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소원이 있다면


2023년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1주일여가 지나고 있다. 시간이란 게 참으로 묘한 구석이 있어서 연초에는 아주 더디게 흐르는 듯한 느낌을 주다가도 1월 한 달이 가고 나면 '벌써?' 하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물론 나와 같은 도시내기들에게 1월 이후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 줄도 모른 채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루하루가 흐르다가, 12월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 벌써 1년이 흘렀네!' 하는 혼잣말과 함께 시간의 노예가 된 듯한 멧돼지들의 탄식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새해. 멧돼지들에게 1년 소망이라는 게 있을 리 없지만 리더 멧돼지가 되고 보니 하고 싶은 일들이 자고 나면 하나씩 늘어나는 통에 멧돼지들의 소망이란 소망은 죄다 나에게 쏠린 듯하다.


리더 멧돼지가 된 후 처음으로 맞는 새해이다 보니 설레는 마음이 절로 드는 게 사실이다. 시도 때도 없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지고 중요하지도 않은 술약속을 매일 잡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토록 원하던 술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매일 마실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천국이 아닐 수 없다. 마치 꿈만 같아서 똘마니 멧돼지에게 내 엉덩이를 한 번 물어보라고 시킬 때가 더러 있다. 북쪽의 정은 멧돼지가 무인기를 보내던 날도 나는 상민 멧돼지를 불러 밤새 부어라 마셔라 술판을 벌였었다. 내가 이렇게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나를 놀리고 구박하던 주변의 또래 친구들과 엄하기만 하던 아버지 멧돼지에 대한 반감으로 시작된 술판은 이제 나를 과시하고 똘마니 멧돼지들을 짓밟는 장으로 변질되었다. 나는 리더 멧돼지가 된 후 술자리에서 단 한 번도 존댓말을 쓴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난하거나 힐책하는 멧돼지를 본 적이 없다. 모두가 다 굽실댈 뿐이다. 그러니 술맛이 절로 날 수밖에.


술을 원하는 만큼 맘껏 마시는 것 말고 또 다른 소망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늙다리 멧돼지들, 재물도 없고 나라의 도움만 바라는 무용지물의 늙다리 멧돼지들을 재임 중에 한 마리라도 더 제거하는 것이다. 그들만큼 눈에 거슬리는 것도 없다. 나는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의료 지원을 대폭 줄이라고 지시했다. 병에 걸린 늙은 멧돼지들이 치료를 포기함으로써 국가의 재정도 튼튼히 하고, 보기 싫은 늙다리 멧돼지들을 한 마리라도 덜 볼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닌가. 게다가 나는 원자력 안전을 느슨하게 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원전 주변의 늙은 멧돼지들을 일거에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서울에서는 발암물질 범벅인 용산공원을 적극 개방함으로써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늙다리 멧돼지들을 그곳에 유인하여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나의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된다면 무용지물의 늙다리 멧돼지들을 힘들이지 않고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예전에 나는 아버지 멧돼지로부터 멧돼지들이 부자 멧돼지에 이렇게 반응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자신보다 10배 정도의 부자는 경멸하고, 100배 정도의 부자는 가까운 사람으로 삼으려 하고, 1000배 정도의 부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그의 노복이 되겠다고 자청한다고 말이다. 사실 일반적인 멧돼지들의 꿈은 많은 새끼를 낳아 자신의 DNA를 영원히 남기는 것이지만 나나 아내 멧돼지는 새끼를 낳을 수 없는 처지이고 보니 다산의 욕망보다는 부귀의 욕망이 더 크다고 하겠다. 그런 까닭에 아내 멧돼지와 그의 일가는 불법과 탈법을 넘나들며 부를 축적했고 나는 이를 비호하며 음으로 양으로 도와왔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리더 멧돼지가 된 지금, 가난한 멧돼지들보다는 부자 멧돼지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약간의 콩고물을 기대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가난한 멧돼지들을 백날 도와봐야 오히려 짐만 될 뿐 나에게 돌아올 이득은 전혀 없으니 그들은 쳐다보지도 말라는 게 아내 멧돼지가 내게 가르쳐준 철칙이다. 부자 멧돼지로서 노복이 되겠다고 자청하는 많은 멧돼지들을 거느리는 건 퇴임 후에 있을 나의 소망이다.


부자 멧돼지들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당연하게도 일하는 멧돼지들의 노동시간을 늘리고, 국가가 관리하는 사업 중 알짜배기 사업을 그들에게 양도하고, 저항하는 멧돼지들을 일망타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새해에는 그것에 집중할 계획이다. 그나저나 나와 나의 똘마니들에게 대항하는 야생 멧돼지들의 수장을 어서 빨리 감옥에 보내야 할 텐데 그게 잘 안 되고 있으니 나의 스승 천공 멧돼지를 찾아뵙고 도움을 청해야 할까 보다. 새해 운세도 좀 볼 겸...


*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히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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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두려움에 대하여


우리 멧돼지들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다. 멧돼지들은 대개 머리도 나쁘고 겁이 없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짐승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른 짐승에 비해 영민한 편이며 무척이나 겁이 많아 때로는 '저게 미쳤나?' 싶을 정도로 무모한 데가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들을 오해하여 사람들은 멧돼지 하면 먼저 머리가 나쁜 동물, 또는 앞뒤 가리지 않는 무식한 동물을 떠올리곤 하였던 것이다.


어제도 나는 얼마나 겁이 났던지 똘마니들이 마련해준 안가에서 딱히 할 일도 없이 하루를 소일하느라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난데없이 북한의 정은 멧돼지가 무인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게 어디 예사로 넘길 일인가. 여차하면 리더 멧돼지인 나의 목숨이 날아갈 판 아니던가. 가뜩이나 예민한 시국에 무인기라니... 나는 하루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오금이 저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사정을 모르는 일반 멧돼지들은 국가 안전 보장 회의도 열지 않고 도대체 뭘 했느냐?고 비난하지만 생각해 보라. 여차하면 목숨이 날아갈 판인데 회의가 뭔 필요며, 목숨이 두 개도 아닌데 남들이야 죽든 말든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할 일 아니던가. 게다가 정은 멧돼지의 일차 목표는 누가 뭐래도 리더 멧돼지인 내가 아닌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는 리더가 된 직후부터 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퇴임 후에 있을 나의 안위가 걱정이 돼서다. 나를 이어 리더가 될 멧돼지가 리더에서 물러난 나를 감옥에 보내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자다가도 문득문득 잠이 깨는 것이다. 리더에서 물러나기 전에 나를 감옥에 보낼 만한 멧돼지란 멧돼지는 모조리 손을 써 놓을 작정이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멧돼지가 리더라도 되는 날이면 나는 꼼짝없이 감옥에 갈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정말 가능성은 없지만 뒷골목의 내 똘마니였던 은정 멧돼지가 리더로 뿝힌다면 나는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 되는 것이다. 멧돼지 속담에 '설마가 멧돼지 잡는다'고 하지 않던가. 이런 불안과 공포는 나뿐만 아니라 아내 멧돼지도 함께 느끼고 있다. 퇴임 후 우리는 나란히 감옥으로 직행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나는 지금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내 편이 될 만한 멧돼지들이란 멧돼지들은 모두 풀어줄 작정이다. 나는 오늘도 전임 리더 멧돼지를 비롯한 온갖 비리에 연루된 멧돼지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내가 퇴임 후 어려움에 처한다면 그들 역시 나를 위해 함께 싸워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 역시 내후년에 있을 총선거에서 나와 반대편에 있는 멧돼지들이 대거 당선되어 나를 탄핵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예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발생하는 셈이다. 요즘 내가 교회를 자주 찾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사람들이 믿는 신 중에서 가장 세다는 하느님에게 제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아내 멧돼지를 내 대신 감옥에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뒷골목 대장이었던 내가 가오가 있지 그런 최후를 맞는다면 쪽팔린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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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7 2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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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30 17: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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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는 게 뭔지...


가뜩이나 살얼음판의 아슬아슬한 정치판인데 날씨마저 꽁꽁 얼어붙었다. 리더 멧돼지가 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시시각각 전해지는 국내외 뉴스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나처럼 게으르고 천하태평인 멧돼지도 리더라는 자리는 특별할 수밖에 없는가 보다. 어떤 일처리를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좋은 소식이 전해지는 바람에 지지율이 크게 오르기도 하고 반대로 크게 떨어지기도 하니 뉴스의 힘이 무섭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나에 대해 나쁜 소식을 전하는 언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를 죽여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한 언론사는 리더 전용 수레에 타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렸고, 또 다른 언론사는 회사를 통째로 나에게 우호적인 재벌 멧돼지들에게 팔아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모든 언론사는 나를 찬양하는 뉴스만 매일 내보낼 테니 그렇게 되는 날 비로소 술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잠도 편히 잘 수 있을 게 아닌가.


한 해를 보내는 기념으로 전임 리더 멧돼지를 풀어주기로 했다. 사실 그는 리더로 재임하던 시절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만만한 자들 여럿으로부터 삥을 뜯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혔던 것인데, 마음 같아서는 한 10년쯤 더 가둬두고 싶지만 나를 보좌하는 똘마니 멧돼지들 중 상당수가 전임 리더 멧돼지의 심복이었던 까닭에 그들의 눈치를 전혀 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도 물론 아내 멧돼지와 장모 멧돼지가 나를 대신하여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으니 전임 리더 멧돼지를 딱히 비난할 입장은 못되지만 그를 풀어줌으로써 나라 전체의 일반 멧돼지들로부터 비난이란 비난은 내가 다 받아야 할 처지이니 그게 좀 번거롭다는 것이다. 전임 리더 멧돼지 역시 나의 선처에 감읍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똘마니 멧돼지들과의 회의에서 세계 최강이라는 '날리면' 멧돼지의 말을 몇 마디 섞어 썼다가 괜한 시비에 휘말렸다. 나는 사실 '날리면'이 쓰는 말을 뜻도 모르면서 그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했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 큰 뉴스거리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바로 레귤레이션이다. 마켓에 대해서 정부는 어떻게 레귤레이션 할 거냐, 마켓을 공정하게 관리하고 그 마켓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GDP(국내총생산)를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아주 효율적인 시장이 될 수 있도록 공정한 경쟁 체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정부가 시장에 대해서 관여하고 개입해야 하는 기본적인 방향이다. (…) 금융기관의 거버넌스가 아주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일이다. (…) 2023년에는 그야말로 다시 대한민국, 도약하는 그런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더 아주 어그레시브하게 뛰어봅시다." 나는 아직도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 거버넌스, 어그레시브 등 내가 했던 말들의 의미를 여전히 모르고 있다.


최근에 아내 멧돼지는 밖으로만 나돌고 있다. 물론 나와 아내 멧돼지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고, 필요에 의한 공생관계이긴 하지만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아내 멧돼지는 나의 권력이 필요하고, 나는 아내 멧돼지의 재력이 필요할 뿐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남들처럼 알콩달콩 사는 모습이 부러운 것이다. 더구나 내일은 인간들이 반기는 성탄절 아니가. 동장군의 기세만큼이나 가슴에는 찬바람이 휘몰아친다. '아, 사는 게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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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별명 혹은 애칭


결혼 전, 수컷 멧돼지들의 술시중을 들었던 아내 멧돼지의 예명은 줄리였다. 다른 암컷 멧돼지들에 비해 마르고 여리여리한 체구를 지녔던 아내 멧돼지는 체구와는 걸맞지 않은 걸걸한 목소리와 툭 불거진 광대뼈로 인해 사납고 억세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뒷골목 똘마니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부터 술과 암컷 멧돼지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나였기에 술자리에서 처음 본 아내 멧돼지의 얼굴은 그닥 호감이 가는 인상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혼기도 한참이나 지났고, 술에 절어 엉망이 된 몸으로 젊고 어여쁜 암컷 멧돼지를 차지한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기에 주변의 다른 멧돼지들의 반복되는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별명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어렸을 적 나의 별명은 '꼴통'이었다. 젊은 멧돼지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아버지 멧돼지는 밖에서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엄격' 그 자체인 경우가 많았고, 이에 불만이 많았던 나로서는 아버지 멧돼지의 눈을 피해 매번 밖으로 나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른들의 뜻에 반하여 하지 말라는 일만 골라서 하다 보니 '꼴통'이라는 말이 내 이름처럼 따라붙었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 때까지 그 별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와 더불어 친구 멧돼지들은 나를 '돌+아이' 혹은 '4차원'이라고 부르기 일쑤였다. 말재주도 없고 운동신경도 좋지 않았던 나는 친구 멧돼지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그 나이대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할 수밖에 없었고, 개중에는 더러 기괴하고 요상한 짓거리도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나의 행동을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교우관계에 있어서는 왕따나 다름없었던 나의 하루는 몸이 배배 꼬일 정도로 무료했고,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공부밖에 없었다. 아버지 멧돼지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나 내가 멧돼지계에서는 가장 좋다는 대학에 진학을 하기까지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래의 다른 멧돼지들이 암컷 멧돼지들과 떼를 지어 이리저리 몰려다닐 때 나는 그저 부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이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는 틈만 나면 진흙 목욕을 하거나 썩은 나무를 일삼아 들이받기도 했다. 성체 멧돼지가 된 내가 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뒷골목 똘마니 시험에 9번이나 떨어졌던 것도 따지고 보면 비참했던 나의 청소년기와 무관치 않았다.


뒷골목 똘마니 시험에 합격한 나는 모든 걸 내 손아귀에 쥔 듯 의기양양했다. 그렇다고 뜻하는 대로 일이 술술 풀려나갔던 건 아니지만 전임 리더 멧돼지 두 마리를 감옥에 보낸 후로 나는 승승장구했고, 경쟁자였던 장관 멧돼지의 가정마저 박살냄으로써 결국 나는 리더 멧돼지에 오르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멧돼지계의 관습이나 정서에 적합했던 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런 비정한 멧돼지로는 남고 싶지 않았지만 한 번 칼을 뽑았으면 완전히 싹을 잘라야 한다는 아내 멧돼지의 조언에 따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나를 비방하는 여러 멧돼지들이 잔인무도한 나를 일컬어 '짜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리더 멧돼지가 되는 과정에서도 나는 '도리도리', '무식이', '무능이', '술통', '개고기', '쩍벌이' 등 여러 별명을 함께 얻었다. 자랑스럽게도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얍삽이'로 불리는 '동운' 멧돼지나 '두꺼비'로 불리는 '상민' 멧돼지 등 내 측근 중에는 그들 각자에 어울리는 별명을 적어도 하나씩은 갖고 있는 듯하다. 별명 숫자를 셀 수도 없이 많이 갖고 있는 나에 비하면 그들은 아직 정치 새내기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남산 기슭의 음습한 곳으로 이사를 한 후 '동운' 멧돼지와 '상민' 멧돼지를 집으로 부르지 않았더니 섭섭하다며 난리를 치는 통에 어제는 그들을 불러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셨더니 아침에 늦잠을 잤다. 야행성인 멧돼지가 늦잠이라니... 얼마 전 젊은 멧돼지들의 참사가 있었지만 내가 측근들을 불러 부어라 마셔라 놀고 싶다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리더 멧돼지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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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 말, 말...


그해 구설수를 조심하라는 천공(千空) 스승의 말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얼떨결에 리더 멧돼지로 당선된 나는 한동안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고, 하루하루가, 어쩌면 매 시간이 온통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온종일 술만 마셔도 취하지 않을 듯했고, 서너 끼를 굶어도 배가 고프거나 허기가 지지 않을 듯했다. 세상이 온통 무지개 빛으로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들뜬 기분으로 해외 나들이를 갔던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멧돼지라는 '날리면'(혹은 바이든) 멧돼지와 만나 인사를 나눈 직후 곁에 있던 똘마니 멧돼지에게 "국회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 하고 농담 삼아 했던 말이 화근이었다. 선천적으로 목소리가 큰 내가 딴에는 소리를 줄여서 한다고 했는데 주변에 있던 다른 멧돼지들의 귀에 선명하게 전달되었을 뿐 아니라 그 말이 온 나라에 토시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고스란히 퍼지고 말았다. 창피도 그런 창피가 없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진상조사 카드를 꺼내 어깃장을 놓았으나 나의 말을 믿어주는 멧돼지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크라우드 매니지먼트'라는 말을 썼다가 아내 멧돼지로부터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쭐이 났다. 흉내도 낼 줄 모르는 내가 괜히 겉멋만 들어서 '날리면' 멧돼지의 말을 따라 했다는 것이 아내 멧돼지가 나를 혼낸 이유였다. 리더 멧돼지로서 가오가 서려면 세계 최강이라는 '날리면' 멧돼지를 모델로 삼아 그대로 따라 하는 게 다른 멧돼지들로부터 존경과 우러름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던 게 오판이었다. 나는 아내 멧돼지 앞에서 인간들처럼 두 발로 선 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한 시간 동안 부동자세(부동시는 아니고)로 서 있어야만 했었다. 그 바람에 나는 여왕 멧돼지의 상가에 늦게 도착하였고, 남들은 다 하는 조문도 결국 거르고야 말았다.


이런 나를 두고 북쪽의 여정 멧돼지는 '천치 바보'라며 막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들어 보니 맞는 말이긴 한데 기분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문학작품을 즐겨 읽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는 부친 멧돼지의 지시에 따라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 등을 읽었을 뿐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한동안 술과 유흥에 빠져 살았다. 그렇게 십수 년을 허비하는 동안 부친 멧돼지로부터 몇 차례의 엄한 꾸지람이 있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법전을 읽게 되었다. 부친 멧돼지의 도움 덕분에 나는 뒷골목 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교과서와 법전만 읽었던 놈이 정치라는 생판 모르는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것 자체가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정치는 타인에 대한 공감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공감에 대해 전혀 배운 바가 없는 나로서는 정치판의 모든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선거 과정에서 나와 경쟁했던 놈과 그 패거리들이라도 실컷 두들겨주어야만 직성이 풀릴 듯했다. 리더로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간언도 있었지만 나는 다 무시해버렸다.


평생을 뒷골목 세계에서 보냈던 나로서는 그곳의 언어와 말버릇을 털어내는 게 무척이나 힘들고 어렵기만 하다. 지금은 그곳의 언어도 많이 순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과거에는 주로 욕설과 음담패설이 대화의 80~90%를 차지했었다. 그와 같은 모습은 거칠 것이 없는 그곳 세계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싶다는데 누가 제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일종의 힘의 과시가 그들로 하여금 지나친 욕설과 음담패설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살아왔던 내가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하는 존댓말은 여간 낯간지러운 게 아니다. 지금도 나는 그 시절이 가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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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6 16: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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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8 16: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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