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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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법정스님의 글은 언제 읽어도 마음이 불편하다.
제 잘못을 이미 알고 있는 아이처럼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로 우리를 일깨우는 스님의 말씀에 괜한 딴지를 걸게 되고, 한바탕 심술이라도 부리고 싶은 마음이다.
알면서도 실천이 어려운 사부대중의 마음을 향해 죽비를 내려치시는 듯 스님의 말씀에는 한치의 태만에도 용서가 없다.  그야말로 서릿발이다.
때로는 남들도 다 그러는데 하는 심정으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으나 스님의 글을 읽노라면 스님의 매서운 눈길이 금방이라도 내리꽂힐 듯싶다.  적당히 눈감아 주고, 보고도 못본체 알고도 모르는 체할 수도 있으련만 그러지 않으니 야속타 싶다가도 금세 마음을 다잡게 한다.  스님의 말씀처럼 시공간을 떠나 보이지 않는 끈이 우리들 서로서로와 이어져 있는 까닭이리라.

"제가 좋아하는 영어 문장에 `One for All, All for One’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하고,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의미로 <화엄경> 법성게에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하고,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진정한 깨달음이고 진리의 세계입니다." (P.154)

며칠 전 나는 내 숙소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중 고등학생들만 따로 모아 `배려'라는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속내는 아이들이 토론을 통하여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짧게는 `논술' 시험에 조금의 보탬이 될테고 나아가서 각자의 삶을 가꾸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한 일인데, 내 의중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결국 글쓰기의 대상은 자신의 마음인데 단 한번도 자세히 관찰한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글을 잘 쓰게 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도 여전히 마음을 관찰하는데는 서툴기 그지없고, 그러므로 겉도는 이야기만 끄적거린다는 것도 부인하고 싶지 않다.
하릴없이 시간만 보낼 수는 없었기에 침묵만 지키는 아이들을 대신해 내가 말을 꺼냈고 나의 질문에 억지춘향식의 대화는 이어졌지만 결국 나의 일방적 일장훈시로 끝이 났다.

"참다운 스승은 말로써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학에서 말로 가르치지만 참다운 스승은 말로써 가르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행동으로 몸소 그렇게 보여줍니다.  일상적인 삶으로써 열어 보입니다.  제자는 그 곁에서 항상 새롭게 배우면서 깨닫습니다.  스승은 제자가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도울 뿐입니다.  스승은 입벌려 가르치지 않습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 내부의 본질이 꽃피어 나도록 도울 뿐입니다." (P.220)

나는 여전히 마음 공부가 미진한 범부에 지나지 않기에 스님의 말씀은 항상 먼 메아리로 들릴 뿐이다.  매일 아침 산으로 오르며 내 자신에게 되묻곤 한다.  내 능력으로 이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일곱 대천사 중 라파엘을 생각한다.  ‘치유하는 빛나는 자’, ‘사람의 영혼을 지키는 자’, ‘생명의 나무 수호자’라는 칭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라파엘은 치유력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나의 세례명은 라파엘이다.  이름에 걸맞지 않게 살아가는 내 삶이 때로는 부담스럽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동장군의 기세가 매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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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머리의 작은 기적 - 내 아이의 미래를 결정짓는 밥상머리 교육의 비밀
SBS 스페셜 제작팀 지음 / 리더스북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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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먹는다는 것’과  ’식구(食口)’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 책이었다.
어찌 보면 일상에서 가장 흔하디 흔한 식사의 행위와 그 환경이 가장 훌륭한 교육의 장(場)이라니!  나는 책을 읽으며 ’아차!’ 싶었다.
채근담에서 이르듯이 진리는 언제나 평범함 속에 있고 쉬운 일일수록 정성을 다해야 함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나는 여건상 하나있는 아들 녀석과 밥을 같이 먹는 경우는 주말 이틀이 고작이다.
이러한 까닭에 밥은커녕 하루에 한번 전화하는 것도 가끔 잊을 때가 있다.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내와 아들의 밥상머리를 든든히 지키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처럼 내가 지키지 못하는 아들의 밥상머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위임한 처지임에도 이 책이 눈에 띈 것은 역설적이게도 ’나도 이만큼 아들의 교육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는 항변의 의미가 컸다.  

어려서부터 아토피를 앓았던 아들 녀석은 우리 부부에게, 특히 아내에게는 커다란 짐이었고 먹거리 하나하나가  스트레스였다.  자주 들르는 소아과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쥐어 주는 사탕도 아들 녀석은 그것이 달고 맛있는 먹거리임을 알지 못할 정도였으니 오죽했을까. 
가끔 아들과 산에 오를 때에도 지나치는 등산객들이 귀엽다며 건네주는 초콜릿을 받아 든 아들 녀석은 선뜻 먹는 법이 없고, 망설이며 내 눈치를 보다가 먹어도 되냐 묻곤 했었다.
지금도 아들 녀석은 자신이 판단하여 안좋다 싶은 것은 스스로 절제하곤 한다.
아내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지금은 건성 피부를 가진 일반인과 비슷할 정도로 좋아졌지만 좋아하는 것을 맘껏 먹지 못했던 아들에게 식사는 그닥 유쾌한 행위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주말에 아들과 식사를 할 때면 쉴 새 없이 종알대는 아들의 목소리가 나는 그저 즐겁다.

이 책은   Part 1 인생 최고의 교실 밥상머리, Part 2 뇌를 키우는 밥상 대화의 모든 것, Part 3 성공적인 가족식사의 7가지 열쇠 - 실전편, Part 4 잃어버린 밥상머리 되찾기 4주 프로젝트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빠들이 그렇겠지만, 온가족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식사하는 것이 아무리 교육 효과가 좋고 아이들의 정신적, 육체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할지라도 정작 그 시간을 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만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막상 모두 모여 식사를 할 때에도 서로간의 대화는 생각처럼 술술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족식사가 아이의 정서 안정과 삶의 만족감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서 안정은 아이들의 성적에도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 전국 중고등학교 100개 학교의 전교 1등 학생들과 중간성적의 학생들을 비교해보면 1등 학생의 주당 가족식사 횟수가 월등히 높다.  1등 학생 중, 가족식사가 없는 경우는 중간성적 학생의 1/4 수준으로 적었고, 주당 6~10회 이상인 경우가 무려 73%에 이르렀다." (P.142)

이러한 결과를 수치로 확인하지 않는다 해도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하루 일과를 궁금해 하고, 고민을 털어놓고, 아이의 미래를 응원하는 일련의 행위들은 가족의 사랑을 몸으로 느끼고, 서로간에 믿음을 공고히 할 것임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현재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실상을 보면 그 아이들이 그런 환경에서도 공부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경제적 여건상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는가 하면 ,외부모 가정의 아이도 있으니 가족식사는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다.  혼자 먹는 밥이 즐거울리 만무하고,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그 아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함이었다.  내가 비록 식사를 같이 할 수는 없지만 식사 중에 나올 수 있는 자연스런 이야기를 그들 부모의 귀를 대신하여 내가 들어줄 수는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아이들은 식사와 더불어 가족의 사랑과 관심을 먹고 자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변한 것이 있다면 아들과의 전화 내용이 그것이다.  그저 하루 일과를 보고받는 형식에서 이제는 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나 궁금한 점을 때로는 묻기도 하고,  정성을 다해 아들의 말을 들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내 아들과 전화를 하듯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의 말을 정성껏 들어주고 싶다.
비록 사랑이 부족하고,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위해 기꺼이 변하겠다 각오를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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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 하버드대학교. 인간성장보고서, 그들은 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했을까?
조지 E. 베일런트 지음, 이덕남 옮김, 이시형 감수 / 프런티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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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한 권을 들고 꼬박 일주일을 읽었다.
보통 책 한 권을 잡으면 하루만에 후다닥 읽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성마른 성격의 나에게는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처럼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진지함이 텍스트 전체를 관통하는 경우도 그리 흔치 않은 듯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낸 성과이니 마땅히 그래야만 하겠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인간의 위대함과 연구진의 인내심에 새삼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인간의 기억과 추측으로 이루어진 심리학 이론이 결코 가볍다거나 오류 투성이라고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믿음과 신뢰의 측면에서 이러한 실증적 연구는 그 대상이 비록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결여한다고 평할지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게 된다.

지금까지 인간의 삶을 조망함에 있어 특정 연령대를 실증적으로 추적하고 관찰하여 어떤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인간의 삶 전반을 전향적으로 추적하고 관찰하는 연구는 막대한 연구비용도 문제려니와 연구원의 인내심과 관찰대상자의 적극적 참여가 관건이다.  저자가 밝히듯 그것은 행운에 가깝다. 
이 책에서 밝히는 관찰 대상자 집단은 1930년대 말에 입학한 하버드대 2학년생 268명(그랜트 연구 대상자 - 하버드졸업생 집단)과 보스턴 이너시티 소년원에 수감되었던 청소년들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전과과 없는 평범한 소년들의 집단(글루엑 연구 대상자 - 이너시티 집단) 그리고 전설적인 천재아 연구인 ’스탠포드 터먼 연구’에서 90명을 선정하였다.

1990년대 말에 크게 유행했던 ’긍정심리학’의 대부로 올라섰던 저자의 연구가 인간의 행복을 결정짓는 총체적 인자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는 그가 제시하는 행복의 조건들( 고통에 대응하는 성숙한 방어기제,교육, 안정된 결혼 생활, 금연, 금주, 운동, 알맞은 체중)만 충족하면 행복한 노년은 저절로 보장되리라는 믿음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 하는 물음에 그 방향성은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행복한 삶에도 공식이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시작되는 기자 조슈아 울프 솅크의 들어가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저자를 평하고 있다.

"베일런트의 담담한 고백을 들으면서 마음에 사무치는 교훈 한 가지가 떠올랐다.  방어기제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방어기제를 관찰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이다.  오직 인내와 유연함만을 통해서만 가시 돋은 갑옷을 좀 더 부드러운 방어막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  생각건대, 바로 여기에 행복한 삶의 핵심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원칙을 따라가거나 문제를 피하는 게 아니라, 인생의 고통과 전제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의 열쇠라는 생각이 든다." (P.28)
  
저자는 행복한 노년의 조건에 덧붙여 미래지향성(미래의 예견과 희망), 감사와 관용,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사랑과 이해), 사람들과 어우러져 함께 일을 해나가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꼽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느꼈던 점은 복잡했다.
한 권의 소설이 아닌 인간의 전 생애를 파노라마를 펼쳐보듯 논픽션으로 접할 수 있었다는 흥분과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상식에 대한 수정(이를테면 행복한 노년과 종교는 그다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과 불행한 청소년기를 보낸 것이 행복한 노년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 등)이 더해졌으며, 인간의 삶이 자연의 섭리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에 배웠던 암석의 순환 과정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퇴적물이 쌓여 단단해지면 안석이 되고 이것이 지구 내부의 열과 압력을 받아 성질이 변하고 다시 마그마로 녹아 지표(地表)로 분출되었다가 풍화와 침식 및 운반을 거쳐 다시 암석으로 변하는 ...
어쩌면 우리가 성인에 이르는 시기는 자신의 목표나 욕심을 향해 단단해지는 과정일 것이다.  이 시기에는 누구나 욕심을 부리는 것이 당연하며 그래야 할 필요성도 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나이가 들고 세파에 씻기면 서서히 부서져 다음 세대를 위한 밑거름으로 잘게 부숴져야만 한다.  부드러운 흙 알갱이와도 같이 부드럽게 변한 모습이 노년의 아름다움 아니겠는가?
다음 세대의 씨앗이 자신을 거름 삼아 깊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마땅하며, 그것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행복한 노년을 맞는 비결이 될 것이다. 
늙어간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끝까지 자신의 것을 움켜 쥐려는 것은 얼마나 추하고 안타까운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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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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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리뷰를 씀에 앞서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인기 블로거도 아니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최소한 나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든 이런 책을 읽으면 전보다 조금은 더 솔직해져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곤 한다.

이야기 "하나"
내게는 올해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아들이 한 명 있다.
곧 생일이 다가오는데 아들 녀석은 받고 싶은 선물을 여즉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일에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까닭에 나는 매일 저녁에 한 번씩 전화 통화를 하게 되는데, 어제는 아들 녀석이 생일 선물을 고르는 기준을 적었다며 들려주었다.  
그것을 굳이 종이에 적은 이유는 성당과 영어 학원을 같이 다니는 여자 친구와 상의하기 위해서란다.  그 기준은 이랬다.  
1.서점에서 살 수 있나?  
2.인터넷에서 살 수 있나?(아들이 불러준 것을 그대로 옮기니 어법에 안 맞는다)  
3.탐험(주일 미사 시간에 아들 녀석은 여자 친구와 성당 주변을 탐험한다)에 얼마나 이익을 주나? 
4.무슨 용도인가? 의 네 가지 기준에 의해 풍력 발전기, 친환경 건전지, 클린 워터, 쏠라 사이언스, 자가 발전기, 감자 시계, 전자석 발전기 중 하나를 고를 예정이란다.  
아들 녀석은 성당을 다닌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다.  나와 아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천주교 신자인지라 더 이른 나이에 세례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종교 문제만큼은 아들의 선택에 맡기고 싶었다.  
아들이 성장하여 다른 종교를 선택하든 아니면 비종교인으로 남든 그것은 아들의 몫이다.  아들은 그렇게 성당을 그저 여자 친구와 놀기 위해 다닌다.
종교가 필요한 나이가 되면 아들은 선물을 고르듯 그 기준을 세워 종교를 선택할 것이라 믿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들의 몫이며 아들의 생각에 달려 있다.

이야기 "둘"
나는 직장이 끝나면 숙소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돈을 받는 것도 아니요, 때로는 내 돈이 들어가는 일인데 나는 왜 그 일을 하려고 작정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되는데, 나는 이 책을 읽고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경쟁과 서열을 부추김으로써 그들의 지적 갈망은 극대화되고 더불어 나에 대한 의존도 강화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나는 힘들이지 않고 권위를 얻는다.  
그럼에도 나는 사회봉사라는 포장으로 나 자신을 미화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윌리엄 S. 버로스의 소설 <네이키드 런치>에서 마약 중개상이 마약 구매자를 중독의 상태로 이끄는 방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마약 구매자에게 마약의 양을 충분히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중독에 이르게 한 후, 그 양을 점차 줄이면 그들의 몸과 마음은 중개상의 소유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득권의 지배 방식도 동일하다.  어려서부터 돈에 대한 의존성을 중독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면 그들의 몸과 마음을 쉽게 지배할 수 있고, 성장과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속셈을 숨길 수 있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돈의 필요성과 돈의 효용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어온 아이들은 마약보다 더 지독한 중독에 빠진다.
결국 그들은 돈을 지배하기보다는 돈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쉽게 종속된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속성도 모른 채 단순히 가난을 피하기 위해 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속성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부를 이룬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돈의 달콤함을 가르치지 않는다.  실체도 모르고 집착하는 행위는 노예와 같은 종속만 있을뿐이지 실제적 지배는 일어나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난한 아이일수록 운동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갖고 싶은 돈이 건강 악화로 쉽게 소비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탓이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운동을 강조하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하는 아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가장 소중한 것, 즉 자신의 건강과 가족간의 사랑, 이웃간의 배려 등이 기반이 되지 않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결코 이룰 수 없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교육이라는 수단은 충실한 자본주의 노예를 양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내 아들에게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려고 노력하면서도 정작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는 그런 노력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이중 잣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아지는 하루였다.
나를 믿고 따르는 아이들에게 나의 위선을 고백할 용기는 없지만 내 양심은 나를 모질게 꾸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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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0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2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약해지지 마 약해지지 마
시바타 도요 지음, 채숙향 옮김 / 지식여행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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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끔 ’우리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어떤 목적이나 지향하는 목표도 없이, 책을 읽고 또 자신의 생각을 가끔씩 끄적거리게 되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의 행동이 항상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반복되는 행동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이유가 따라붙게 되지 않던가.  그래야 납득할 수 있으니까.

아내와 결혼하기 전 연애시절에 아내가 전화를 하여 만나자고 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곤 했었다.  만남이 그저 좋았고, 특별히 재밌는 일로 소일하는 것도 아닌데 시간은 빠르게 흘렀었다.  그럼에도 헤어져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하는 의문과 ’이래도 되나?’하는 반성이 발길을 무겁게 하곤 했었다.  본능과 같은 남녀의 만남도 이럴진대, 그리고 연애의 기간도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그리 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여기에 비하면 읽고 쓰는 행위는 얼마나 길고 밋밋한 일인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시집을 읽은 것은 아주 오랫만의 일이다.
그것도 내 나라 시인의 작품이 아닌 타국 시인의 글을...
내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 마음먹은 것은 저자의 이력 때문이었다.
나이 아흔을 넘겨 시를 쓰기 시작했고, 곧 백 살을 맞는 나이에 시집을 출간했다는 특별한 이력.  이 책을 다 읽으면 왜 글을 쓰는가? 하는 의문의 답을 찾을 것만 같았다.
허리가 아파서 취미였던 일본무용을 할 수 없게 되어 낙담한 저자를 위로하기 위해, 아들이 글쓰기를 권했고 산케이 신문의 <아침의 시>에 입선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는 작가.



90세를 넘긴 뒤
시를 쓰게 되면서 
하루 하루가
보람있습니다
몸은 야위어
홀쭉해졌지만
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고
귀는 바람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고
입은 말이죠
"달변이십니다"
"야무지시네요"
모두가 
칭찬해 줍니다
그 말이 기뻐서
다시 힘낼 수 있어요, 나

글을 쓴다는 것.
그 결과가 비록 잘된 것이든 아니든 글쓰기의 어떤 특별한 효과를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굴레에 씌어 원했든 그렇지 않든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범한 죄를 비로소 인식하고, 자신이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라 자책하며 한없이 추락할 때, 우리를 붙잡아 다시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글쓰기의 경이로움이다.  그것은 단지 행위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다.  신은 원죄의 모순 뒤에 고통을 딛고 일어설 글쓰기의 치유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닌,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1세기를 살아온 한 여인의 생생한 고백에 잔잔한 감동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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