 이 생태환경마을에 사는 과학자, 장인, 농부, 길거리를 떠돌았던 소년들, 그리고 인디언들은 세계적인 구호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현실로 일궈낸 것이다.
"가비오따쓰는 카오스에서 무작위로 태어난 것들의 총체입니다.  가비오따쓰는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기회가 만들어지는 장소, 경쟁 대신 협동이 들어서는 장소입니다."
가비오따쓰는 또한 분쟁지역 한가운데서 정부군과 게릴라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 중립지대를 고수함으로써 좌우 어느 쪽으로부터도 침탈받지 않고 생태마을을 가꾸어 올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생태공동체가 하나의 축이라면 또 다른 축은 좌우 이념의 대결을 넘어 피로 물드는 갈등을 겪지 않을 대안 사회에 대한 가능성이다. 
가비오따쓰 공동체의 설립을 주도한 파올로 루가리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의 변호사이자 지질학자였으나 19세기 콜롬비아 대통령의 고종손녀와 결혼하면서 콜롬비아 엘리트층에 진입하였고,  이런 덕분에 루가리는 콜롬비아 내에서 최고 엘리트에 드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발전이라는 한 신부님의 말에 감명을 받은 루가리는 보고타 국립대학을 졸업한 후 제3세계 발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아시아와 남미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그가 선택한 곳이 바로 가비오따쓰였다.  그는 태양열 이용이 걸음마 단계였던 70년대 초반 고립무원의 제3세계 오지에서 태양력, 풍력과 같은 대체에너지만 이용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인 것이다.   76년 유엔개발계획(UNDP)은 이곳을 공동체 모델로 선정했고, 이후 유엔을 비롯한 국제단체들은 가비오따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석유위기를 거쳐 대체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가비오따쓰는 80년대에 세계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콜롬비아의 동쪽 초원 가비오따쓰는 정부나 반군 모두 콜롬비아의 미래로 인식하고 있다.  가비오따쓰인들은 이제 그들이 심었던 온두라스산 소나무에서 최고급의 송진을 채취하여 시판함으로써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였고,  코카 재배를 대체할 약용식물의 재배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코카를 능가할 수익성이 보장되는 약용식물을 재배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콜롬비아는 세계적 마약 국가에서 친환경적 모범국가로 탈바꿈 하고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제1세계가 파괴한 지구환경을, 그들이 멸시하고 환경 파괴의 피해만 물려주었던 제3세계의 국가 콜롬비아 오지에서 가비오따쓰인들은 지구 환경 복원의 작은 씨앗을 틔우고 있는것이다.  인종과 직업에 의해 차별 받거나 무시되지 않는 사회,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없는 평등한 사회, 경찰도 군인도 존재하지 않지만 법죄가 없는 사회, 교육과 의료 노후대책을 걱정하지 않는 사회,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꿈의 도시를 그들은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아브람도 도서실 지붕을 고쳐야 하는 등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우리 부서의 사람들을 모두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그가 뽐삘리오에게 말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그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파올로 루가리는 가비오따쓰인들이 늘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차분한 토론을 통해 결론에 이르는 모습을 경외에 찬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위협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가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그들은 해결점을 찾았고 또 다른 문제로 넘어갔다.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공동체의 특징이었다.
(P.341-342) 
떠나면 그리워지고, 머물 때는 떠나고 싶지 않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 그 영혼의 안식처를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내 마음 한 귀퉁이에 내 영혼의 안식처를 꿈꾸게 되었다.  나는 그곳으로의 귀향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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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라이프 - 우리가 꿈꾸는 또 다른 삶
쓰지 신이치 지음, 김향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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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요즘, 친구들 사이에선 차를 팔아야겠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게 된다.  물론 그 말을 실천으로 옮기는 친구는 거의 없지만 다들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과연 지금 시점에서 석유가 고갈되면 어떻게 될까?"  
모든 공장이 문을 닫고, 전기마저 끊긴 암흑세계에서 나는 살아날 수 있을까?
나는 농사 지을 줄도 모르고, 먹거리를 생산할 텃밭도 한 뙈기 없는데 무엇으로 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공포감이 밀려온다.  나와 내 가족의 생명과 안전을 나는 그 무엇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의존도는 얼마나 되는지...  단 한 번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성공'이나 '부'로 대변되는 환상에 사로잡혀 오늘도 나는 내 삶을 즐길 여유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이규(李珪)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한국계 일본인이다.
코넬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메이지가쿠잉대학 국제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전 세계적으로 환경운동과 문화운동을 하는 한편, 환경공생형 비즈니스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는 영어에도 존재하지 않는 슬로 라이프(slow life)라는 말을 처음으로 세상에 퍼뜨린 인물이기도 하다.  저자는 경제, 문화, 환경, 정치, 먹거리 등 다양한 분야의 키워드를 주제로 자신의 생각과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독자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강제적이거나 강압적이 아니며 어떠한 규칙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 새롭고 평화롭고 친환경적인 삶을 디자인해 나가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돈과 직결되지 않는 모든 것을 잡일, ,잡담, 잡생각, 잡지, 잡념, 잡음 등으로 표현하며, 그런 일들을 천시하거나 터부시하여 왔다.  오직 효율성과 '빨리빨리'라는 속도에 나 자신을 맞추고 끝없는 경쟁구조로 내몰았던 것이다.
상대가 자연이든 사람이든,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게 하는 일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  요컨대 함께 살아가는 일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왜냐하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주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 지금 남을 사랑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기다림을 뺀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P.55)
더글러스 러미스가 주장하듯 경쟁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는 공포심이다.  뒤쳐질지 모른다는 공포, 급기야는 낙오되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우리는 언제나 그 대열의 앞에 서야 하는데 그  줄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정황조차 없는 긴박함과 절박함을 갖추어야만,  사람들은 비로소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일주일 생활비가 10달러에서 30달러로 바뀌는 것을 진보라 여겨 왔던 이유는 이러한 공포를 이용한 개발의 논리가 대중을 세뇌시켰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인구는 점차 줄어 가는데 1년에 몇십 만 채의 아파트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서도 아파트값이 매년 오를 것이라는 환상과 함께 그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면 낙오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공포를 심어주는 것은 성장을 지향하는 기업과 국가의 얄팍한 눈속임이다.   아무런 까닭도 모른 채, 우리는 그들의 논리에 잘도 이끌려 단문형 냉장고를 양문형 냉장고로 바꾸고,  일반 세탁기를 드럼세탁기로 바꾸며 살아 왔다.  우리의 정원이자 텃밭인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수십만의 빈곤층이 생성돼도 GDP는 성장하고, 범죄와 질병이 증가해도 성장은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성장 논리의 세뇌에서 벗어날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  경제학자 슈마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술은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법칙과 원리로 발전해 간다.  반면 자연계는 성장과 발전을 '언제, 어디서 멈출 것인가'를 알고 있다.  자연계의 모든 것에는 킈,빠르기,힘의 한도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 일부인 인간도 자연계 안에서는 균형, 조화, 정화의 힘이 작동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기술이라는 것은 크기,빠르기,힘을 스스로 제어하는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기에는 균형, 조정, 정화의 힘이 작동하지 않는다. (P.123)
요즘 아이들의 교육을 보면서 무서움을 느낄 때가 있다.  전에는 한 분야만 잘해도 그럭저럭 밥벌이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학습 분야가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능력이나 한계를 초과하는 범위로 확대되었다는 느낌마저 지울 수 없다.  성장의 논리로 따진다면 인간은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오직 자신의 능력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어쩌면 협동과 조화를 상실한 현대사회의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시간 틀은 둘로 나뉜다.  첫째는 지구와 생물의 생태적인 시간의 틀, 거기에는 지구의 역사와 함께 발맞추어 온 생물 진화의 원대하고도 유장한 시간의 흐름, 개개 생명의 삶과 죽음의 사이클 등이 포함된다.  둘째는 산업이나 상업 등의 경제적 시간의 틀이다.  비즈니스는 속도를 다투고 변화를 좋아한다.  거기에는 가속화의 끊임없는 변화, 무한한 성장이 철칙이다.  이에 반하는 자는 그에 따른 제재를 받게 된다.  이것이 현대 세계의 지배적인 시간의 틀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P.199)
'녹색 성장'이라는 슬로건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자연 환경과 생태계의 보호나 개선을 의미하는 '녹색'과 경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성장은'절대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상반된 개념이다.  여기에는 그럴 듯하게 포장된 속임수만 존재한다.  결국 녹색이냐 성장이냐는 선택의 문제이지 공생이나 조화의 문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가끔 사람들은 불가능한 것조차 광고라는 프랑켄머쉰에 들어갔다 나오면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곤 한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며 기다림 속에는 길게 이어지는 다양한 상념, 근원적인 어떤 것으로의 지향, 그 궁극적인 소실점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마주하게 된다.
이 필연적인 상념의 터널을 통과하는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삶'이다.  우리는 지금도 기다림의 긴 터널을 '설레임'과  동반하여 천천히 걸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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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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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예술 수업은 이발소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내게는 그랬다.
먹고 살 것이 급했던 나의 어린 시절에 예술이란 그저 희망 없는 사람들의 끄적임이나 흥얼거림 정도로 인식되었고,  예술가란 백수의 고상한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예술 수업은 교과 밖의 과외 수업으로 변질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한 달에 한 번 머리를 깎으러 들렀던 이발소에는 밀레의 '만종'이나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릉 속일지라도'가 걸려있었고, 오래된 전축에서는 트로트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예술가는 오직 밀레, 푸쉬킨, 이미자 세 명 뿐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그리고 어른이 된 이후에도 그림은 그저 새로 산 아파트의 벽면을 장식하는 사치품이나 시간이 지나면 은행 이자보다 더 높은 수익이 기대되는 투자 대상 쯤으로 여겼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한때 주식이나 부동산에 더이상 매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미래의 투자처는 그림 밖에 없다는 생각에 잘 알지도 못하는 그림릉 구경하러 화랑이나 전시회를 뻔질나게 드나들었었다,  그림을 보는 안목이 중요하다는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 언질을 성경처럼 가슴에 품고는 그 안목을 어찌 높일까 고민했었다.  어린애 같은 발품을 오래도 팔고 나니 지치기도 했고, 원하던 안목도 높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자연스레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학시절 방배동의 지하차고를 빌려 미대 친구들로부터 데생을 배웠던 경험이 내 미술 공부의 전부였던 나는 그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림과 화가에 대한 나의 편견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펼친 순간 미술 이론 시간에 그 이름만 듣고 배웠던 반 고흐의 치열한 삶과 예술혼을 경외심과 감동으로 읽어나갔다.
그림이란 게 뭐냐? 어떻게 해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 그건 우리가 느끼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서 있는,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는 것과 같다.  아무리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는  그 벽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인내심을 갖고 삽질을 해서 그 벽 밑을 파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럴 때 규칙이 없다면,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흔들림 없이 계속해 나갈 수 있겠니? 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P.93)
이 책은 고흐가 28살의 늦은 나이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면서 그에게 경제적 지원과 작품의 판매를 대행했던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37년의 짧은 생애 동안 지독한 고독과 가난에 시달렸던 고흐는 그가 그림 그리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1872년 8월부터 1890년 7월 29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668통이나 되고, 879점의 그림을 남겼다.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 (P.134)
칼뱅파 목사이셨던 고흐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했던 맏아들에 대한 불신과 종교적 신념의 차이로 그를 멀리했으며, 그로 인해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지원했던 테오를 위해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림에 열중했으며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유화나 수채화 보다는 데생에 매달리기도 했고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  그러는 도중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여동생 윌에게 그는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너무 기를 쓰고 공부하지는 말아라.  공부는 독창성을 죽일 뿐이다.  네 자신을 즐겨라! 부족하게 즐기는 것보다는 지나치게 즐기는 쪽이 낫다.  그리고 예술이나 사랑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마라.  그건 주로 기질의 문제라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P.156)
정형화된 비례나 그림의 형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든 감정과 느낌을 한 장의 그림에 담으려 노력했던 고흐는 그 시대 화가들에게 이단아요, 반항아였을 것이다.  그에 더하여 사촌 여동생과의 사랑에 실패한 후 거리의 창녀 시엔과의 짧은 사랑, 그리고 고독.  고갱과의 동거와 간질 발작으로 결별.  그리고 정신병원과 요양원 생활.  그리고 자살.  
색채를 통해 서 무언가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로 보완해 주는 두 가지 색을 결합하여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 그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를 이루어서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표현하는 일, 얼굴을 어두운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일,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어떤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P.208)
실로 예술이란 평온한 대지를 바라보며 가파른 벼랑의 중간 쯤에 놓인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고 노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진보적 예술가에게는 동시대에서 맛볼 수 있는 열광이나 영광도 기대하지 못한다.
진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
마부 없는 마차가 경사진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는 것.  우리는 그때 짐짝처럼 실려 눈을 감은 채 그 위태로운 순간을 견디는 것.  그 순간이 끝났을 때 우리가 도착한 새로운 곳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어느 위대한 예술가나 선각자가 우리를 대신해 그 마부석에 앉아 고독과 위험을 감내하며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했음을 깨닫게 되는 것.
나는 그 위대한 예술가의 영혼 스케치를 가슴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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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드혼 농장 이야기
핀드혼 공동체 지음, 조하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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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지 이틀이나 지났는데 리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나는 몹시 당혹스럽다.
리뷰보다 이 책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판타지 소설인 듯도 하고, 신화나 전설인 듯도 하고, 신비주의 철학서인 듯도 하고, 유기농법을 다룬 농업서인 듯도 하고, 공동체를 다룬 사회과학서인 듯도 하다.
나는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번 책을 잡으면 다 읽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집스런 나의 성격 탓에 어찌어찌 다 읽기는 했지만 책의 내용을 곰곰 되새겨 봐도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물질계에서만 살아온 내가 이 책에서 말하는 ’데바’나 ’자연령’, ’엘리멘탈’, ’폰’, ’판’과 같은 낯선 용어와 그 영혼계로부터 받은 메세지를 날짜별로 기록한 글을 읽으며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어느 정신병자의 황당한 이야기로 치부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라이브러리 저널>의 서평을 인용해 보자.
"이 책에서 핀드혼 공동체의 설립자들과 그 멤버들은 수년 동안 자신들이 여러 자연령들과 접촉하게 된 경위와, 그 자연령들의 메시지를 통해 어떻게 채소, 과일, 꽃 등의 재배에 기적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웃어 넘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각자의 자유이다.  아무튼 이 책은 놀랍고도 매우 다름다운 책이다."

1962년 11월의 어느 눈 내리던 날, 큰 호텔의 지배인이었던 피터는 캐러밴 트레일러(이동식 주택)를 몰고 스코틀랜드의 척박하고 황량한 땅 핀드혼으로 갔다. ’저렇게 황량한 곳에서, 또 저렇게 작은 캐러밴 속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야’라고 생각했던 피터는 그날부터 그곳에 정착하여 그 작은 캐러밴 속에서 여섯 명(피터, 아일린, 도로시, 아들 삼형제)이 7년 동안 살며 농장을 일구었다.
삶을 통해 아주 힘든 영적인 훈련을 받아 온 아내 아일린과 피터, 그리고 도로시는 모든 것을 신(내면의 안내자)께 맡기고 그들이 핀드혼에서 해나갈 일이 세상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 인도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도로시와 아일린은 ’데바’와 소통한 것을 기록하고 피터는 그 기록에 따라 농장을 꾸려나간다.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진 스코틀랜드의 척박한 땅에서 이탄과 잡초를 걷어내고, 말의 배설물과 짚단을 모아 퇴비를 만들고, 해안가에서 해초들을 따오고, 벌채장에서 나무재를 모으는 등 땅을 기름지게 하기 위하여 온갖 궂은 일을 다하였다.  이렇게 일군 땅에 채소와 버섯과 각종 허브와 과일나무를 심기까지 그리고 에상치 못한 풍성한 수확을 거두기까지 원예 분야에 문외한이었던 피터는 오직 데바와 자연령에 의지하여 그들의 지시와 안내에 따랐음을 기록하고 있다.  농장이 확대되고 핀드혼의 생산물이 타지역에 비해 월등한 품질임을  인정받게 되자 핀드혼 공동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점차 방문객도 증가했다. 
그렇게 핀드혼 사람들은 식물을 재배하면서 배운 것을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데 적용하게 되었다.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핀드혼 농장의 초창기에 신의 인도에 따라  정신없이 농장을 가꾸는데 매달렸던 그들은 신의 분명한 계획과 의도가 자신들에게 내재했었다고 회고한다.   농장이 확대되면서 물리학과 화학을 연구하던 록이 합류하고, 영적이고 비교(秘敎)적인 주제를 다루는 강사이자 교육가로 활동하던 데이비드가 참여했다.
록은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시작하면 되는지 '판'에게 물었고 대답은 이렇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언젠가 신념이 충분히 강해진다면 당신들도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목적만을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일어날 것이다.'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하세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10년 동안 시골의 비교적 고립된 장소에 살라'라고.  자연령들과 통신하는 것은 할 일 없을 때 심심풀이로 하는 게임이 아닙니다.  나는 내 백성들에 대한 인간들의 경멸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익히 보아 왔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태도는 우리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보다도 더 나쁜 행위입니다.  그런 인간들로부터 일찌감치 떠나도록 하세요.  그리고 진실로 내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고 우리를 진정으로 만나보기 원하는 진실한 사람들과 만나도록 하세요."(P.214)
핀드혼의 원예가들은 에일린을 통한 신의 목소리에 의해 인도받고, 도로시를 통해 데바들과 이야기를 하고, 록을 통해 자연령들과, 데이비드를 통해 다른 차원의 실재들과 접촉하였다.
그러나 1974년 이후 록은 이 세상을 떠났고, 데이비드는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원예 전문가 프레드 바턴이 새로 참여함으로써 자연령에 의존하던 초기 핀드혼 농장은 이제 인간의 창조 능력과 자연의 생명력에 의해 새로운 조화의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환경문제의 해결방안에 있어 균형 잡힌 환경의 유지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영적인 관계 즉 ’의식’이라는 측면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자연은 이용하고 착취해야 할 상품이나 지배해야 할 대상은 결코 아닌 것이다.  이 책에서는 자연의 모든 측면을 조정해 나가고 있는 정령이나 지성을 지닌 영적 존재, 자연의 신들을 미개한 문화에서 나오는 신화나 전설로 여기던 우리에게 이 신화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숙한 나는 여전히 초월적인 실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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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기쁨
아베 피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 나무 뿌리로 실내 장식재를 만들어 본 적이 있었다.
먼저 잘생긴 나무 뿌리를 고르는 것이 문제인데,  분재나 화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지만 심근성의 수종은 땅 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려 그 뿌리를 캐기도 어렵지만 모양도 단순하여 장식재로는 적합하지 않다.  반면에 천근성 수종은 그 뿌리가 얕고 세근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장식재로는 그만이다.  이러한 천근성(淺根性) 수종 중에 대표적인 것이 철쭉이다.  철쭉은 대체로 10cm 이내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그 모양새도 마치 비구상의 미술작품처럼 아름답다.  지금은 산의 나무를 채취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지천으로 깔린 철쭉 한두 뿌리를 캐는 것은 아이들 놀이 쯤으로 취급되던 시절이었다.
땅에서 캔 철쭉의 뿌리를 흙을 털어 잘 말리고 다듬어 코팅을 입히면 그보다 멋진 예술품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장식품이 되곤 했었다.
사람의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  어쩌면 마음 뿐 아니라 우리네 삶 전체가 이와 닮지 않았을까?
이것저것 잡다한 것까지 욕심을 부리면 그 뿌리도 얕고 가뭄에 쉬이 말라죽지만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면 그 뿌리도 깊고 어떠한 시련에도 잘 견딜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법정 스님이나 피에르 신부님처럼.
이 책은 제목처럼 오직 복음서에 의지하여 단순한 삶으로 평생을 살다 가신 피에르 신부님의 소신과 일화를 담은 글이다.  1912년에 프랑스 리옹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19세에 모든 유산을 포기하고 카푸친 수도회에 들어가 평생을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함으로써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웠던 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항독 레지스탕스 투사였으며, 전쟁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엠마우스’라는 빈민구호 공동체를 만들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다 2007년 94세로 험난한 삶을 마치신 분.  
나는 인간의 마음이 상처입은 독수리와 같다고 여긴다.  그림자와 빛으로 짜여져, 영웅적인 행동과 지독히도 비겁한 행동 둘 다를 할 수 있는 게 인간의 마음이요, 광대한 지평을 갈망하지만 끊임없이 온갖 장애물에, 대개의 경우 내면적인 장애물에 부딪히는 게 바로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P.38)
상황이 예외적일 경우에는 법 중의 법에 도움을 청할 줄 알아야 한다며 이 ’법 중의 법’이란 인간의 생명을 구하길 요구하며,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길 요구하는 법이라고 주장하시며 정치적이거나 권위적인 교회와 편협한 정부에 맞서고자 하셨던 분.  신부님은 가톨릭 사제로서 여성 사제를 허용하고 남성 사제의 결혼을 허락하라는 주장 등을 펼쳐 보수적인 바티칸으로부터 눈총을 받기도 하였고, 199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정부 정책이 노숙자들에게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거부하였고, 2001년 수상자로 다시 선정되자 받아들였었다.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인류의 빈곤, 실업, 부패, 그리고 인종차별주의로 우리를 위협하는 악에 맞서 가차없는 전쟁을 이끌어나가는 것이야말로 굳건한 평화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부르짖어야 한다.  그 누구도 그것과 무관할 수 없다.  그렇잖은 자는 공범자이다.  굶주린 아이들을 볼 때, 잠잘 곳 없는 가족들을 볼 때, 많은 젊은이들이 적당한 일자리를 찾을 희망이 없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모두 분개해야만 한다.  이 같은 분노와 그 분노가 불러일으키는 자발적 행동들이 없다면 사회적 평화를 위한 어떤 희망이 남아있겠는가?(P.184)
모든 불의와 부조리에는 전쟁과 같은 대결을, 그리고 우리의 동참을 부르짖었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배려와 이해를 요구하셨던 신부님.  그분의 용기와 강직함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힘이 아니었을까?
고통받는 자들에게 충고를 하려 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들에게 멋진 설교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신앙에 대한 설교일지라도 말이다.  다만 애정어리고 걱정어린 몸짓으로 조용히 기도함으로써, 그 고통에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곁에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그런 조심성, 그런 신중함을 갖도록 하자.  자비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경험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다.(P.213 - 214)
남미로 향하는 배가 난파되어 죽을 고비를 맞게 되었을 때 신부님은 ’한평생 자신의 손으로 가난한 자들의 손을 잡고자 애썼을 때, 비로소 죽음의 순간 자신의 다른 쪽 손에서 하느님의 손을 느낄 수 있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는 신부님의 회고는 납덩이처럼 나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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