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
김종옥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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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년에는..." 또는 "내가 소싯적에는..."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의 뒤끝은 언제나 씁쓸하다. 때로는 허무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이야기인 즉 자신의 과거에 비해 지금의 현실은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딴에는 그런 생각도 든다. 우리의 기억이라는 게 지금의 형편에 따라 화려하게도, 또는 초라하게도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예컨대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는 한 사람이 자신의 초라했던 과거를 대중에게 솔직하게 말해준다고 해서 그 기억이 더욱 초라하게 변하는 것도 아니요, 현재의 위상이 새롭게 알려진 그의 과거로 인해 깎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가 들려준 자신의 초라했던 기억은 현재의 위상으로 인해 다소 낭만적인 어떤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 반면에 지금은 쇠락한 한 사람이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 기억을 들려준다고 해서 현재의 위상이 조금 높아지는 것도 아니요, 그가 들려준 화려한 기억들이 곧이곧대로 믿기지도 않을뿐더러 화려함이 더욱 증폭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과거는 반쯤 차감된 채 대중에게 전달되곤 한다.

 

김종옥의 소설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에는 실업자로 전락한 40대 남자가 등장한다. 비록 지금은 보잘것없는 그이지만 그도 한때는 잘 나가던 때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때의 기억들은 대개 과천과 얽혀 있었고, 지독히도 길치였던 그였지만 그는 단순히 지리상의 길만 못 찾았던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행로를 분간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길을 찾는 데 영 젬병'이었다는 뜻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중의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여자는 내가 서른넷이었을 때 만나서, 서른다섯에 헤어졌다. 그러니까 그게 오 년 전의 일이다. 나는 그 오 년이 마치 육 개월처럼 느껴진다. 오 년 전에는 이런 오 년 후의 나를, 정확히 말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나는 그녀가 내 마지막 여자가 될 줄은 몰랐다. 당시 나는 막 직장을 그만두고 나왔었는데, 그 후로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와 같은 번듯한 직장을 다시 구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도 몰랐다. 나이가 마흔인데, 직장도 없고, 여자도 없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요즘 나는 완전히 좆 됐다." (p.60)

 

 

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자신의 나이를 속이며 '나'와 만났던 한 여인을 떠올린다. '나'와 만나면서도 유부남과 양다리를 걸쳤던 그 여인은 결국 유부남과의 위험한 사랑을 선택하면서 '나'와 헤어진다. 그녀가 '나'를 불러냈던 곳도 과천이었다. 길눈이 어두웠던 '나'는 그녀가 일러주는 곳을 간신히 찾아갔었고,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지금은 그곳이 과천이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그녀와 헤어진 후 직장마저 그만두었던 '나'는 아버지 지인의 소개로 대형 유통업체에 취직한다. 그곳에서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여자를 만나게 된다. 건강하고 활발했던 그녀 역시 어떤 오해로 인해 헤어지게 된다. 유부남과 사귀었던 그 여자와 헤어진 지 사, 오 년쯤 지난 후의 어느 날 그녀로부터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나는 여전히 여기 그대로 있는데...'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나'는 그녀에게 '여전히 거기에 그대로 있으면 안 되잖아'라는 답을 보낸다.

 

"하지만 당신들도 알다시피 어떤 판단을 내리기엔 인생은 너무나 복잡하고, 결정의 시간은 너무 부족하다. 아니, 대체 인생이란 게, 우리가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우리 앞에 놓여 있기라도 한 걸까? 그게 보이기라도 하나? 우리는 그저 어떤 판단, 마치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판단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p.75~p.76)

 

 

헤어진 여자에 대한 회상에서 비롯된 '나'의 상념은 과천과 연결된 여러 갈래의 추억들로 이어진다. 제대 후 만났던 여자에서부터 중학생 때 같은 반 친구였던 부잣집 아들에 이르기까지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당동에서 남태령 고개를 넘으면 경마장과 국립 현대 미술관, 서울랜드와 동물원 등이 있는 과천.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과천과 얽힌 추억 한두 개쯤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으랴. 작가가 굳이 과천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그만큼 흔한 기억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귀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이별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결국에는 헤어지게 되어 있다. 어쩌면 그건 그녀가 나를 두 번이나 엿 먹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 남자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p.72)

 

 

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헤어짐의 원인이 서로에게 한 일 때문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일어난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지 않은 일을 후회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은 너무 많아서 하지 않은 일이 뭔지 모른다. '나'는 그것을 생각할 때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올려다볼 때처럼 안도감을 느낀다고 했다. 길이란 게 숫제 없는 까닭에 별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있을 수 없으므로.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확실히 아는 까닭에 길을 잃거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누구나 처음인 이 길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후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좋다. 자책하거나 지나친 후회를 하면서 괜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암담한 현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과거에만 머물러서도 안 될 것이다. 2021년 한 해도 벌써 반나마 흘러가고 있다. 문득 하일지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이 생각나기도 하고, 문성근과 강수연이 출연했던 영화 '경마장 가는 길'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루빨리 코로나가 사라지고 예전처럼 청명한 가을이 찾아오면 과천 서울랜드로 향하는 그 고즈넉한 길을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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