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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충복들


리더 멧돼지가 되고 보니 다 좋은데 하나 아쉬운 건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점이었다. 똘마니들을 데리고 뒷골목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어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무시로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리더 멧돼지가 되자 나의 신변을 보호하는 경호 멧돼지며 비서 멧돼지 등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동행하는 멧돼지가 어찌나 많은지 매번 떼를 지어 이동하는 통에 그들의 눈을 피해 예전의 똘마니들과 호젓하게 술을 마신다는 건 꿈같은 일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나는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인데 꽐라가 된 내 모습이 소문을 타고 일반 멧돼지들에게 알려지는 바람에 아내 멧돼지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받았고, 나는 그 일이 있은 후 극도로 조심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바로 아내 멧돼지였기 때문이다. 결혼 전, 그러니까 내가 술과 여자에 빠져 살면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처럼 행동하던 시절, 종종 나의 술시중을 들었던 아내 멧돼지는 자신의 집안에 가득 쟁여 둔 곡식과 고기 등 다른 멧돼지들이 탐낼 만한 풍족한 재산을 보여주며 자신과의 결혼을 생각해보라며 넌지시 유혹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내 멧돼지의 생각은 변함이 없는 듯했다. 자신과 친인척들에게는 없는 권력, 그것이 나를 유혹했던 유일한 이유였고 지금도 아내 멧돼지는 내가 소유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떤 짓을 하든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심지어 내가 다른 여자 멧돼지와 관계를 맺든, 싸움질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관계를 맺기 전 그에 합당한 돈을 지불하여 소문만 나지 않게 해 달라는 게 유일한 조건이었다. 그런 쿨한 태도가 맘에 들었던 나는 아내 멧돼지의 천박한 품행에 대한 여러 소문을 무시한 채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의 첫 번째 충복이 된 아내 멧돼지보다 더 오랫동안 알고 지낸 멧돼지가 두 마리나 더 있다. 멧돼지계에서는 같은 배에서 출산하는 멧돼지 숫자가 워낙 많고 흔하다 보니 쌍둥이라는 개념은 없다. 대신에 하는 짓이나 생각 등이 비슷한 두 멧돼지를 일러 '동운(同韻)'이라고 하는데, 뒷골목 생활을 하던 시절 나의 똘마니 중 한 마리였던, 그러나 다른 멧돼지들보다 영민하고 나의 말을 잘 들었던, 그럼에도 이름조차 없었던 멧돼지에게 나는 '동운(同韻)'이라는 이름을 하사했고, 그는 나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결혼 후 아내 멧돼지 역시 작은 분란만 있어도 '동운' 멧돼지에게 그 사실을 알려 해결을 부탁하곤 했으며, 그럴 때마다 '동운' 멧돼지는 만사를 제쳐둔 채 전력을 다해 아내 멧돼지를 도와주곤 하였다.


'상민(常民)' 멧돼지는 '동운' 멧돼지에 비하면 성격도 하는 짓도 판이하게 달랐다. 그도 역시 나의 똘마니 멧돼지들 중 일원이었으며 이름이 없었던 건 '동운' 멧돼지와 같았다. 어느 날 여러 멧돼지들과 거나하게 취해 있을 때 '상민' 멧돼지가 헐레벌떡 술판으로 뛰어들었고, 그의 계급이 상민(常民)이었던 까닭에 "어이, 상민(常民) 왔는가?" 하고 반갑게 물었던 것이 인연이 돼서 '상민' 멧돼지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행동은 좀 굼뜨지만 나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해서 나는 사실 그가 웬만한 실수를 저질러도 모르는 척 눈감아주는 편이었다. 얼마 전에도 젊은 멧돼지들이 좁은 골목에서 서로 먼저 가겠다고 우격다짐으로 서로 밀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와 부상자가 나왔고, 이에 분개한 전국의 멧돼지들이 치안과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상민 멧돼지의 책임을 물어 경질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어깨를 두드려주며 그의 노고를 격려했었다. 멧돼지들이란 그저 잠시 동안 눈물을 보이는 척하고 아랫것들을 적당히 벌을 주는 시늉만 해도 그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 수 있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충성을 다하는 '동운' 멧돼지와 '상민' 멧돼지가 있고, 몇몇 멧핵관들이 존재하지만 나의 퇴진을 주장하는 멧돼지들의 행진이 주말마다 이어지고 있고, 소위 학자 멧돼지들도 나의 리더십에 반기를 드는 추세가 뚜렷하다.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조만간 전투 멧돼지를 동원하여 무섭게 겁을 주어야만 사그라들 듯하다. 리더 멧돼지가 되면 마음껏 술이나 퍼먹고 원하는 여자 멧돼지를 언제든 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골치 아픈 일들이 끝없이 이어질 줄이야...


*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히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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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0 19: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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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3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소심한 멧돼지의 복수


그해 나는 리더 멧돼지가 되었다. 나를 지지하는 뒷골목 똘마니들의 단합과 응원 덕분에 어찌어찌 뒷골목을 통솔하는 총장 멧돼지에 오르기는 했었지만 나의 출세는 거기에서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스승인 천공(千空) 멧돼지의 적극적인 출마 권유가 나와 아내 멧돼지의 마음을 움직였고, '설마 되겠어?'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일단 출마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게다가 천공이 누구던가! 건강 관리를 잘하는 멧돼지의 평균 수명이 17~20년인 걸 감안할 때 평생 천 개의 구멍(空)을 판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는데 15세인 천공 멧돼지는 이미 950공(空)을 넘어 천공(千空)을 목전에 둔, 가히 멧돼지계의 전설로 불리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멧돼지의 습성상 눈만 뜨면 땅을 파는 여느 멧돼지와는 달리 그를 찾는 많은 멧돼지들을 상대하면서도 구멍을 뚫는 성과면에서는 다른 멧돼지들을 월등히 앞서가는 걸 보면서 우리와 같은 보통의 멧돼지들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많은 멧돼지들이 그를 칭하여 "가히 천공(千空)이로고!" 하는 감탄을 쏟아냈던 것이다. 그런 분이 나의 출마를 권유했을 뿐만 아니라 리더 후보들이 등장하는 토론장에 나갈 때면 친히 나의 네 발에 왕(王) 자를 써주기까지 했으니 나로서는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상대 후보를 가까스로 물리치고 리더 멧돼지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6개월이 지났다.


며칠 전에는 리더 멧돼지 관사로 이사를 했다. 남산 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곳이지만 식구라고는 아내 멧돼지와 비상식량이자 도시락 대용으로 키우고 있는 강아지 몇 마리가 전부이니 이전 리더가 살았던 북악산 밑의 관저가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리더 멧돼지를 보호하기 위해 상주하는 많은 멧돼지들의 북적거림으로 인해 그곳에서는 적어도 지금과 같은 정적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 머리를 맴돌았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아내 멧돼지의 히스테리성 발작이 점점 더 심해지는 걸 보면 이곳으로의 이사는 나에게나 아내 멧돼지에게나 결코 이롭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진작 천공 스승을 찾아뵙고 상의를 드릴 걸...'


나는 사실 겁도 많고 소심하며 누구보다도 이기적이며 속 좁은 멧돼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런 성격이 형성된 데에는 아버지 멧돼지의 영향이 컸다. 유년 시절 나는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모든 것을 아버지 멧돼지의 계획에 따라야만 했었는데 이런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멧돼지에게 대들거나 반항하지 못했다. 그것은 순전히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리더 멧돼지가 된 후 내가 했던 모든 연설에서 '자유'를 역설했다. 그것은 어쩌면 자유를 누리지 못한 어느 멧돼지의 분노이자 넋두리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약간의 분노조절장애가 있던 나는 나약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선공(先攻)이라고 믿게 되었다.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은 나는 일명 '선빵'을 통하여 나를 증명했고, 내 편에 서는 멧돼지는 누구나 진심을 다해 애정을 쏟았다. 그것이 어쩌면 적자생존의 멧돼지계에서 겁 많고 소심했던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생존전략이었는지도 모른다. 리더 멧돼지가 된 뒤에도 나는 나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멧돼지란 멧돼지는 모두 제거해버렸다. 전임 정권에서 뒷골목의 총장(총대장이라는 의미)을 지냈던 나는 당시 차기 리더로 지목되었던 한 인물을 잔인하게 도륙했고, 그 결과 그의 가족 전체가 재기불능의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에도 일부 멧돼지들은 너무 잔인하다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반대하기도 했었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철저히 응징해야 한다는 걸 나는 일찌감치 어둠의 세계에서 배워 익혔었다. 그것을 일부 소문 멧돼지들이 나의 행동을 두고 정의롭다며 추켜세웠고 나의 이미지는 그렇게 굳어졌다. 집요함은 끈질기다로, 잔인함은 정의롭다로...


겁 많고 소심한 성격인지라 만성 변비와 소화불량을 달고 사는 통에 아무데서나 방귀를 뿡뿡 뀌는 건 막을 수가 없다. 다른 멧돼지들은 내가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까닭에 어린 인간들이나 하는 도리도리를 따라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껴왔던 나로서는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하여 사방을 훑어보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졌던 것인데 남 말 하기 좋아하는 멧돼지들이 도리도리로 표현했을 뿐이다.


일기를 처음 쓰다 보니 말이 길어졌다. 다음 일기에서는 나의 영역인 용산에서의 일상을 써보기로 한다.


*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히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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