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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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길은 언제나  외길이다.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길이 천 갈래 만 갈래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가능성의 조합이라면 과거로 가는 길은 얼마나 소박하고 단출한가. 젊어서는 잘 가지 않던 그 길을 나이가 들면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걷고 또 걸어서 생각의 문턱이 닰아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반복한다. 조남주의 소설집 <우리가 쓴 것> 역시 과거로 향하는 그 길에서 건져 올린 작품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소설이 과거 시점으로 다루어지고 그것을 소재로 창작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작가도 이제 나이가 들었음이다. 물론 각각의 작품이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나 결은 서로 다를지언정 우리가 쓰고 기록한 것들은 이미 과거로 향하는 그 길의 어디쯤으로 확실한 좌표가 정해졌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살아온 길고 복잡한 시간과 지금 수행하고 있는 여러 역할과 글을 쓰는 사람이자 생활인으로서의 다양한 고민과 각각의 고민에서 시작된 모두 다른 글들이 간단하게 요약되어 함부로 호명되고 있었다. 납작한 것은 뭘까. 납작하게 만든다는 것은 뭘까. 이후로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p.75 '오기' 중에서)

 

<매화나무 아래>에서 남편의 장례가 끝나고 개명을 한 '나'는 큰언니인 금주가 지내는 치매 요양원에 들러 지난 시절을 추억한다. 디귿자 모양의 요양원은 가운데 쑥 들어간 부분에 작은 앞마당이 있고 그곳엔 매화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김말녀에서 동주로 개명한 '나'는 폐암으로 사망한 둘째 언니 은주와 지난 시절의 추억들을 회상하며 큰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길지 않은 시간을 아쉬워한다. 치매로 인해 시간의 경과를 잊은 큰언니. 죽음과 함께 찾아올 명멸의 시간들. '나'도 이제 그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꽃이 눈이고 눈이 꽃이다.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다.'

 

페미니즘 소설을 쓴 후 악플러들의 괴롭힘과 소설의 줄거리가 자신의 경험을 도용했다는 등의 시비에 휘말리면서 이후의 작품을 써나가는 데 대한 고통을 겪는 어느 소설가의 이야기를 쓴 <오기>는 어느 정도 자전적 성격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미스김은 알고 있다>는 병원 홍보대행사에서 특별한 업무나 급여가 정해지지도 않은 채 회사의 전반적인 일을 두루 책임지던 미스 김이 쫓겨난 후 그 후임으로 입사한 '나'는 미스 김의 부재로 인해 곳곳에서 업무상 차질이 빚어지는 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제라도 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짧은 메모를 남긴 채 어느 날 홀연히 가출한 72세의 아버지로 인해 남겨진 가족들이 겪는 그 후의 일상을 다룬 <가출>은 아버지가 지니고 있는 '나'의 카드로 인해 희미한 연계가 이어지는 가운데 대책을 모의하기 위한 모임이 정기적으로 이어짐으로써 가족들의 연대는 이전보다 오히려 더 돈독해진 느낌이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맺어진 인연으로 10년 넘게 사귄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꾸며진 <현남 오빠에게>는 연인이자 후배로서 오랫동안 그에게 길들여진 자신을 뒤돌아보며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는 주인공의 의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돌봐줬던 게 아니라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더라. 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청혼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제라도 깨달았거든, 강현남, 이 개자식아!"  (p.190 '현남 오빠에게' 중에서)

 

남편이 죽은 후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재정립한 채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내용을 그린 <오로라의 밤>은 다른 작품에 비해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이다.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시어머니와 함께 캐나다로 향하는 내용을 담은 이 소설은 고부간의 이야기라기보다 차라리 함께 늙어가는 친구 혹은 자매의 이야기처럼 따스하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준비하는 것, 완전히 절망해 버리지 않는 것, 실낱같은 운이 따라왔을 때 인정하고 감사하고 모두 내 노력인 듯 포장하지 않는 것."  (p.250 '오로라의 밤' 중에서)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삶을 버티게 해 준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도, 누군가에게는 싸워 얻어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p.258 '오로라의 밤' 중에서)

 

30여 년 전 지방의 소도시에서 가정 폭력 상담소를 열었던 엄마와 이를 보고 자랐던 '나'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성폭력 관련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제는 중학생인 딸을 두고 있는 '나'는 주변의 엄마들과 적당히 어울리며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학생들의 성희롱 문제를 고발한 딸로 인해 여성 문제에 대한 세대 간의 시각과 입장 차이를 자각하게 된다는 내용의 <여자아이는 자라서>. 마지막 작품인 <첫사랑 2020>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길어진 비대면 수업과 직업에 따른 가구 소득의 차이로 인한 고민과 갈등을 섬세하게 그렸다. 서연과 승민의 달콤 쌉싸름한 첫사랑을 통해 코로나 정국의 고통과 현실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80세 노인부터 13세 초등학생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다양한 서사를 선보이는 소설집 <우리가 쓴 것>에서 작가는 유독 과거로 향하는 그들의 기억에 천착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우리의 경험 어느 한 귀퉁이에서 찾을 수 있는 보편적인 것들일 수도 있고, 코로나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겪는 이질적인 현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좋든 싫든 자신의 경험을 다독이면서, 자신의 과거와 친해지면서, 천천히 나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쓰지 않은 것들에 작은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이라는 걸 작가는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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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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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소설은 다양한 삶의 풍경을 지면 위에 옮겨놓음으로써 해답이 없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 애쓴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이 읽는 소설을 지도 삼아 자신에게 맞는 존재의 이유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렇게 소설 읽기는 평생 동안 계속된다. 소설이 아니라면 결코 밟아볼 수 없는 타인의 영역을 원할 때면 언제든 무시로 드나들 수도 있으며, 이번 삶에서는 결코 내가 가볼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수많은 다른 삶을 소설 속에서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소설이 있다. 매트 헤이그가 쓴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 노라를 통해 '완벽한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 파혼, 해고, 반려묘 볼츠의 죽음 등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자살을 결심한 노라. 그녀가 눈을 뜬 곳은 초록색 책들로 가득한 자정의 도서관이었다. 그 넓은 도서관을 안내하는 사서는 학창 시절 노라가 학교에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너무도 큰 충격에 빠졌을 때 진심으로 위로해 준 학교 도서관의 사서 엘름 부인이었다. 서가에 가득한 책들은 모두 노라가 살았을지도 모르는 여러 삶들을 담고 있었다. 노라는 그렇게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이미 과거로 변한 후회의 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 다른 선택을 했던 삶을 살아본다. 가장 후회되는 순간을 기록한 <후회의 책>을 펼쳐서.


"이 도서관에 들어온 이후로 지금까지 노라가 선택했던 삶은 사실 모두 다른 사람의 꿈이었다. 결혼해서 펍을 운영하는 것은 댄의 꿈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것은 이지의 꿈이었고, 같이 가지 못한 후회는 자신에 대한 슬픔이라기보다 단짝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올림픽 수영 메달리스트가 되는 것은 아빠의 꿈이었다. 노라가 어릴 때 북극에 관심이 있었고, 빙하학자가 되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꿈마저도 학교 도서관에서 엘름 부인과 나눈 대화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라비린스는 늘 오빠의 꿈이었다."  (p.276)


노라는 그렇게 이번 삶에서 선택하지 않았던 다양한 후회의 순간들과 만나고 다른 선택의 삶을 살아본다. 남자친구였던 댄과 결혼하여 시골에서 펍을 운영하며 살기도 하고, 절친이었던 이지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 모험적인 삶을 살아보기도 하고, 올림픽 수영 메달리스트가 되어 순회강연을 하며 화려한 삶을 살아보기도 하고, 빙하학자가 되어 북극을 탐험하기도 하고, 결성했던 음악 밴드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삶을 살아보기도 하고, 동물 보호센터에서 일하며 틈틈이 포도밭을 돌보는 편안한 삶을 살기도 한다.


"겉보기에는 아주 흥미진진하거나 가치 있어 보이는 삶조차 결국에는 그런 기분이 들지 모른다. 실망과 단조로움과 마음의 상처와 경쟁만 한가득이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경험은 순간에 끝난다. 어쩌면 그것만이 중요한 의미인지 모른다. 세상이 세상이 되어 지켜보는 것."  (p.200)


그러나 노라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고 후회했던 다른 삶에 안주하지 못하고 번번이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로 돌아오곤 한다. 모든 게 완벽할 것 같았던 삶도 직접 살아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삶은 이러해서, 저 삶은 저러해서 계속 살아갈 수 없었다.


"한 삶에만 갇혀 있는 동안에는 슬픔이나 비극 혹은 실패나 두려움이 그 삶을 산 결과라고 생각하기 쉽죠. 그런 것들은 단순히 삶의 부산물일 뿐인데 우리는 그게 특정한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슬픔이 없는 삶은 없다는 걸 이해하면 사는 게 훨씬 쉬워질 거예요. 슬픔은 본질적으로 행복의 일부라는 사실도요."  (p.258)


노라가 마지막으로 돌아왔을 때 엘름 부인은 말한다. 그녀가 여기 돌아온 건 죽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이제 노라의 다양한 삶이 산재한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노라는 무너지는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로부터 필사적으로 탈출한다. 노라는 엘름 부인으로부터 받은 만년필과 그녀의 미래를 기록할 백지의 책 한 권을 들고 죽음과 삶의 중간 지점인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통과한다. 그녀는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 한 존재만 느끼면 된다. 모든 것이 되기 위해 모든 일을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무한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늘 다양한 가능성의 미래를 품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하자. 가끔 서 있는 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자. 어느 세상에 서 있든지 간에 머리 위 하늘은 끝없이 펼쳐져 있을 테니까."  (p.392)


모든 삶에는 부산물처럼 온갖 후회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일말의 후회도 없는 완벽한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삶은 그렇게 불완전한 선택의 연속이자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결합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뒤뚱뒤뚱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알 수 없는 게 우리의 삶이기에 한번 최선을 다해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매번 중심을 잃고 뒤뚱뒤뚱 불안해보일 수는 있지만 금세 자리를 잡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미래를 향해 꿋꿋이 나아갈 수 있다. '할 수 있어. 잘될 거야.' 마음속으로 다독이면서... 삶을 살아간다는 건 자신의 미래를 몸으로 읽어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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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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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문장이나 텍스트를 통해 인물이 처한 현재의 상황이나 배경이 되는 장소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자신의 글을 끝없이 다듬고, 어떤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부으며, 자신보다 훌륭한 다른 작가의 글을 끝없이 읽고 본받으려 한다. 그것이 비단 작가들에게만 통용되는 삶의 방식은 아닐 테지만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며 주변부 인간 군상의 삶을 예리한 시선으로 그려냈던 윌리엄 트레버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역사 교사로서, 미술 교사이자 조각가로 활동했던 작가의 이력에 대해 곰곰 생각하곤 한다. "소설가는 자신의 생활이라는 집을 부수어 그 돌로 소설이라는 집을 짓는다."라고 했던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작가의 경험과 삶에 대한 진지한 열정이 '윌리엄 트레버'라는 탁월한 작가로 탄생시켰던 게 아닐까.

 

윌리엄 트레버의 대표작이기도 한 <펠리시아의 여정>은 아일랜드 출신의 어린 소녀 펠리시아와 공장 구내식당의 매니저인 중년의 힐디치를 소설의 중심축에 배치함으로써 독자들의 마음이 약자인 펠리시아에게 극단적으로 기울도록 한다. 이와 같은 단순한 구조는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측면에서도, 약자에게 이끌리는 인간의 동정심이라는 측면에서도 유용하지만 작가는 이에 그치지 않고 펠리시아의 순수함이 만들어내는 여러 차례의 위기상황을 통해 그들을 둘러싼 주변부의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선한 본성이 인간 본연의 모습임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들은 펠리시아가 처한 안타까운 상황으로 인해 극도의 긴장감과 함께 당장이라도 책 속으로 들어가 펠리시아의 손을 잡고 달아나고 싶은 위태위태한 순간들을 여러 번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이제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안다. 가을날 결혼식 신부 들러리도 아니고 자동차 뒷좌석에서 담요를 뒤집어썼던 아이도 아니다. 한때 그녀의 것이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르며 이제 어리석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고, 상실을 경험한 예전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 이끈 사람이기에 소중하다."  (p.312)

 

오빠 에이든의 결혼식 날 펠리시아는 우연히 마주친 조니와 사랑에 빠진다. 영국의 한 농기계 공장에서 일을 한다는 조니. 펠리시아의 짧았던 연애는 임신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결과로 남는다. 연락처도 없이 떠나버린 조니. 펠리시아는 남자친구 조니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수녀원의 정원사로 일하는 아버지와 채석장에 다니는 오빠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백 세에 가까운 증조할머니를 돌봐왔던 펠리시아는 자신이 떠남으로써 집안사람들이 곤경에 처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직 조니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걱정을 잊는다.

 

"만일 지금 돌아간다면 그녀는 또다시 그 침실에서 깨어날 것이다. 같은 절망 속에서 또다시 찾아오는 새벽, 여섯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눈을 뜨는 고단함, 또다른 하루의 시작. 화요일이면 다시 그 비좁은 계단을 닦아야 하고, 주말에는 노인의 침대 시트를 갈아야 한다. 만일 지금 돌아간다면 아버지는 비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오빠들은 복수를 벼를 것이다."  (p.73)

 

그러나 펠리시아의 여정은 녹록지 않았다. 조니의 정확한 주소도 모르는 데다 아일랜드와 억양이 다른 까닭에 사람들과의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낯선 나라의 산업 단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펠리시아가 돌파구도 없는 난관에 봉착했을 때, 어리숙한 시골 소녀를 지켜보는 어둠의 눈이 있었다. 공장 구내식당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던 힐디치. 50대의 중년 남성인 그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인상의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힐디치의 반복되는 호의에 그에 대한 경계심마저 서서히 무너지고, 결국 힐디치는 펠리시아의 돈을 훔쳐 그녀를 더욱 곤경에 빠지게 한다. 말하자면 그는 펠리시아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찾아오도록 만든 셈이었다. 그녀가 찾던 조니의 행방도 그가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모른 채...

 

"힐디치 씨는 잠시 이 모든 것이 실수나 오해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무리 상상을 해봐도 그가 우정을 맺었던 그 아일랜드 여자가 협잡꾼이라 불릴 리가 없다. 그가 알던 다른 여자들은 그런 식으로 묘사될 수 있을지 몰라도 가장 최근의 이 여자만큼은 절대 그렇게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 여자가 맞다. 그가 도와준, 무진장 애를 써가며 도와준 여자. 그 여자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고, 보아하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한 모양이다."  (p.246)

 

한편 힐디치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성폭력을 당하고, 그 어머니도 자신이 만났던 수많은 남성들로부터 버림받았던 과거를 갖고 있던 까닭에 힐디치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만나는 여인으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런 까닭에 빚을 대신 갚아주기도 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지만 여자들은 한결같이 그를 버리고 떠나겠다고 했다. 그는 여인들을 살해하고 만났던 여성들의 이름을 끊임없이 읊조리면서 그녀들을 추억했다. 말하자면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다

 

"그런 사색이, 한때는 생경했던 그런 생각이 펠리시아의 하루를 채운다. 그녀는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굳이 의미를 찾지 않고, 목적 없는 여정에서도 더이상 의미를 찾지 않으며, 시간과 사람이 뒤죽박죽 섞인 가운데서도 어떤 규칙을 찾지 않는다. 그럼에도 생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p.320)

 

펠리시아는 비록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도, 자신의 아이를 지키지도 못했지만 길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작가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한치 앞의 미래도 알 수 없는 제2, 제3의 펠리시아임을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비록 우연처럼 살인자를 만날 수도 있고, 또다른 우연처럼 조니와 같은 사랑스런 연인을 만날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주소도 모른 채 헤어질 수 있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인간 본성의 선한 모습으로 다가와 위험에 처한 우리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 수 있다는 걸 믿기에 거리낌없이 미래를 향해 긴 여정을 떠날 수 있는 게 아닐까. 펠리시아의 여정은 현재를 사는 우리의 본 모습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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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숨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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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에는 매듭이 지어지는 어떤 순간들이 있다.소설가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경험을 오롯이 자신의 소설 속에 담는,이를테면 자전 소설을 쓰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자전 소설 ‘문래‘가 실린 <환한 숨>의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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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
김종옥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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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년에는..." 또는 "내가 소싯적에는..."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의 뒤끝은 언제나 씁쓸하다. 때로는 허무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이야기인 즉 자신의 과거에 비해 지금의 현실은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딴에는 그런 생각도 든다. 우리의 기억이라는 게 지금의 형편에 따라 화려하게도, 또는 초라하게도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예컨대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는 한 사람이 자신의 초라했던 과거를 대중에게 솔직하게 말해준다고 해서 그 기억이 더욱 초라하게 변하는 것도 아니요, 현재의 위상이 새롭게 알려진 그의 과거로 인해 깎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가 들려준 자신의 초라했던 기억은 현재의 위상으로 인해 다소 낭만적인 어떤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 반면에 지금은 쇠락한 한 사람이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 기억을 들려준다고 해서 현재의 위상이 조금 높아지는 것도 아니요, 그가 들려준 화려한 기억들이 곧이곧대로 믿기지도 않을뿐더러 화려함이 더욱 증폭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과거는 반쯤 차감된 채 대중에게 전달되곤 한다.

 

김종옥의 소설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에는 실업자로 전락한 40대 남자가 등장한다. 비록 지금은 보잘것없는 그이지만 그도 한때는 잘 나가던 때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때의 기억들은 대개 과천과 얽혀 있었고, 지독히도 길치였던 그였지만 그는 단순히 지리상의 길만 못 찾았던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행로를 분간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길을 찾는 데 영 젬병'이었다는 뜻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중의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여자는 내가 서른넷이었을 때 만나서, 서른다섯에 헤어졌다. 그러니까 그게 오 년 전의 일이다. 나는 그 오 년이 마치 육 개월처럼 느껴진다. 오 년 전에는 이런 오 년 후의 나를, 정확히 말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나는 그녀가 내 마지막 여자가 될 줄은 몰랐다. 당시 나는 막 직장을 그만두고 나왔었는데, 그 후로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와 같은 번듯한 직장을 다시 구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도 몰랐다. 나이가 마흔인데, 직장도 없고, 여자도 없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요즘 나는 완전히 좆 됐다." (p.60)

 

 

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자신의 나이를 속이며 '나'와 만났던 한 여인을 떠올린다. '나'와 만나면서도 유부남과 양다리를 걸쳤던 그 여인은 결국 유부남과의 위험한 사랑을 선택하면서 '나'와 헤어진다. 그녀가 '나'를 불러냈던 곳도 과천이었다. 길눈이 어두웠던 '나'는 그녀가 일러주는 곳을 간신히 찾아갔었고,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지금은 그곳이 과천이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그녀와 헤어진 후 직장마저 그만두었던 '나'는 아버지 지인의 소개로 대형 유통업체에 취직한다. 그곳에서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여자를 만나게 된다. 건강하고 활발했던 그녀 역시 어떤 오해로 인해 헤어지게 된다. 유부남과 사귀었던 그 여자와 헤어진 지 사, 오 년쯤 지난 후의 어느 날 그녀로부터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나는 여전히 여기 그대로 있는데...'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나'는 그녀에게 '여전히 거기에 그대로 있으면 안 되잖아'라는 답을 보낸다.

 

"하지만 당신들도 알다시피 어떤 판단을 내리기엔 인생은 너무나 복잡하고, 결정의 시간은 너무 부족하다. 아니, 대체 인생이란 게, 우리가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우리 앞에 놓여 있기라도 한 걸까? 그게 보이기라도 하나? 우리는 그저 어떤 판단, 마치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판단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p.75~p.76)

 

 

헤어진 여자에 대한 회상에서 비롯된 '나'의 상념은 과천과 연결된 여러 갈래의 추억들로 이어진다. 제대 후 만났던 여자에서부터 중학생 때 같은 반 친구였던 부잣집 아들에 이르기까지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당동에서 남태령 고개를 넘으면 경마장과 국립 현대 미술관, 서울랜드와 동물원 등이 있는 과천.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과천과 얽힌 추억 한두 개쯤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으랴. 작가가 굳이 과천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그만큼 흔한 기억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귀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이별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결국에는 헤어지게 되어 있다. 어쩌면 그건 그녀가 나를 두 번이나 엿 먹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 남자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p.72)

 

 

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헤어짐의 원인이 서로에게 한 일 때문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일어난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지 않은 일을 후회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은 너무 많아서 하지 않은 일이 뭔지 모른다. '나'는 그것을 생각할 때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올려다볼 때처럼 안도감을 느낀다고 했다. 길이란 게 숫제 없는 까닭에 별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있을 수 없으므로.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확실히 아는 까닭에 길을 잃거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누구나 처음인 이 길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후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좋다. 자책하거나 지나친 후회를 하면서 괜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암담한 현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과거에만 머물러서도 안 될 것이다. 2021년 한 해도 벌써 반나마 흘러가고 있다. 문득 하일지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이 생각나기도 하고, 문성근과 강수연이 출연했던 영화 '경마장 가는 길'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루빨리 코로나가 사라지고 예전처럼 청명한 가을이 찾아오면 과천 서울랜드로 향하는 그 고즈넉한 길을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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