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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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길은 언제나  외길이다.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길이 천 갈래 만 갈래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가능성의 조합이라면 과거로 가는 길은 얼마나 소박하고 단출한가. 젊어서는 잘 가지 않던 그 길을 나이가 들면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걷고 또 걸어서 생각의 문턱이 닰아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반복한다. 조남주의 소설집 <우리가 쓴 것> 역시 과거로 향하는 그 길에서 건져 올린 작품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소설이 과거 시점으로 다루어지고 그것을 소재로 창작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작가도 이제 나이가 들었음이다. 물론 각각의 작품이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나 결은 서로 다를지언정 우리가 쓰고 기록한 것들은 이미 과거로 향하는 그 길의 어디쯤으로 확실한 좌표가 정해졌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살아온 길고 복잡한 시간과 지금 수행하고 있는 여러 역할과 글을 쓰는 사람이자 생활인으로서의 다양한 고민과 각각의 고민에서 시작된 모두 다른 글들이 간단하게 요약되어 함부로 호명되고 있었다. 납작한 것은 뭘까. 납작하게 만든다는 것은 뭘까. 이후로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p.75 '오기' 중에서)

 

<매화나무 아래>에서 남편의 장례가 끝나고 개명을 한 '나'는 큰언니인 금주가 지내는 치매 요양원에 들러 지난 시절을 추억한다. 디귿자 모양의 요양원은 가운데 쑥 들어간 부분에 작은 앞마당이 있고 그곳엔 매화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김말녀에서 동주로 개명한 '나'는 폐암으로 사망한 둘째 언니 은주와 지난 시절의 추억들을 회상하며 큰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길지 않은 시간을 아쉬워한다. 치매로 인해 시간의 경과를 잊은 큰언니. 죽음과 함께 찾아올 명멸의 시간들. '나'도 이제 그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꽃이 눈이고 눈이 꽃이다.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다.'

 

페미니즘 소설을 쓴 후 악플러들의 괴롭힘과 소설의 줄거리가 자신의 경험을 도용했다는 등의 시비에 휘말리면서 이후의 작품을 써나가는 데 대한 고통을 겪는 어느 소설가의 이야기를 쓴 <오기>는 어느 정도 자전적 성격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미스김은 알고 있다>는 병원 홍보대행사에서 특별한 업무나 급여가 정해지지도 않은 채 회사의 전반적인 일을 두루 책임지던 미스 김이 쫓겨난 후 그 후임으로 입사한 '나'는 미스 김의 부재로 인해 곳곳에서 업무상 차질이 빚어지는 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제라도 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짧은 메모를 남긴 채 어느 날 홀연히 가출한 72세의 아버지로 인해 남겨진 가족들이 겪는 그 후의 일상을 다룬 <가출>은 아버지가 지니고 있는 '나'의 카드로 인해 희미한 연계가 이어지는 가운데 대책을 모의하기 위한 모임이 정기적으로 이어짐으로써 가족들의 연대는 이전보다 오히려 더 돈독해진 느낌이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맺어진 인연으로 10년 넘게 사귄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꾸며진 <현남 오빠에게>는 연인이자 후배로서 오랫동안 그에게 길들여진 자신을 뒤돌아보며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는 주인공의 의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돌봐줬던 게 아니라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더라. 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청혼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제라도 깨달았거든, 강현남, 이 개자식아!"  (p.190 '현남 오빠에게' 중에서)

 

남편이 죽은 후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재정립한 채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내용을 그린 <오로라의 밤>은 다른 작품에 비해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이다.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시어머니와 함께 캐나다로 향하는 내용을 담은 이 소설은 고부간의 이야기라기보다 차라리 함께 늙어가는 친구 혹은 자매의 이야기처럼 따스하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준비하는 것, 완전히 절망해 버리지 않는 것, 실낱같은 운이 따라왔을 때 인정하고 감사하고 모두 내 노력인 듯 포장하지 않는 것."  (p.250 '오로라의 밤' 중에서)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삶을 버티게 해 준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도, 누군가에게는 싸워 얻어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p.258 '오로라의 밤' 중에서)

 

30여 년 전 지방의 소도시에서 가정 폭력 상담소를 열었던 엄마와 이를 보고 자랐던 '나'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성폭력 관련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제는 중학생인 딸을 두고 있는 '나'는 주변의 엄마들과 적당히 어울리며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학생들의 성희롱 문제를 고발한 딸로 인해 여성 문제에 대한 세대 간의 시각과 입장 차이를 자각하게 된다는 내용의 <여자아이는 자라서>. 마지막 작품인 <첫사랑 2020>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길어진 비대면 수업과 직업에 따른 가구 소득의 차이로 인한 고민과 갈등을 섬세하게 그렸다. 서연과 승민의 달콤 쌉싸름한 첫사랑을 통해 코로나 정국의 고통과 현실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80세 노인부터 13세 초등학생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다양한 서사를 선보이는 소설집 <우리가 쓴 것>에서 작가는 유독 과거로 향하는 그들의 기억에 천착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우리의 경험 어느 한 귀퉁이에서 찾을 수 있는 보편적인 것들일 수도 있고, 코로나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겪는 이질적인 현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좋든 싫든 자신의 경험을 다독이면서, 자신의 과거와 친해지면서, 천천히 나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쓰지 않은 것들에 작은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이라는 걸 작가는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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